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무 한도만 늘리고 ‘적자 원인 그대로’ 미봉책 불과…전력시장 독점 구조 개편 목소리도
#적자 누적되지만 해결책 신통치 않아
한전법이 2022년 12월 28일 국회를 통과했다. 한전 자본금과 적립금을 합한 금액의 2배 이내로 제한한 한전의 회사채 발행한도를 최대 6배까지 늘리는 내용이 골자다. 2022년 11월 기준 한전의 회사채 발행 누적액은 발행 한도인 91조 8000억 원의 72% 수준인 약 67조 원에 달했다. 그런데 2022년 한전의 대규모 적자로 자본금이 줄어들면서 올해 한전채 발행 한도가 30조 원까지 떨어질 위기에 처해 급히 발행 한도를 늘려 채무불이행 사태를 막은 것이다. 개정안 통과 여부에 한전이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한전법 개정안 통과는 미봉책 수준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적자 원인은 근본적으로 해소하지 못하면서 상환 능력에 비해 갚아야 할 빚의 한도만 늘린 셈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한전의 적자 규모는 약 30조 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따라 올해 자본금과 적립금 합은 전년(45조 9000억 원)의 3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들게 되나, 한전법 통과로 한전채 발행 한도는 최대 95조 원에 달할 전망이다. 이와 관련, 한전 관계자는 “채무를 단번에 상환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고, 자구 노력과 전기요금 인상을 통해 2026년까지 단계적으로 상환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한전의 적자가 해소되지 않는 이유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에너지 가격이 오르면서 늘어난 전력생산 비용을 한전이 온전히 감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적자 누적의 주된 원인으로는 원가 이하로 책정된 전기요금이 꼽힌다. 한전이 발전사에서 사오는 전력도매가격(SMP)는 크게 올랐지만 다시 기업과 가정에 되파는 소매가격(전기요금)은 소폭 오르는 것에 그친 탓이다. 문제는 대외 악재가 계속되고 있어 전기를 팔수록 적자가 누적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정부가 2022년 12월 1일부터 전력도매가격(SMP) 상한제를 시행해 한전의 부담을 줄여주고 있지만 반발이 적지 않은 상황이다. 민간 발전사들은 사기업이 손해를 감수하며 고통 분담을 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민간발전협회 한 관계자는 “우선 12월 수익 감소분을 파악하기 위해 회원사에 자료를 요청해 둔 상태고 손해가 난 회사가 있는지도 파악해 대응수위를 결정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전국태양광발전협회 한 관계자 또한 “1월 안에 행정소송과 헌법소원, 집행금지 가처분 신청을 동시에 진행해 대응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당장 전기요금을 큰 폭으로 올리기도 어렵다. 이미 2023년 1월부터 전기요금이 킬로와트시(kWh)당 13.1원 올랐다. 9.5% 인상된 금액으로 1970년대 말 2차 오일쇼크 이후 최대 인상폭이다. 산업통상자원부가 국회에 제출한 한전 영업 흑자 전환을 위한 전기요금 인상 적정액인 kWh당 51.6원에는 크게 못 미치지만 4인 가구 기준 월 4000원 이상 전기요금이 오르는 탓에 추가로 인상을 결정하기 부담스러운 상황이다.
한전은 올해도 10조 원가량의 적자를 낼 것으로 예상된다. 최근 국내 대형 증권사 세 곳을 매각 주관사로 선정하며 한국전력기술의 지분 매각을 통한 자금 확보에 나섰으나 매각 시점을 두고 뒷말이 나온다. 처음 한전이 자구책을 발표한 2022년 5월에 비해 한전기술 주가가 20~30%가량 낮아진 탓이다. 저점에서 지분을 팔아넘길 경우 지난해처럼 부동산 헐값 매각 논란에 시달릴 수 있다.
#구조 자체를 바꿔야 한다는 지적도
대외 변수가 생길 때마다 가격이 요동치는 화석연료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상황도 위기를 가속화하는 요인으로 꼽힌다. 문주현 단국대 에너지공학과 교수는 “안정적이면서도 합리적인 가격 수준에서 전기가 제공되려면 지금처럼 과도하게 화석연료에 의존해선 안 되고 에너지 믹스를 과학적으로 짜야 한다”고 말했다. 한전법 개정안 통과에 공개적으로 반대한 양이원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채무를 늘릴 게 아니라 에너지 수입 의존도를 낮춰야 한다. 국산 에너지고 연료가 필요 없는 재생 에너지는 당연히 전기 요금 변동성이 크지 않은데 재생에너지 인프라를 확대해야 할 시점에 정책이 거꾸로 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윤석열 정부는 신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을 줄이고 있다. 정부가 2022년 9월 30일 발표한 제10차 전력기본계획 실무안에 따르면 2030년 신재생에너지 비중은 2021년 ‘2030년 국가온실가스 감축목표(NDC)’에서 제시된 30.2%보다 8.7%포인트 낮은 21.5%로 결정됐다. 이에 따라 올해부터는 한전에 상당한 비용 부담을 주던 신재생에너지공급의무화제도(RPS)에 따른 의무비율도 하향될 전망이다.
이로 인해 6만 원대 중반을 유지하던 REC(신재생에너지 공급인증서) 가격이 2022년 12월 29일 5만 원대로 내려가면서 재생에너지 발전 산업이 위축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앞서의 태양광발전협회 관계자는 “정부가 당장의 비용 축소에 급급할 게 아니라 더 거시적으로 봐야 하지 않나 싶은 아쉬움이 있다”고 말했다.
반복되는 한전의 위기를 두고 전력 판매 시장 자체를 개편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전기를 독점적으로 판매하는 까닭에 한전의 경영이 방만하다는 지적이다. 양이원영 의원은 “크고 작은 지역 발전원별로 다양하게 전기를 판매할 수 있게 만들어야 그만큼 효율적으로 전기요금을 책정하고 전력소비를 더 줄일 수 있다”며 “경쟁을 시키지 않으니까 효율적인 전기 공급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셈”이라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 박종운 동국대 에너지시스템공학과 교수 또한 “미국이나 일본, 독일, 영국에 비하면 우리나라 전기 가격은 반값도 안 되는 수준이기 때문에 1인당 전력소비량이 가장 높다”며 “전기 낭비를 줄이려면 정부가 손을 떼고 공기업도 민간기업과 경쟁해 가격을 현실화할 수 있도록 전력시장 구조를 개편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김정민 기자 hurrymi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