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환·전의산 ‘거포 본색’ 발휘…김현준 ‘1번타자 중견수’ 계보 이어
막상 뚜껑을 열자 상황은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다. 두 선수가 엄청난 관심과 기대에 짓눌려 부상과 부진으로 고생하는 사이,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던 '중고신인'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치열한 신인왕 레이스를 시작했다. 시즌 초반부터 중반을 지나 후반에 이르기까지, 경쟁 구도에 끊임없이 변화가 거듭되는 것도 올 시즌 특징이다.
#박찬혁-이재현의 초반 약진
시즌 초반에는 키움 히어로즈 외야수 박찬혁(19)과 삼성 라이온즈 내야수 이재현(19)이 먼저 치고 나갔다. 박찬혁은 올해 신인 2차지명 1라운드(전체 6순위)에서 키움의 선택을 받은 유망주다. 북일고 시절 3년간 7할대 장타율을 기록한 덕에 키움의 차세대 거포로 낙점됐다.
그는 시즌 개막전부터 9번 타자 1루수로 선발 출장한 뒤 고졸 신인으로는 역대 최초로 데뷔전 멀티히트를 때려내 강한 인상을 심었다. 이 경기에서 파울 홈런을 쳐 만만치 않은 힘을 과시했고, 결국 프로 8번째 경기에서 큼직한 솔로 홈런을 터트려 신인 중 가장 먼저 마수걸이포를 신고했다.
이뿐 아니다. 4월 한 달간 홈런 5개를 추가하면서 박병호(KT 위즈), 김현수(LG 트윈스), 이정후(키움) 등과 홈런 1위 경쟁도 펼쳤다. 스스로 첫 시즌 목표로 삼았던 홈런 10개 중 절반을 첫 달에 다 채운 것이다. 팀 선배 이정후는 "독보적인 신인왕 1순위 후보는 박찬혁 아닌가. 신인 선수가 정말 잘하고 있다"며 적극적인 홍보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냉혹한 프로의 세계는 갓 입단한 신인 거포에게 끝내 쓴맛을 보여줬다. 5월로 접어들면서 부진에 빠졌고, 5월 18일 1군 엔트리에서 말소됐다. 설상가상 5월 말엔 외야 수비를 하다 펜스에 부딪혀 어깨 근육이 찢어졌다. 결국 두 달여가 흐른 7월 26일에야 1군에 돌아왔는데, 이후에도 시즌 초반의 임팩트는 되찾지 못하고 있다.
그사이 조금 뒤에서 달려오던 이재현이 박찬혁을 추월했다. 삼성이 1차 지명한 이재현은 김도영, 박찬혁과 함께 개막전부터 꾸준히 출장 기회를 잡은 3명의 신인 중 한 명이다. 경기를 거듭할수록 안정적인 기량으로 공수에서 제 몫을 해내면서 삼성의 주전 내야수로 서서히 자리를 잡았다. 4월까지는 3루수와 유격수를 오갔지만, 5월부터는 유격수로 자신의 포지션도 굳혔다. 올해 입단한 신인 중 5월까지 가장 많은 경기에 출전해 가장 많은 안타를 쳤다. 박찬혁의 5월 부진이 길어지면서 신인왕 경쟁의 무게 추는 이재현 쪽으로 기우는 듯했다.
하지만 이재현도 5월 말 허벅지 부상에 발목을 잡혔다. 치료와 재활을 거쳐 7월 초 다시 팀에 복귀했지만, 7월 말 한화 이글스와 포항 경기에서 수비하다 오른손 엄지를 다쳐 다시 이탈했다. 꾸준히 삼성의 주전 유격수로 성장하던 시기에 연속으로 큰 암초를 만나 레이스를 멈췄다. 박찬혁과 이재현 둘 다 출발이 무척 좋았기에 더 아쉬운 결과였다.
