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월드컵 3차전 낭떠러지 서 있던 기분…죽기살기로 뛰는 것 말고 다른 생각할 수 없었다”
2002년 월드컵 이전 한국 축구는 월드컵 토너먼트 진출은 고사하고 단 한 번의 승리조차 거두지 못했다. 신화를 써내려간 2002년 대회 이전 여섯 번의 월드컵에서 대표팀은 '무승'이었다. 마지막 '무승' 월드컵의 주역인 이상헌 현 인천 남동구 유소년축구단 감독을 만나 그의 축구인생 이야기를 들어봤다.
한일 월드컵 직전 대회이자 이상헌 감독이 경험한 1998 프랑스 월드컵은 한국 축구에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다. 큰 기대를 받던 대표팀은 월드컵 본선 첫 두 경기(멕시코, 네덜란드 상대)에서 대패했다. 팀을 이끌던 차범근 감독은 대회 중 경질이라는 굴욕을 겪었다.
하지만 조기 탈락으로 귀국길에 오른 대표팀에 팬들은 박수를 보냈다. 조별리그 3차전 벨기에를 상대로 투혼을 발휘, 1-1 무승부를 거두며 여론이 반전된 것이다. 팀의 일원이던 이상헌 감독은 3차전에서만 그라운드를 밟았다. 그는 "2패를 안고 팀의 분위기가 바닥을 친 상황이었다. 죽기살기로 뛰는 것 말고는 다른 무언가를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낭떠러지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고 회상했다.
당시 벨기에전은 한국 축구의 '투혼'을 상징하는 경기로 회자된다. 몸을 내던지는 수비로 상대 공격을 막아냈다. 상대 발길에 머리를 갖다 대는 동작도 서슴지 않았다. 이상헌 감독과 함께 선발로 나선 수비수 이임생은 머리에 부상을 입어 출혈이 있었지만 붕대를 감고 뛰기도 했다. 고(故) 유상철의 동점골로 1-1 무승부를 기록했다.
"팀이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경기 전까지 부담감이 컸다. 막상 경기에 들어가서는 플레이에만 집중하려 했다. 벨기에도 붉은색 유니폼을 입는 팀이라 관중석이 온통 붉은색으로 뒤덮여 있었는데 '우리 응원단이다'라고 생각하며 몰입했다. 개인적으로는 어렵게 얻은 출전 기회였기에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최대한 열심히 뛰려 했다."
이상헌 감독의 첫 출전은 후반 11분께 마무리됐다. 상대 공격수를 막으려 태클을 하는 과정에서 다리에 경련이 일어났다. 들것에 실려 교체됐다. 그는 "경기에 몰입했지만 큰 무대고 강한 상대였다. 나도 사람인지라 긴장을 많이 했던 것 같다"며 웃었다. 이어 "지금 후배들의 경기를 항상 지켜보지만 때론 나의 선수 시절을 떠올리며 정말 우리 축구가 발전했다는 것을 새삼스레 느낀다. 월드컵 1승도 어렵던 나라가 이제는 16강, 그 이상을 기대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2패 끝에 기록한 무승부였지만 선수들의 투지 있는 모습에 팬들은 환호했다. 이는 다음 월드컵까지 4년을 준비할 수 있는 동력이 됐다. 한일 월드컵 개최가 확정된 상황에서 축구에 대한 관심도가 올라간 것도 대표팀에는 긍정적이었다. 예능 프로그램 등에서 대표팀을 집중조명한 것은 선수들이나 팬들에게 신선한 경험이었다.
"벨기에전이 끝나고 숙소에서 쉬고 있었는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방송국 카메라와 함께 이경규 씨와 신문선 해설위원님이 들어오셨다. 그때 내가 삭발머리를 해서 좀 튀기도 했고 열심히 하는 모습을 좋게 봐주셨던 것 같다. 이경규 씨가 '노지심'이라고 별명을 지어줬다."
예선부터 본선까지 좋은 모습을 보인 이상헌 감독에게 팬클럽이 생긴 것도 이때였다. 그는 "쑥스러운 이야기다"라며 "팬클럽 이름이 '터프가이'였다. 실제 팬들과 만나는 행사도 열었다. 지방에서 올라오신 분들도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설명했다.
