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은 “이르고자 할 바 있어도 그 뜻을 실어 펴지” 못하는 백성들을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눈까지 잃어가며 연구하고 연구해서 누구나 쉽게 쓸 수 있는 언어를 만들었다. 얼마나 눈물 나는 리더인가. 더구나 한자를 익혀 성리학을 공부, 마침내 성리학에 매몰되기까지 한 기득권자들, 문자권력을 쥔 똑똑한 신하들마저 모조리 반대하는 분위기였는데. 세종은 정말 최고의 리더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수긍하고, 실천하는 최고의 군주였다.
만약에 한글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는 어떤 글에 기대 어떤 생활양식으로 살고 있을까.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글을 모르면 소통의 한계가 분명하지만 언어는 단순한 소통수단은 아니다. 언어는 세계다. 한글이야말로 우리 삶에 깊이 들어와 뿌리가 되고, 줄기가 되고, 가지가 되고, 꽃이 되고, 열매가 된 우리의 정체성이다. 평생 백성을 하늘로 모시고 산 세종이니만큼 업적이 많고도 많지만 한글창제만으로도 세종은 대왕이다, 우리의 대왕이다. 우리의 정체성이다.
나는 문득문득 세종이라는 지도자가 한반도에 있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낀다. 이 땅이 버려진 땅일 수 없다고 믿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신분제 사회에서 내가 왕이니 모두 다 내 땅이고, 내 하늘이라고 칼을 휘두르고 겁을 주며 공포정치로 몰아간 연산군 같은 리더도 있었지만, 똑같은 신분제 사회였어도 왕의 하늘은 백성이고, 백성의 하늘은 밥이니, 백성의 밥과 일상을 돌보는 일이 군주의 일이라고 믿는 세종 같은 성군도 있었던 것을 보면 분명 제도 이전에 인간이고 성품이다.
세종을 떠올리면 함께 생각나는 인물이 그의 비 소헌왕후 심씨다. 남편이 왕이 될 줄 모르고 혼인을 했는데, 갑자기 세자가 되고 왕이 된 남편으로 인해 친정아버지가 죽어나가고 어머니와 동생들이 노비가 되는, 아픈 경험을 해야 했던 여인이다. 시아버지인 태종이 외척이 강해지는 것을 꺼려해서 그리했을 때 그 참담한 상황에 대해 어떠한 개입도 하지 못한 남편 세종을 끝까지 존중했던 왕후의 속은 어떤 깊이를 가졌던 것일까. 나는 생각한다. 이들의 인내력은 분명 세상을 아우르는 힘이 되었을 거라고.
소헌왕후가 왕의 집무실인 근정전에 들면 세종은 언제나 일어서서 비를 맞이했다고 한다. 물론 돌아갈 때도 언제나 일어서서 비를 배웅했다고 하니 서로를 존중할 줄 알았던 이 부부야말로 부창부수 아닌가. 어쩌면 세종은 처가댁 식구들이 하루아침에 천민이 되는 것을 보고 신분이라는 것도 그 사람이 입은 옷이지 그 사람 자체는 아니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지 않았을까. 그러니 양민이든 천민이든 모두 하늘이 낸 백성이라는 그의 혁명적 사상체계가 단순히 관념이 아니라 현실을 개혁하는 에너지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세종은 위로는 집현전을 통해 학자들을 키워 나라가 가야 할 방향을 모색했고, 아래로는 노비까지도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고 믿은 왕이었다. 노비는 비록 천민이나 역시 하늘이 낸 백성이라는 것이었다. 노비에게까지 주어진 출산휴가를 보면 그것이 관념적 수식어가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세종은 출산을 한 노비에게 100일의 휴가를 주게 하고, 그 남편에게까지 30일의 휴가를 주게 한 것이다.
지도자로서 세종을 보여주는 사건은 많고 많지만 그중에 그 유명한 황희와의 일화도 있다. 태종이 세자 양녕을 폐하려고 할 때 ‘전하, 그리하시면 아니 된다’고 가장 강력하게 반대했던 신하가 바로 황희였다. 그런데 양녕이 내려오고 그의 아우인 세종의 시대가 열렸을 때 가장 빛난 인물 중에 황희 정승이 있었으니 세종의 포용력은 또 어디까지였던 것일까. 우리의 무의식은 이 땅이 세종이라는 지도자를 가졌던 곳이라는 것을 기억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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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향 수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