#28세 김인환의 최고령 도전
박찬혁과 이재현이 부상으로 빠진 틈을 타 3명의 '중고신인' 타자가 신인왕 자리를 두고 삼각구도를 만들기 시작했다. 21경기 연속으로 안타를 쳐 KBO리그 19세 이하 연속 안타 신기록을 세운 삼성 외야수 김현준(20), 놀라운 거포 잠재력을 뽐내고 있는 SSG 랜더스 내야수 전의산(22), 신인왕 수상이 가능한 마지막 시즌에 뒤늦게 빛을 보기 시작한 한화 내야수 김인환(28)이 그 주인공이다.
이들 중 가장 놀라움을 안긴 선수는 유일한 20대 후반 신인왕 후보인 김인환이다. 프로 지명을 받지 못해 2016년 육성선수로 입단한 대졸 선수가 2022년 최고령 신인왕 후보로 거론되는 상황 자체가 한 편의 드라마다.
김인환은 성균관대 졸업반이던 2016년 신인 2차드래프트 회의에서 호명되지 않았다. 큰 체격(키 186㎝, 체중 88㎏)을 눈여겨본 한화와 육성선수 계약을 해 힘겹게 프로의 꿈을 이뤘지만, 당시 그의 포지션인 1루와 3루엔 김태균과 송광민이라는 베테랑 주전 선수가 버티고 있었다. 2018년 퓨처스(2군)리그 80경기에서 타율 0.335, 16홈런을 기록하고도 좀처럼 1군에서 뛸 기회를 얻지 못했다. 2019년까지 1군 22경기에서 52타석에 선 게 전부였다. 2020년엔 국군체육부대(상무) 야구단에 지원서를 냈다가 탈락해 현역으로 군복무를 해야 했다. 군 생활이 유독 길게만 느껴졌다.
지난해 전역한 뒤에도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진 못했다. 카를로스 수베로 감독이 새로 부임했지만, 김인환에 대한 데이터가 없었던 수베로 감독은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 겨울 달라진 스윙을 본 최원호 2군 감독이 수베로 감독에게 "좋은 대타 요원이 있다"며 적극 추천했고, 김인환을 직접 본 수베로 감독 역시 좋은 평가를 내렸다.
모처럼 1군에 자신의 자리를 마련한 김인환은 코칭스태프의 기대에 부응해나갔다. 5월부터 1군에 합류했고, 역할은 점점 대타가 아닌 주전으로 바뀌었다. 지난해까지는 1군에서 홈런을 1개도 치지 못한 타자가 지난 5월 4일 SSG 랜더스전부터 빠르게 홈런을 생산해나갔다. 특히 지난 21일 부산 롯데 자이언츠전에서 올 시즌 15호 홈런을 때려내면서 오재일, 호세 피렐라(이상 삼성), 이정후에 이어 올 시즌 4번째로 전 구단을 상대로 홈런을 친 타자가 됐다. 남들보다 늦게 출발했는데도 그렇다.
김인환 자신에게도 감격스러운 일이다. 이런 스포트라이트는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다. "1군에서 뛰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던 그는 "이렇게까지 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1군에서 오래 버티자'는 생각으로 하나하나 이겨 나갔는데, 이젠 조금 여유도 생겼다"고 웃었다.
이제는 상대팀도 김인환을 견제한다. 당겨치는 타구가 많은 김인환에 대비해 수비진을 오른쪽으로 당기는 수비 시프트를 쓸 정도다. 최근엔 2경기 연속 고의4구를 얻어내기도 했다. 그래도 김인환은 손사래를 쳤다. "나를 시즌 초반보다는 신경 쓴다는 느낌을 받을 뿐이다. 나는 시프트와 관계 없이 한 타석, 한 타석 내 스윙을 할 뿐"이라고 했다.
수베로 감독은 김인환에 대해 "KBO리그 왼손타자들은 낮은 공에만 강점을 보이는 경우가 많은데, 김인환은 높은 공도 잘 친다. 거포의 자질이 있다"고 흡족해했다. 김인환도 "배팅포인트를 앞에 두고 있어서 빠른 공과 높은 공 모두 자신 있다"고 했다. 주로 당겨쳐서 홈런을 때리던 김인환이지만, 7월 23일 KT 위즈전에선 언더핸드 에이스 고영표를 상대로 밀어서 왼쪽 담장을 넘기는 기술도 보여줬다.
