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마 시절 추신수 따라 야구부 갔다 전설 시작…타격 7관왕·9경기 연속 홈런 및 한미일·국대 활약 등 ‘화려’
이대호는 한국인 타자 최초로 한국·미국·일본 프로야구 1군 리그를 모두 경험한 기념비적인 선수다. 해외에서 5년을 뛰었지만, KBO리그에서는 오직 롯데 유니폼만 입었다. 롯데는 이대호의 등번호 10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고(故) 최동원에 이은 롯데 구단 두 번째 영예다. 이제 사직구장에는 최동원의 등번호 '11'과 이대호의 등번호 '10'이 나란히 걸리게 된다. 20세기의 롯데와 21세기의 롯데를 대표하는 투타의 두 기둥이 마침내 '합체'한다.
#프로 입단 후 3년간 시련
이대호는 부산 수영초등학교 시절 야구를 시작했다. 야구부 입단을 위해 전학 온 추신수(SSG 랜더스)가 덩치 큰 같은 반 친구에게 "나랑 같이 야구하자"고 제안한 게 그 시작이다. 꼬마 이대호는 얼떨결에 야구부에 따라갔다가 그대로 눌러 앉았다. 그때는 누구도 짐작할 수 없었던 '역사적 만남'이 이뤄진 것이다. 그 후 이대호는 경남고 에이스, 추신수는 부산고 에이스로 활약하며 전국 고교야구를 주름잡았다.
추신수가 메이저리그(MLB) 도전을 위해 미국으로 떠난 뒤 이대호는 2001년 고향팀 롯데에 2차 1라운드(전체 4순위) 지명을 받고 입단했다. 처음엔 투수로 뽑혔지만 1년 만에 타자로 전향했다. 프로 첫 스프링캠프 때 '빨리 뭔가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에 무리하다 어깨를 다친 탓이다. 부상 여파로 직구 구속이 시속 140㎞ 밑으로 떨어졌고, 주특기였던 포크볼도 힘을 잃었다. 결국 투수를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처음엔 설움도 많이 겪었다. 일부 지도자들은 체중이 120㎏에 육박하던 거구의 내야수를 좋아하지 않았다. 늘 이대호에게 "살을 빼라"고 압박했다. 체중 감량을 위해 과도한 훈련을 하다 무릎에 문제가 생겨 수술을 받는 일까지 벌어졌다. 다행히 이대호는 유연성도, 회복력도 남다른 '천재형' 선수였다. 2004년 이대호가 홈런 20개를 때려내며 서서히 궤도에 오르자 체중을 둘러싼 걱정은 빠르게 잦아들었다. 메이저리그(MLB)에서 온 제리 로이스터 전 롯데 감독은 "저 정도 체격의 선수가 3루수를 맡는 건 MLB에서도 본 적이 없다. 운동능력이 대단하다"고 감탄했을 정도다.
#부산의 붙박이 4번 타자 탄생
미완의 대기는 2006년 꽃을 피웠다. 그해 이대호는 1984년의 이만수 이후 22년 만에 처음으로 타자 트리플 크라운(타율·타점·홈런 1위)을 달성했다. 투수 트리플 크라운(승리·평균자책점·탈삼진 1위)을 달성한 '괴물 신인' 류현진(당시 한화 이글스·현 토론토 블루제이스)이 없었다면 정규시즌 최우수선수(MVP)도 가능했던 성적이다. 이대호는 2007년에도 도루를 제외한 타격 전 부문 상위권에 오르면서 명실상부한 리그 최고 타자 중 한 명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이대호는 2008년 또 하나의 꿈도 이뤘다. 롯데가 8년 만에 포스트시즌에 진출해 데뷔 후 처음으로 가을야구를 경험하게 됐다. 온 부산이 하나가 돼 야구 열기로 들썩이던 시기다. 상대 팀 지도자들은 "이대호는 늘 우리 투수들에게 위압감을 주는 존재"라고 감탄했고, 롯데 타자들은 "이대호가 우리 타선에 있기에 늘 부담 없이 타석에 설 수 있었다"고 입을 모았다. 그해 그는 무명 시절부터 함께한 오랜 연인 신혜정 씨에게 프러포즈했고, 이듬해 웨딩마치를 울렸다.
