대만과 단절 조건 비밀리 협상, 실무단 첫 회동 석 달 만에 공식화…북한, 중국의 ‘답정너’ 통보 마지못해 받아들여
중국과 한국이 수교 체결에 서명을 한 것은 1992년 8월 24일이다. 이날 양국 외교부 장관은 베이징에서 공동 보도문을 발표했다. 이 소식은 전세계에서도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그 후 두 나라의 무역 거래량은 폭발적으로 늘었다. 2021년 양국 무역 교역액수는 3600억 달러(480조 7000억 원)로 1992년에 비해 72배 증가했다.
사실 수교를 발표하기 전부터 세계 외교가에선 두 나라가 은밀한 협상 중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노태우 씨는 8월 17일 기자들을 이끌고 중국을 방문했다. 중국에선 60세 생일을 맞은 노태우 대통령에게 ‘지구본’을 선물로 줬다. 이를 지켜본 전문가들은 중국과 한국의 수교가 임박했다고 관측했고, 그로부터 일주일 뒤 공식 발표했다.
중국은 공식적으론 한국과의 수교를 부인했었다. 첸지천 외교부 장관은 한국과의 관계에 변화가 있느냐는 질문에 항상 “한국과는 수교할 계획이 없다”는 말만을 반복했었다. 하지만 이는 철저한 보안유지를 위한 것이었다. 내부적으론 수교를 위한 일정이 잡혀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한중 수교의 기틀을 만든 것은 덩샤오핑이다. 그는 1985년 “한국과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게 중국에게도 이롭다”고 했다. 경제적으로 눈부신 발전을 기록하고 있던 한국을 상대로 무역을 하자는 주장이었다. 단, 덩샤오핑은 한국과 대만의 외교관계가 재설정되는 것을 수교의 전제조건으로 들었다.
이후에도 덩샤오핑은 여러 차례 한중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은 발언을 했다. “때가 무르익어 수교를 맺으면 경제적으로 쌍방에 유리하다. 또 문화 교류가 더 빨라질 수 있다”, “중국과 한국, 두 나라 국민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은 중국의 중요한 전략이다”, “수교를 하기 전 북한에게 양해를 구해야 할 것” 등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에선 노태우 정부가 출범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취임 일성으로 ‘북방 정책’을 내세웠다. 중국, 소련 등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게 골자였다. 그 중심에 중국과의 수교가 있었다. 1991년 중국과 한국은 양국에 무역 사무소를 설치하는 데 합의했다. 당시 두 나라 교역액은 50억 달러(6조 6000억 원)에 불과했다.
1991년 11월은 양국 수교의 분수령이 된 때다. 첸지천 외교부 장관은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장관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을 방문했다. 중국 대표가 이 회의에 참석한 것은 처음이다. 또 중국의 외교부 장관이 서울 한복판에 나타난 것도 이목을 끌었다. 경제협력체 회의의 주요 관심사는 한중 관계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에 쏠렸다.
첸지천은 청와대를 방문해 노태우 대통령을 만났다. 첸지천은 추후 노 대통령에 대해 “군인 출신이지만 비교적 온화했다. 풍채가 유려했다. 임기가 끝나기 전까지 중국과 수교를 맺고 싶어 한다. 수교 문제에 대해 다소 조급해 보였다”고 했다. 노 대통령은 첸지천에게 “한국은 진심으로 중국과 관계를 개선하기 바란다”고 말했다고 한다.
첸지천이 서울을 다녀온 후 중국 외교부 아시아국 부국장이던 장팅옌을 중심으로 ‘한국 스터디’가 시작됐다. 이들은 한국과의 수교를 위한 구체적인 플랜을 세웠다. 당시 사정에 밝은 당국자는 “수교를 위한 기초를 다졌다. 알려지진 않았지만 그때 외교부에 꾸려진 팀이 막후에서 중요한 일을 했다”고 귀띔했다.
1992년 4월 베이징에선 아태경제사회이사회가 열렸다. 첸지천은 여기에 참석하기 위해 베이징을 방문한 한국의 외무부 장관 이상옥을 만났다. 둘은 양국 관계를 한 단계 더 발전시키는 것에 합의했고, 이를 위해 차관급을 대표로 하는 실무단을 꾸리기로 했다. 그 이후 이 실무단은 베이징과 서울을 오가며 은밀히 수교를 준비했다.
1992년 5월 13일 양측의 ‘비밀 채널’이 첫 모임을 가졌다. 당시 중국에 알려진 바로는 한국 실무단은 자신의 근무지로부터 격리된 채 협상을 위한 대책을 했다고 한다. 이 실무진은 직장 동료는 물론 가족들에게조차 어떤 업무인지 알리지 않았다. 한국 실무단은 노태우 대통령이 직접 챙긴 것으로도 전해졌다.
양측 실무단은 언론의 눈을 피해 댜오위타이에 위치한 국빈관 호텔에서 만났다. 큰 장애물은 없었지만 대만이 걸림돌로 작용했다. 1차 만남에서 수교를 맺자는 큰 틀에는 합의를 했고, 대만 문제는 다음으로 넘겼다. 수교를 위한 ‘핫라인 개통’이 어느 정도 성공한 셈이었다.
보름 뒤 실무단은 댜오위타이에서 다시 만났다. 중국 측은 한국을 향해 “대만과의 단교, 조약 파기”를 요구했다. 이에 한국은 대만과의 관계가 특수할 뿐 아니라 시간이 오래 지났음을 강조하며 중국 측에 이해를 부탁했다. 대만을 둘러싸고 공방이 오갔지만 회의 분위기는 상당히 좋았다. 마오타이주를 나눠 마시며 양측은 우애를 쌓았다.
3차 회동은 6월 20일부터 21일까지 서울 워커힐호텔에서 열렸다. 한국을 비롯한 언론에선 중국 실무단 방한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중국의 협상 전략은 새로울 게 없었다. 노태우 대통령이 임기 내에 수교를 마무리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최대한 이용하는 것이었다. 결국 한국은 대만과의 외교를 단절하기로 했고, 중국과 한국은 담판에 성공했다.
중국은 한국과의 수교를 체결하기 전 북한을 어떻게 설득할지가 고민이었다. 1992년 4월 김일성 80회 생일 축하 사절단으로 평양을 찾은 중국 측 대표는 “한국과의 국교정상화를 검토 중”이라고 전했다. 그러자 김일성은 “지금 한반도는 미묘하다. 한중수교 시기를 늦추기 바란다”고 답했다. 이에 중국 측 대표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미 한국과 수교를 맺기로 결론을 내린 상태였기 때문이다.
수교 발표 한 달여 전인 1992년 7월 15일 첸지천이 이끄는 일행은 공군 전용기를 타고 평양을 찾았다. 김일성을 만난 자리에서 한국과의 수교가 불가피하다는 점을 설명했다. 첸지천은 김일성에게 “북미, 북일 관계 개선을 위해서도 노력할 것”이라고 했다. 이에 김일성은 잠시 생각에 잠긴 뒤 “중국이 결정한 만큼 그렇게 하자”는 취지로 답했다. 그리고 자리를 떴다. 첸지천에 따르면 김일성이 역대 중국 대표단을 만난 것 중 가장 짧은 시간이었다.
중국=배경화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