홈런 타자의 존재에 오랜 갈증을 느껴온 한화 팬들도 김인환의 출현에 열광하고 있다. 그는 2군 시절부터 '알파카 닮은 꼴'로 통하는데, 지난 5월 29일 KT전부터 홈런을 칠 때마다 알파카 인형을 선물로 받고 있다. 더그아웃이나 라커룸에 항상 '모셔' 두는 알파카 인형의 수가 늘어날수록 김인환의 자신감도 커진다. 김인환은 "팀 성적도 좋지 않은데 팬들이 많이 응원해주셔서 정말 감사하다"며 웃었다.
KBO리그는 입단 후 5시즌을 넘기지 않고 통산 60타석 이하를 소화한 야수에게만 신인왕 후보 자격을 준다. 김인환은 2018년부터 육성선수 꼬리표를 떼고 정식선수로 등록됐기 때문에 역대 KBO리그 최고령 신인왕에 도전할 자격이 있다. 종전 최고령 수상 기록은 27세에 신인왕 트로피를 받은 투수 신재영(당시 넥센)이다. 한화 선수로는 류현진(2006년)이 마지막으로 수상했다.
김인환은 "입단한 지 꽤 됐으니까 처음엔 신인왕 자격이 있는 줄도 몰랐다. 주변의 이야기를 듣고 '아, 그런가'라는 생각은 했지만, 아직 '신인왕 후보'라는 얘기가 적응이 안 된다"며 "감사하지만 신인왕은 생각도 하지 않고 있고, 욕심도 나지 않는다. 시즌이 끝날 때까지 기록은 전혀 신경 쓰지 않을 거고, 찾아보지도 않겠다"고 했다. 마음을 비우고 하루하루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겠다는 의미다.
#거포 전의산과 잘 치는 김현준
3년 차 전의산도 선두 SSG의 질주에 날개를 단 주역 중 한 명이다. 2020년 2차 1라운드(전체 10순위)로 뽑혔지만 지난 시즌까지 1군 무대를 단 한 번도 밟아보지 못하고 2군에 머물렀다. 하지만 외국인 타자 케빈 크론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주전 1루수 자리를 단숨에 꿰차는 저력을 보였다. 무시무시한 장타력과 클러치 능력, 물 오른 타격감으로 쟁쟁한 SSG 중심 타선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는 데 성공했다. 전의산을 발견한 SSG는 부진한 크론을 미련 없이 방출하고 새 외국인 타자로 외야수 후안 라가레스를 데려왔다. 1루수 전의산을 향한 SSG의 확신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단 한 번 주어진 기회를 확실하게 낚아챈 보상을 받은 셈이다.
전의산은 "2군에 있을 때 언젠가는 기회가 찾아오리라 생각하며 준비했다. 그런 과정이 이런 결과를 만든 것 같다"며 "처음 1군에 왔을 때는 이렇게 오랫동안 1군에 머물 줄 예상하지 못했다. 그저 최선을 다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보여드리자는 생각으로 경기에 임했다"고 했다.
김인환과 마찬가지로 전의산의 특장점은 장타력이다. 특히 그는 올 시즌 국내 선수 중 비거리가 가장 긴 홈런을 쳤다. 8월 14일 잠실 두산 베어스전에서 1-1로 맞선 4회 초 1사 1루서 두산 선발 곽빈을 상대로 시즌 9호 아치를 그렸는데, 이 타구가 잠실구장 오른쪽 관중석 상단까지 날아갔다. 이 홈런의 비거리는 140m(KBO 공식 기록 기준)로 측정됐다. 외국인 타자 크론과 야시엘 푸이그(키움)가 한 차례씩 140m짜리 홈런을 친 적은 있지만, 국내 선수는 전의산이 처음이다. 후반기 들어 타격 페이스가 주춤하면서 타순이 7번까지 떨어졌던 전의산은 이 홈런을 기점으로 다시 조금씩 반등하고 있다.
