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급금 규모 작거나 아예 없는 경우 많아…기술력과 평판 등으로 옥석 가려질 전망
AI 신약개발 기업은 자체 플랫폼을 통해 문헌 정보 수집 및 후보물질과 적응증 확대, 약물설계 등 신약 개발 과정에서 AI 기술을 활용한다. 통상 신약 개발은 후보 물질을 발굴해 임상을 거치기까지 평균 10~15년이 걸린다. 개발 비용도 1조~3조 원에 달한다. AI를 활용할 경우 시간과 비용을 줄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를 받고 있다. 국내 AI 신약개발 기업은 30곳이 넘는 것으로 전해진다.
대형 제약‧바이오 기업과 AI 신약개발 기업의 협업 발표도 잇따른다. 지난 3월 JW중외제약은 온코크로스의 AI 플랫폼을 활용해 신약 적응증을 도출하는 공동연구 계약을 체결했다. 6월 경동제약은 양자역학 기반 AI 신약개발 기업 인세리브로와 혁신신약 공동 연구개발 계약을 맺었다. SK케미칼은 스탠다임, 심플렉스, 디어젠 등 AI 신약개발 기업들과 협업하고 있으며, 삼진제약은 최근 심플렉스와 AI 신약개발 공동 연구 협약을 체결했다.
AI 신약개발 기업에 대한 뜨거운 관심은 투자유치액을 통해 확인된다. 국내 AI 신약개발 기업 25곳을 조사한 결과, 이들 기업이 지금까지 유치한 투자금은 약 3977억 원으로 집계됐다. 대표적으로 파로스아이바이오가 시리즈 C, 팜캐드, 디어젠, 온코크로스 등이 시리즈 B 투자를 유치했으며, 스탠다임은 프리 IPO 단계에 있다. 신테카바이오는 코스닥 시장에 상장했다.
그러나 투자금 대비 매출은 현저히 작은 상황이다. 2019년부터 지난해까지 3년간 이들 기업이 벌어 들인 총 매출은 128억 원 정도였다. 매출 정보가 공개되지 않은 기업도 있어 액수에 차이가 있을 수는 있지만, 투자금과 매출의 차이가 여실히 드러나는 지점이다.
매출 중 AI 신약개발 관련 매출로만 범위를 좁히면 매출 규모는 더욱 작아진다. 중소기업현황정보시스템, 공시, 보도자료 등을 통해 이들 기업 25곳의 AI 신약개발 기술이전 선급금, 연구용역, 정부과제 용역매출을 분석한 결과 매출은 38억 원 정도에 그쳤다. 업계 관계자들은 적잖은 AI 신약개발 기업이 아직은 제대로 된 비즈니스 모델을 구축하지 못하고 있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뜨거운 열기와 다르게 AI 신약개발 기업의 매출이 그다지 크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협업을 원하는 기존 제약‧바이오 기업들이 초기비용 지출에 소극적이기 때문이다. 업계에 따르면 AI 신약개발 기업의 비즈니스 모델은 크게 자사의 AI 플랫폼 서비스를 한 번 제공하는 서비스 용역 계약과 플랫폼을 활용해 제약사와 신약 개발에 함께 나서는 공동연구 계약으로 나뉜다. 주로 중견‧대형 제약‧바이오 기업과 AI 신약개발사는 공동연구 개발 계약을 맺는데, 이때 기업들이 선급금(업프론트)을 낮게 책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업프론트 비용은 곧바로 AI 신약개발 기업의 매출로 잡힌다. 서비스 용역 계약도 아예 비용을 받지 않고 제공해주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한 AI 신약개발사 최고비즈니스책임자(CBO)는 “공동연구 개발 계약 수익은 업프론트와 마일스톤(단계별 기술료), 로열티(상업화 이후 제품의 매출에 따라 받게 되는 금액) 등으로 나뉘는데 고객사인 제약사에서 업프론트 비용을 많이 책정하려 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AI를 활용해 개발된 약이 없기 때문에 검증이 안 됐다고 보는 것이다. 또 지금은 AI 신약개발사가 AI를 이용해 데이터를 도출해주고, 그 약물이 실제로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 검증하는 연구는 제약사들이 본인들의 리소스를 활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때문에 AI 신약개발사의 역할에 한계가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당분간 제약사가 초기 비용을 많이 지출하지 않으려는 움직임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앞서의 CBO는 “인하우스 혹은 협업 파이프라인을 임상에 빨리 진입시켜, 회사의 플랫폼이 정말 약을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줘야 한다. 그러나 인공지능은 아직 후보물질 발굴(디스커버리) 단계 외에 전임상 등에서 시간을 줄여주기는 한계가 있다. 결국 신약 개발의 전형적인 트랙을 타야 하므로 입증에 시간이 아직 많이 걸릴 것”이라고 덧붙였다.
매출을 발생시키지 못한 기업들의 줄도산 가능성도 제기된다. 다른 AI 신약개발사 한 관계자는 “AI 신약 개발을 하는 기업들이 일반 바이오 벤처만큼 많이 필요하다고 보지는 않는다. 여러 방법을 활용해 기간을 단축하고 효율적으로 새로운 후보물질을 도출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AI 업체들이 국내에 많을 이유가 없다. 자연스럽게 국내나 글로벌 시장의 파이를 나눠 가질 수 있을 만한 회사들로 재편될 듯하다”고 내다봤다. 또 다른 AI 신약개발사 대표는 “지금은 AI 신약개발 분야가 막 성장하기 시작한 초반이라 몇 년 후면 매출이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이라면서도 “보수적인 제약업계에서 평판이 좋은 기업 위주의 승자 독식 구조가 자리 잡을 듯하다”고 말했다.
업계에서는 점차 자체 후보물질을 가진 기업 중심으로 옥석이 가려질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영국 AI 신약개발사 엑센시아(Exscientia)는 BMS와 암 자가면역질환치료제 후보물질 발굴 관련 선급금 2500만 달러(약 275억 원)와 마일스톤 및 로열티 수령 계약을 맺었다. 엑센시아가 업프론트를 많이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자체적으로도 물질이 있었고, 그 물질을 함께 연구해보는 방식으로 계약이 성사됐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디어젠, 갤럭스, 심플렉스 등 AI 신약개발사가 최근 자체 연구소를 지은 이유도 이와 무관치 않다. 보통 AI 신약개발사들은 자체 파이프라인에 대한 약물 합성 등을 CRO(임상시험수탁기관) 업체에 맡기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러다 보니 약물 개발의 비용 대비 효율이 떨어지고 시간도 오래 걸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자체 연구소를 통해 인하우스 파이프라인 속도를 높여보겠다는 것이 이들 기업의 전략이다.
외부에 본인들의 기술력을 구체적으로 입증을 하는 게 중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대표적으로 팜캐드는 아이진과 공동 개발 중인 mRNA 백신에 대해 임상 2상 진입을 준비 중인데, 이를 바탕으로 올해 4건의 기술이전 계약 및 공동연구 계약을 체결했다. 각 계약의 규모는 45억~65억 원, 선급금은 2억~5억 원 수준이었다. 팜캐드 관계자는 “특허와 논문으로 기술에 대한 실체를 보여준 게 중요하게 작용한 것 같다”고 말했다.
한편에서는 협업을 원하는 제약‧바이오 기업들도 AI 플랫폼 기술력을 판단할 능력을 자체적으로 갖추고 그에 걸맞은 기업엔 초기비용 투자를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래야 AI 신약 기술 전반이 고도화할 수 있다는 이유다.
김명선 기자 se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