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습생에서 국내 최초 40홈런까지…“한화팬 소중함 깨달아”
5인의 레전드 중 한 명인 장종훈 전 코치는 레전드에 선정된 40인 중 10위에 이름을 올렸다. KBO리그 육성선수 신화의 주인공이자 살아있는 전설로 기억되는 그는 연습생으로 프로 생활을 시작한 이후 3년 연속 홈런왕, 프로야구 사상 첫 100타점-100득점, 골든글러브 5회 수상 등 화려한 기록들을 세웠다.
‘레전드 데이’ 행사를 앞두고 9월 28일 대전에서 장종훈 전 코치를 만났다. ‘장종훈 전 코치’를 편의상 ‘장종훈’으로 표기한다.
#KBO 레전드 40인 중 10위
KBO가 한국프로야구 출범 40주년을 맞아 전문가와 팬 투표로 선정한 ‘40인 레전드’에서 장종훈은 78.41점을 받아 10위에 올랐다. 10년 전 KBO가 출범 30주년을 맞아 ‘프로야구 30주년 레전드 올스타’ 10명을 뽑았을 때도 그는 1루수 부문 레전드로 이름을 올렸다. 장종훈은 “어느새 10년이 훌쩍 지나 40주년이 됐다”며 입을 열었다.
“레전드 40인 안에 뽑힌 것도 영광이지만 거기서 10위에 올랐다는 것도 대단하다. ‘내가 그 정도의 선수였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아마 연습생 출신이란 타이틀이 점수를 더 받은 게 아닌가 싶다. 기대도 안했는데 좋은 점수가 나와서 새삼 나의 지난 시간들을 돌아볼 수 있었다.”
장종훈을 수식하는 여러 가지 타이틀 중 ‘연습생 신화’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세광고등학교 출신인 그는 신인 드래프트에 지명 받지 못해 실의에 빠진 채 대학 진학 여부를 놓고 고민 중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세광고 이한구 감독이 빙그레(한화) 이글스 배성서 감독에게 장종훈을 적극 추천했고, 장종훈은 월급 40만 원의 연습생 신분으로 이글스 유니폼을 입게 된다.
“당시 이글스는 창단팀이라 다양한 지역에서 선수들이 모였다. 대부분 나이가 많았고, 프로 선수들이 대학 출신들로 이뤄진 시기라 고졸 출신인 선수가 드물었다. 더욱이 연습생으로 들어간 터라 선배들의 예쁨은 받았지만 실력으로 선배들을 이기는 게 불가능했다. 오죽했으면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까. 그래도 참고 버티다보니 이듬해 정식 선수로 등록했고, 그해에 1군 무대에 데뷔하는 겹경사를 누렸다.”
#‘홈런왕’의 명과 암
1987년 연봉이 600만 원으로 인상되면서 정식 선수로 2군 생활을 이어 간 장종훈은 1987년 4월, 유격수 이광길의 부상으로 출전 기회를 얻은 후 비로소 주전 자리를 꿰찬다.
1987년에 8홈런을 기록한 장종훈은 1988년 12홈런을, 1989년 18홈런을 치며 '거포 본색'을 드러냈다. 이후 28개(1990년)-35개(1992년)-41개(1993)의 홈런으로 3년 연속 홈런왕에 오르며 삼성 이만수를 잇는 홈런 타자로 절정의 인기를 구가했다. 장종훈의 41홈런은 투고타저 시기에 나온 기록이라 더 큰 주목을 받았다.
“스프링캠프 때마다 기자들이 올 시즌 목표를 묻는다. 홈런 개수를 묻는 질문에 단순히 내 등번호를 떠올려 35홈런을 치겠다고 말했고, 그 결과를 만들어냈다. 이듬 해 다시 홈런 개수 질문이 나왔다. 그때도 35홈런 보단 많아야 했고, 어떤 선수도 기록하지 못한 40홈런은 쳐야 된다는 생각에 40홈런을 언급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어리석은 생각이 아니었나 싶다. 그 말을 지키려고 몸 상태가 좋지 않은 상태에서 기록 도전에 나섰기 때문이다. 40홈런은 내게 영광을 안겨줬지만 반면에 부상과 수술이라는 큰 아픔을 주기도 했다.”
장종훈은 3년 연속 홈런왕을 차지한 것과 함께 3년 연속 몸에 맞는 공도 1위였다. 홈런을 치고 나면 다음 타석에 들어서는 게 두려웠다고 한다. 홈런 타자를 위협하는 공들과 상대해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어떤 감독님은 내가 타석 안으로 들어서면 더그아웃에서 이렇게 외치셨다. “장종훈 조심해! 하나, 날라 간다~”하고 말이다. 겉으론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지만, 속으론 얼마나 두려웠는지 모른다. 공에 맞을까봐 다리가 후들거렸을 정도다.”
#‘대주자’ 장종훈? 은퇴를 떠올리다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 40홈런의 시대를 연 장종훈도 부상과 수술로 절치부심하다 복귀해선 다시 홈런포를 쏘아 올렸다. 1999년 한화 이글스를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고, 2000년 28홈런 81타점을 기록한 이후 점차 하향 곡선을 그리다 김태균에게 1루수를 내준 다음 지명타자로 활약하게 된다. 2005년 시즌 개막 후 6경기에서 9타수 1안타 1홈런을 기록한 장종훈은 4월 20일 1군 등록이 말소돼 2군에 머물다 그해 6월 15일 은퇴를 발표했다.