김원형 SSG 감독은 "처음 1군에 올라온 뒤 좋은 모습을 보여 4번 자리에 투입했지만, 장기적으로는 6번 정도에 어울릴 것으로 봤다. 전의산이 부담 없이 타격에 임했으면 좋겠다"며 "앞으로 더 성장하는 선수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삼성 2년 차 외야수 김현준은 최근까지 가장 유력한 신인왕 후보로 거론된 선수다. 지난해 신인 2차 지명에서 9라운드에 간신히 이름이 불렸던 그가 상위 라운드 지명 선수들을 제치고 올해 최고의 활약을 했다. LG 트윈스로 이적한 박해민의 '1번 타자 중견수' 공백을 공수 모두 메웠다는 점에서 더 값지다.
김현준은 프로 지명을 앞둔 고교 3학년 때 유독 부상과 부진으로 애를 먹었다. 타율이 0.279에 그쳤고, 수비 실책도 잦았다. "프로 지명을 받지 못하면 다른 길을 찾아야겠다"고 내심 생각했을 정도다. 신인 2차드래프트가 열리던 날엔 사설 실내훈련장에서 훈련을 하면서 휴대전화로 힐끔힐끔 중계를 봤다. 전 구단의 지명이 막바지에 이른 9라운드에서 전체 83순위로 이름이 불리자 그는 곧바로 바닥에 주저 앉아 눈물을 쏟았다. '계속 야구를 할 수 있다'는 안도의 눈물이었다. 이 모습을 담은 영상이 온라인으로 공개돼 삼성팬들 사이에 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는 "이제 '눈물 흘리는 김현준'은 잊어주셨으면 좋겠다. 조금 더 당당하고, 강인한 선수로 기억되고 싶다"고 했다.
일단 프로의 문턱을 넘은 김현준은 입단 첫해인 지난해 2군에서 0.372를 기록하며 잠재력을 뽐냈다. 올해는 마침내 1군 스프링캠프에 합류했고, 시범경기에서 타율 0.278(18타수 5안타)로 가능성을 보여 개막 엔트리에 이름을 올렸다. 지난 5월부터 1군 붙박이 멤버로 안착한 뒤 6월 중순에는 삼성의 주전 외야수로 확실하게 자리 잡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당당히 신인왕 후보 '톱 3'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8월 14일까지 스탯티즈 기준 야수 신인 대체선수 대비 승리기여(WAR) 1.52로 1위를 달렸다.
다만 신인왕 레이스 막바지에 슬럼프를 만났다. 줄곧 3할이 훌쩍 넘는 타율을 유지하다 직전 10경기 타율 0.121로 성장통을 겪었다. 시즌 타율도 0.287까지 떨어졌다. 박진만 삼성 감독대행이 8월 15일 그를 1군 엔트리에서 제외한 이유다. 박 감독대행은 "신인왕 후보로 자주 거론된 게 선수에게 독이 됐을 수 있다. 야구가 잘될 때는 신나게 뛰어다니는데, 잘 안 되면 압박감을 느끼는 것 같다"며 "원래 김현준은 찬스에서 적극적으로 치는 선수인데, 14일 KT전 만루 찬스에서 스윙을 안 하고 삼진을 당하는 모습을 보고 시간을 주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1군 풀타임 시즌을 처음으로 치르는 선수가 종종 겪는 통과의례다.
'야수 3파전'으로 굳어지는 듯했던 신인왕 레이스에 투수 후보들이 약진하는 모습도 보인다. 두산 오른손 불펜 정철원(23)은 시속 150km가 넘는 강속구를 앞세워 두산의 허리를 떠받치고 있다. SSG에서 KT로 이적한 뒤 기량을 꽃 피운 잠수함 투수 이채호(24)도 최근 인상적인 피칭을 이어가고 있고, 독립리그 출신인 윤산흠(23)은 한화 필승조로 활역하면서 새로운 신화를 쓰고 있다. 2018년 NC 다이노스 1차 지명 선수인 김시훈(23)도 신인왕 경쟁에 합류했고, KT 박영현(19)은 2022년 신인 중 유일하게 신인왕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