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 안전장치 마련하고 분당 가능성도 대비…실현 가능성 낮지만 ‘어젠다 주도’ 부수 효과
윤석열 대통령은 1월 2일 조선일보 신년 인터뷰에서 “선거제는 다양한 국민의 이해를 잘 대변할 수 있는 시스템이 돼야 하는데, 소선거구제는 전부 아니면 전무로 가다보니 선거가 치열해지고 진영이 양극화되고 갈등이 깊어졌다”며 “중대선거구제를 통해 대표성이 좀 더 강화되는 방안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지역 특성에 따라 2명 3명 4명을 선출하는 방법도 고려해볼 수 있다”고 밝혔다.
현행 국회의원 선거는 1개 지역구에서 1명의 의원만 선출하는 소선거구제다. 이러한 선거제도에서는 거대 양당 후보가 유리하고 다량의 사표가 발생해 유권자의 다양한 목소리를 반영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중대선거구제는 1개 지역구에서 득표순으로 2~3명이 당선될 수 있는 방식이다. 이 경우 제3정당의 당선 가능성이 높아져 양당체제는 흔들리게 된다. 또한 지역주의 완화에도 효과가 있을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선거제도 개혁 필요성은 정치권에서 끊임없이 제기됐다. 국회에서는 정치개혁특별위원회(정개특위)가 활동 중이고,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역시 2022년 대선과 전당대회 과정에서 승자 독식의 선거구조 개혁 등이 담긴 선거법 개정을 강조하기도 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갑작스레 중대선거구제로 개정 필요성을 띄우자 정가에선 그 의중에 대해 여러 갈래의 해석이 나온다. 선거제도 개혁에 목소리를 높였던 더불어민주당은 윤 대통령 인터뷰 이후 신중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재명 대표는 1월 4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 후 진행된 질의응답에서 ‘윤 대통령 중대선거구제 개편 발언’과 관련해 “지금은 당내 의견 수렴 과정이라 개인적 의견이라도 쉽게 말하는 건 적절치 않을 것 같다”고 말을 아꼈다.
‘신중론으로 돌아선 것이냐’는 지적에 대해서는 “입장이 바뀌었다는 건 잘 모르겠다. 다당, 제3의 선택이 가능한 정치시스템이 바람직하다는 말씀드렸고, 그 방식이 중대선거구제여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며 “나는 비례대표를 강화하는 게 맞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전에 우리가 정치개혁, 정치교체를 말할 때도 비례대표 강화로 말한 것으로 기억한다”고 덧붙였다.
우선 윤 대통령이 2024년 총선 이후 정국을 운영하는 데 있어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해 중대선거구제를 띄운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일부 언론 등에 따르면 윤 대통령은 주변에 “다음 총선은 어차피 내가 치르는 것 아니냐”라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총선 승패에 윤석열 정부 국정동력이 달려있는 만큼 본인이 주도적 역할을 하겠다는 의견을 피력한 셈이다. 하지만 이는 국민의힘이 선거에서 질 경우 윤 대통령이 직격탄을 맞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국민의힘 한 관계자는 “중대선거구제의 경우 구조상 한 정당의 압도적 승리도 없지만, 압도적 패배도 나오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국민의힘이 차기 총선에서 민주당에 패한다고 해도 윤석열 대통령의 ‘책임론’이 한결 옅어질 수 있다. 중대선거구제가 일종의 안전장치 역할”이라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중대선거구제를 통해 제3정당·제4정당이 국회에 입성해 다당제가 되면 국민의힘이 과반을 차지하지 못해도, 정책 이슈별로 연대를 구축할 수 있어 윤 대통령 입장에서 국정을 운영하는데 한결 편한 장점이 있다”고 덧붙였다.
국민의힘 분당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아니냐는 얘기도 있다. “차기 당대표 선거 과정서도 보듯 지금은 윤심의 방향대로 당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다. 하지만 총선 공천이 걸리면 상황은 전혀 달라진다. 현재 정치권 안팎에서는 윤 대통령이 차기 총선에서 국민의힘에 유리한 지역구에 검찰 사단을 공천해 국회에 입성시키려 한다는 말이 계속 나온다. 그럼 윤 대통령에 충성했던 기존 지역구 의원들이 집단으로 반발할 것이고 당이 쪼개질 가능성도 있다. 그런 상황에서도 보수 진영 후보들이 많이 당선되려면 중대선거구제가 유리하다는 판단을 한 것 같다.” 한 여권 관계자의 말이다.