“선수 생활 마지막의 모습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아쉬움이 컸다. 이글스 팬들이 품고 있는 장종훈이란 이미지가 있는데 그것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자존심도 많이 상했고, 그로 인해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은퇴 후 곧장 2군 코치로 자리를 옮겼지만 은퇴 상황은 지금도 아름답지 못한 장면으로 남아 있다.”
장종훈은 20년 선수 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으로 1군 데뷔전을 꼽았다.
“첫 타석에서 2루타를 치고 연장 10회 말에 밀어내기 볼넷으로 결승타점을 올렸다. 다음 날 버스 정류장 가판대를 보니까 ‘일간스포츠’ 1면에 내 얼굴이 딱 박혀 있는 게 아닌가. ‘19세 장종훈을 아십니까’라는 제목으로 말이다. 선수 시절 가장 빛나고 찬란했던 순간이었다.”
장종훈은 자신의 이름 앞에 붙는 ‘연습생 신화’라는 타이틀이 싫었다고 고백한다. 이유가 재미있다.
“대학에 진학해서 대학 졸업장을 갖고 싶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나를 ‘연습생 신화’로만 존재하길 바랐다. 내가 대학에 가면 그동안 날 좋아하고 열렬히 응원을 보냈던 고졸 출신들한테 바로 상처를 준다는 말이 귀에 들어왔다. 결국 선수 생활하는 동안 대학 졸업장에 관심을 두지 않기로 했고, 고졸 출신들의 우상으로 남는 걸 선택했다.”
#지도자의 길, 또 다른 숙제
2군 타격 코치로 시작한 지도자 생활도 부침이 많았다. 장종훈은 2군과 1군을 오르내리며 여러 감독들과의 만남과 이별을 반복했다. ‘국민감독’으로 불린 김인식부터 ‘야왕’ 한대화, ‘코끼리’ 김응용에 이어 ‘야신’ 김성근까지 ‘3金’과 차례대로 인연을 이어가다 김성근 체제가 시작되기 전 팀을 나오게 된다.
“김성근 감독님 부임 후 이글스 출신 코치들이 한두 명씩 그만두는 상황이었다. 2014년 12월 오키나와 마무리캠프가 시작됐는데 한화 유니폼이 자꾸 낯설게 느껴졌다. 많은 코치들이 나가고 새로운 코치들이 들어오는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를 고민했던 것 같다. 일단 벗어나고 싶었다. 28년을 ‘이글스맨’으로 살아왔지만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김성근 감독님이 수차례 만류하셔서 떠나는 게 쉽진 않았다.”
장종훈은 한화를 나오자마자 롯데 자이언츠 타격 코치로 자리를 옮겼다. 한화에서 만난 이종운 감독과의 인연이 롯데로 이어진 셈이다.
“2015년 1월 초 롯데에서 코칭스태프 첫 미팅이 있었다. 부산으로 내려가야 하는데 전날 밤부터 두려움이 엄습했다. 28년을 한 직장에 있다가 다른 곳에서 일한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마치 신인 선수가 데뷔하는 심정으로 사직구장을 찾은 것 같다.”
롯데 유니폼을 입은 장 수석 코치의 눈에 상대팀으로 만난 한화 이글스는 어떤 모습으로 비춰졌을까.
“착잡했다. 예상대로 편치만은 않았다. 그래도 이기고는 싶었다. 시즌 내내 경기 후 한화 성적을 확인했던 것 같다. 비록 한화를 떠나긴 했어도 좋은 모습을 보이길 바랐다. 함께 고생했던 선수들을 떠올리면 마음속으로 응원할 수밖에 없었다.”
장종훈은 3년 후 다시 한화로 복귀한다. 당시 두산 수석코치였던 한용덕이 신임 감독으로 선임되면서 이글스 레전드들이 헤쳐 모였다. 한 감독은 투수코치로 송진우를, 수석코치 겸 투수코치로 장종훈을 불러들였다.
하지만 그 기간이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2020년 6월 한화는 35년 구단 역사상 단일 시즌 최다 연패인 14연패를 기록했고, 6월 6일 장종훈 수석코치를 비롯해 정민태 투수코치, 김성래 정현석 타격코치, 박정진 불펜코치를 한꺼번에 1군에서 말소시켰다. 그리고 다음 날인 7일 한용덕 감독의 사퇴가 발표됐다.
“한용덕 감독의 사퇴 소식에 참담함을 금치 못했다. 코치들의 부족함으로 감독님한테 너무 많은 짐을 지웠다는 안타까움도 컸다. 그 해에 육성군 총괄을 맡긴 했지만 이글스와의 인연을 마무리하는 시간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프로 코치 생활도 마침표를 찍었다.”
장종훈은 이후 재능 기부 형식으로 모교인 세광고 야구부 인스트럭터를 맡아 선수들을 지도했고, 올 시즌에는 공군사관학교 지도자로 파견돼 일주일에 한 차례씩 일반 생도들을 만나고 있다.
“대학 야구에 관심이 많아서 지도자 자리를 알아보고 있는데 프로 코치 출신이 아마 야구에 진입하는 게 정말 어렵더라. 프로에서의 지도자 경력보다 아마에서의 지도 경력이 더 높은 점수를 받는 터라 어디에 이력서 제출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야구 열정이 가득한 젊은 선수들과 함께 같은 목표를 향해 울고 웃는, 그런 경험을 다시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장종훈은 9월 30일 ‘레전드 데이’ 행사를 통해 오랜만에 팬들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 설레어했다. 그러면서 “우리 한화 팬들은 정말 대단한 것 같다. 팀을 나와 보니 팬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새삼 절감했다”고 말한다. ‘레전드 데이’ 행사는 ‘홈런왕’ 장종훈의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시간들이었다.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