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균·정근우·추신수 등 청소년선수권 우승 이후 각 팀 주축으로 성장
아무도 고교 선수들의 국제대회에 주목하지 않던 시절, 이들은 열악한 지원을 감내하면서 캐나다로 날아갔다. 대표팀 사령탑이던 고(故) 조성옥 감독을 중심으로 특급 기량을 가진 유망주들이 똘똘 뭉치자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근성과 투지, 열정과 우정을 앞세워 야구 강국 미국, 캐나다, 멕시코, 쿠바, 일본 등을 차례로 꺾었다. 특히 그해 8월 13일 열린 세계 최강국 미국과 결승전은 그 '기적'의 백미였다. 한국은 연장 13회 접전 끝에 미국을 9-7로 꺾고 우승하는 파란을 일으켰다. 아직까지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 역사에서 최고 명승부 중 하나로 기억되는 경기다.
그때 우승을 완성한 한국 대표팀의 마무리 투수가 부산고 추신수였다. 그의 등 뒤에 있던 1루수 김태균(천안북일고), 2루수 정근우(부산고), 3루수 이대호(경남고)도 한달음에 추신수에게 달려와 역사적인 우승의 감격을 함께했다. 9년 뒤 열린 2009 WBC 대표팀의 내야 주전 라인업을 사실상 미리 본 셈이다.
추신수는 대회 최우수선수(MVP)와 최우수 왼손투수로 선정돼 2관왕에 오른 뒤 메이저리그(MLB) 스카우트들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았다. 결국 고교 졸업 후 곧바로 미국으로 날아가 마이너리그에서 4년간 기량을 갈고 닦았고, 그 후 MLB에서 16년을 뛰면서 공·수·주를 겸비한 외야수로 이름을 날렸다.
다른 동기생들 역시 KBO리그는 물론이고, 미국과 일본 프로야구까지 누비면서 한 수 위의 실력과 이름값을 뽐냈다. 역시 1982년생인 오승환(삼성)은 애드먼턴 대회에 함께 출전하진 않았지만, 이들과 성인 국가대표팀을 함께 이끌면서 KBO리그 사상 최고의 마무리 투수로 우뚝 섰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대호, 김태균, 정근우는 은퇴했고 추신수와 오승환은 선수생활의 황혼기를 맞이했지만, 한국 야구의 인기는 1982년생 선수들의 활약에 많은 부분을 기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