윤 대통령이 언급한 중대선거구제로 개편이 실제 이뤄질지에 대해서는 부정적 시선이 많다. 야권의 한 전략통은 “윤 대통령은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지역 특성에 따라’라고 말한다. 지역별로 다르게 선거제도가 적용될 수도 있다는 것”이라며 “과거 국민의힘 계열 정당에서 중대선거구제 도입을 염두에 두고 시뮬레이션을 돌려봤다. 하지만 추진하지 않은 이유는 보수 정당이 호남 등에서 가져올 수 있는 의석수보다, 영남 지역에서 진보 정당에 내줄 의석수가 더 많아 손해라는 판단에서다. 지금 윤 대통령이 말한 기준으로 하면 TK(대구·경북)와 PK(부산·울산·경남)는 2등 3등 당선 의석수를 줄여 국민의힘이 싹쓸이하고, 수도권에서는 당선 의석수를 늘려 국민의힘이 추가로 당선되게 할 수 있다. 이런 불합리할 가능성이 있는 제도를 민주당이 받겠느냐”고 반문했다.
실제 민주당 박홍근 원내대표는 1월 4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인터뷰에서 윤 대통령의 중대선거구제 개편에 대해 “여당과 사전에 협의된 게 아니고 즉흥적인 제안인 것으로 알고 있다. 선거제도는 대통령이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고 결국 선거제도마다 장단점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수도권 등 일부 지역의 ‘부분적 중대선거구제’에 대해선 “철저하게 계산된 이야기인데, 선거제도를 정치적 유불리로 접근해서야 되겠느냐”며 “셈법에 따라서 자신들에 유리한 방향으로만 선거제도를 설계하겠다고 하면 국민적 호응을 끌어내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꼬집었다.
물리적으로도 선거제도 개편이 실현되기 어렵다는 견해가 주를 이룬다. 2024년 4월 치러지는 총선에 대한 선거법 개정 시한은 1년 전인 오는 4월 10일까지다. 김진표 국회의장은 1월 2일 국회 시무식을 마친 뒤 “오는 3월 중순까지는 내년 시행할 총선 제도를 확정할 계획”이라며 “정개특위에서 늦어도 2월 중순까지 선거법 개정안을 복수로 제안하고 그것을 본회의를 통해 300명 의원 전원이 참석하는 전원위원회에 회부할 것”이라고 시한을 제시했다.
선거제도 개편은 국회의원 이해관계가 가장 첨예하게 부딪히는 문제다. 그러다 보니 정개특위에 중대선거구제 도입 내용이 담긴 개정안이 2건 상정돼 있지만, 시한 내 합의가 이뤄지기는 사실상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 많다.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1월 3일 KBS라디오 ‘최경영의 최강시사’ 인터뷰에서 “내년에 당장 총선인데 지금 국회에서 중대선거구제를 한다고 과연 실현되겠느냐”며 “거의 불가능하다”고 전했다. 이어 “지금 현역 의원들이 선거구가 줄어드는 것에 결사반대하기 때문에 성공하기는 굉장히 힘들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럼에도 윤 대통령이 중대선거구제 개편을 띄운 것이 손해는 아니라는 분석이다. 앞서 야권 관계자는 “개헌이나 선거제도 개편 등 개혁 이슈는 어젠다(의제)를 끌어가기 좋다. 이를 통해 정국 주도권을 잡고 국정수행 지지율을 끌어올리는 효과를 볼 수 있다”며 “중대선거구제 개편이 실패해도 정부여당에서는 ‘선거제도 개혁하려 했는데, 민주당이 반대해 못했다. 민주당 탓이다’ 프레임을 짜기도 좋다. 윤 대통령 입장에서는 여러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했다.
박지원 전 국정원장은 1월 2일 자신의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중대선거구제 개편은 민주당에서도 상당 수준 검토됐던 사안”이라며 “민주당은 어젠다를 선점하고도 공론화를 윤 대통령에게 또 빼앗겼다”고 꼬집었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