#KBO리그 전무후무한 발자취
이대호는 2010년 선수 생활의 하이라이트를 맞았다. 도루를 제외한 타격 전 부문(타율·타점·홈런·득점·안타·출루율·장타율) 타이틀을 석권하면서 타격 7관왕을 달성했다. KBO리그 역사에 전무후무한 발자취다. 4년 전 MVP를 겨뤘던 류현진이 1점대 평균자책점을 남기며 최고의 시즌을 보냈지만, 이번만큼은 이대호에게 MVP 왕관을 내줘야 했다.
이대호는 또 그해 8월 4일 잠실 두산 베어스전부터 14일 광주 KIA 타이거즈전까지 9경기 연속 홈런을 쳐 이 부문 세계기록도 세웠다. 역사가 150년에 육박하는 MLB에서도 아직 나오지 않은 기록이다. 외신들도 이 기록에 주목할 만큼 전 세계 야구계에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롯데는 이 기록의 가치를 기리기 위해 이대호에게 순금 30냥으로 제작된 1㎏짜리 황금 배트를 선물했다.
이대호는 승부욕이 대단한 선수로도 유명했다. 2010년 두산과 준플레이오프 2차전이 그 백미였다. 1-1로 팽팽하게 맞선 연장 10회 초, 롯데는 먼저 1사 2루 득점 기회를 맞았다. 타순도 좋았다. 3번 조성환과 4번 이대호가 기다리고 있었다. 조성환은 이날 이미 안타 두 개를 때려내면서 좋은 타격감을 과시하던 참이고, 이대호는 발목 상태가 좋지 않아 앞선 네 번의 타석에서 무안타로 돌아선 뒤였다. 두산은 고심 끝에 조성환을 고의4구로 내보내 1루를 채우고 이대호와 승부하는 쪽을 택했다.
대기 타석에 있던 이대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앞 타자 고의4구'라는 생경한 풍경을 지켜봤다. 그리고 이어진 1사 1·2루에서 좌월 결승 3점 홈런을 날려버렸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도 '이대호는 이대호'라는 걸 보여줬다. 그는 경기 후 인터뷰에서 "아주 재미있는 상황이었다"며 여유 있게 웃어 보였다.
#일본을 점령하고 MLB까지 도전
이대호는 '한국 최고'에 만족하지 않았다. 자유계약선수(FA)가 된 2012년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해 오릭스 버펄로스, 소프트뱅크 호크스에서 4번 타자로 활약했다. 특히 소프트뱅크 시절이던 2015년엔 일본시리즈 MVP에 오르면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한국보다 한 수 위 리그인 일본에서 무척 성공적인 4년을 보냈다.
그럼에도 그는 소프트뱅크의 재계약 제안을 뿌리치고 2016년 시애틀 매리너스와 1년 400만 달러에 스플릿 계약(MLB 소속일 때와 마이너리그 소속일 때 연봉이 다른 계약)을 했다. MLB 진입도 보장받지 못한 채, 스프링캠프에 초청선수로 참가해 처음부터 다시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다. 그 결과 이대호는 MLB 타석에 서겠다는 굳건한 의지를 현실로 만들었다. 동시에 한·미·일 프로야구에서 모두 두 자릿수 홈런을 때려낸 유일한 타자가 됐다.
이대호는 국가대표로도 최고의 활약을 했다. 2006 도하 아시안게임, 2008 베이징 올림픽, 2009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 2013 WBC, 2015 프리미어12, 2017 WBC 등 굵직굵직한 국제대회에서 태극마크를 달고 중심타자 역할을 해냈다. 이대호의 국제대회 41경기에서 통산 성적은 타율 0.323(133타수 43안타), 홈런 7개, 41타점이다. 100타석 이상 출전한 선수 중 타점 1위, 홈런 2위, OPS(출루율+장타율) 1위다.
롯데는 2017년 KBO리그로 복귀한 이대호와 4년 총액 150억 원에 상징적인 FA 계약을 했다. 올해 김광현(SSG·4년 151억 원)이 경신하기 전까지, KBO리그 역대 최대 규모 계약으로 남아 있었던 금액이다. 그럼에도 이대호에게는 금전적인 손해를 감수하는 결단이기도 했다. 그는 2014년과 2015년 소프트뱅크에서 합계 12억 5000만 엔을 받았다. 롯데와 4년 계약 총액과 큰 차이가 없다. 심지어 이대호보다 한 단계 낮은 수준의 외국인 타자가 그해 소프트뱅크와 3년 15억 원에 사인하기도 했다. 이대호가 마음만 먹었다면, 한국 복귀 전 일본 프로야구를 경유하면서 더 많은 돈을 챙길 수도 있었을 터다.
실제로 일본의 몇몇 구단은 시애틀과 계약이 끝난 이대호에게 롯데보다 수십억 원 많은 금액을 제시하면서 러브콜을 보냈다는 후문이다. 그러나 이대호는 이 모든 제안을 뿌리치고 롯데 복귀를 선택했다. "일본과 미국에서 모두 뛰겠다는 꿈은 이제 다 이뤘다. 이제 고향으로 돌아와 팀 동료, 후배들과 함께 우승을 하는 게 마지막 소원"이라는 이유에서다.
#은퇴 투어에서 날린 만루홈런
그러나 그 희망은 이루지 못한 채 마지막이 왔다. 이대호는 롯데와 계약 종료를 앞둔 올 시즌 개막 전 "1년만 더 뛰고 은퇴하겠다"고 선언했다. KBO는 "그동안 국내 리그와 국제대회에서 활약했던 공로를 인정한다"며 이대호를 이승엽(2017년)에 이은 역대 두 번째 은퇴 투어 주자로 선정했다. 지난 7월 28일 서울 잠실구장(두산)에서 시작된 구장별 은퇴 투어는 광주 기아챔피언스필드-창원 NC파크-인천 SSG랜더스필드-서울 고척스카이돔-대구 삼성라이온즈파크-수원 케이티위즈파크-대전 한화생명이글스파크를 거쳐 지난 9월 22일 다시 잠실구장(LG)에서 끝났다.
이대호는 이 기간을 단순한 '작별 인사'로 여기지 않았다. 은퇴 투어 때마다 기념비적인 장면을 만들어내면서 여전히 강력한 '롯데 중심 타자'의 존재감을 뽐냈다. 창원 은퇴 투어 기간인 8월 24일 NC전에서 1-0으로 앞선 9회 초 2사 후 개인 3호 대타 솔로홈런을 터트려 승리에 쐐기를 박았다. 선수 생활 내내 주전으로 뛰었기에 그의 대타 홈런은 개인 통산 3호 기록이다.
이뿐 아니다. 인천 고별전이던 8월 28일 SSG전에선 1-2로 뒤진 9회 역전 결승 2점포를 쳤다. 고척 최종전이던 8월 31일 키움전에선 오른손 타자 최초로 통산 1400타점 고지를 밟았다. 9월 20일 한화 이글스와 대전 은퇴투어에선 9회 역전 결승 만루홈런을 폭발하는 드라마를 연출했다. 이대호의 통산 12번째 그랜드슬램이었다.
이대호는 은퇴를 앞둔 올 시즌에도 타율·홈런·타점 상위권을 유지하면서 웬만한 타자의 전성기 시즌보다 나은 성적을 올렸다. 은퇴 시즌에 100타점을 넘긴 타자는 이대호가 사상 최초다. "은퇴 전 꼭 한국시리즈 무대에 서보고 싶다"던 염원 하나만 빼면, 프로 선수로서 거의 모든 환희를 다 누리고 그라운드를 떠나는 셈이다.
이대호를 야구의 길로 이끌었던 추신수는 "대호는 어린 시절 많은 시련을 함께 겪은 친구다. 그때 이대호라는 라이벌이 없었다면, MLB 진출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라며 "그런 경쟁자가 있어 참 행복했다. 박수를 받고 떠나는 친구가 참 부럽고 대단하다"고 했다. 롯데 시절 이대호의 전성기를 함께했던 포수 강민호(삼성 라이온즈)도 "형에게 어릴 때 참 많은 걸 배우고 의지하면서 야구를 했다"며 "은퇴한다니까 아쉽기도 하지만, 정말 멋지게 박수 받으며 떠나는 것 같아서 후배로서 기쁘고 자랑스럽다"며 울먹였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