대표팀에서 활약에 힘입어 해외 이적설이 돌기도 했다. 그는 "기사로 잉글랜드 블랙번에서 나를 원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며 "아주 구체적으로 이적 작업이 진행된 수준은 아니었다. 1998년에 프로에 입단한 신인이었기 때문에 이적이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월드컵 이전 이상헌 감독은 1996 애틀랜타 올림픽 대표로도 활약해 깊은 인상을 남겼다. 유소년 대표 시절부터 태극마크를 달았고 21세에 올림픽 대표팀에 합류, 두 살 많은 선배들과 올림픽 본선까지 치렀다. 당시 역대 최초 외국인 감독인 아나톨리 비쇼베츠 감독을 경험했다.
"해외에서 오신 감독님은 처음이라 생소했다. 예상보다 체력적인 부분을 무척 강조하셨다. 체력훈련을 많이 해서 힘들었던 기억이 많다. 올림픽 본선에서는 48년 만에 1승을 거뒀지만 8강 진출에는 실패해 아쉬웠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
올림픽 대표팀 활약 이후에는 A대표팀까지 승선했다. 그는 "피지컬적인 부분(신장 185cm)과 저돌적인 면 등을 차범근 감독님이 좋게 봐주신 것 같다"며 "스스로 돌아봤을 때 기대에 부응하지는 못한 것 같다. 훌륭한 선배들 사이에서 기회를 잡지 못했다"고 말했다.
각급 대표팀을 모두 거쳤고 월드컵 무대에 출전하며 승승장구했지만 그의 A매치 출전 기록은 17경기에서 멈췄다. 그는 "월드컵 다녀와서 K리그 일정을 소화하는데 두 경기 만에 팔이 골절됐다. 정도가 심각했다. 1년 정도 재활을 해야 했다. 그 이후 대표팀과 멀어졌다"고 설명했다.
이후 소속팀 활약에 집중했다. 안양 LG에서 6시즌, 인천 유나이티드에서 3시즌간 활약하며 K리그 114경기 6골 1도움의 기록을 남겼다. 대학생 시절 올림픽에 출전하고 A대표까지 뽑히며 기대를 받았던 것에 비하면 다소 아쉬운 기록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이유를 이야기하면 많을 것이다. 부상이 잦기도 했고 선후배들과 경쟁에 어려움을 느꼈다"며 "좋게 이야기해주시는 분들도 있지만 결국은 내가 부족한 탓이다. 패스 능력도 모자랐던 것 같다. 어린 시절 계속 대표팀을 오가며 약간은 자만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더 많은 노력을 했어야 했다"고 했다.
그의 프로 생활에 아쉬움만 남은 것은 아니다. 2000시즌에는 주전으로 활약하며 안양 LG의 K리그 우승을 도왔다. 인천 이적 이후에는 2005시즌 준우승에 힘을 보태기도 했다. 인천은 정규리그 통합 1위에 올랐으나 이어진 플레이오프를 뚫고 오른 챔피언결정전에서 울산에 패했다. 당시 인천의 스토리는 다큐멘터리 영화 '비상'으로 제작되기도 했다.
"베테랑이 된 시기였다. 많은 경기에 나서지는 못 했지만 팀에 도움이 되려 노력했다. 플레이오프에서는 부산을 상대로 골을 넣어 결승전까지 진출했다. 그런데 결승전 앞두고 발이 퉁퉁 부어서 병원에 갔더니 봉와직염 진단을 받았다. 그 결승전에 뛰지 못하고 팀 패배를 바라만 봐야 했던 것이 가슴 아팠다."
은퇴 후 지도자의 길을 걸었다. 용인축구센터 등 고교 무대에서 코치 생활을 하다 2020년부터 인천지역에서 유소년 감독을 맡았다. 그는 "감독이 되니까 정말 할 일이 많다. 아이들을 컨트롤해야 하고 경기, 훈련 일정도 준비해야 한다. 선수생활을 마치면 긴장감이 없을 줄 알았는데 시합이 가까워올수록 감독으로서 긴장감도 크다"고 설명했다.
유소년들을 지도하며 얻는 보람도 크다. 이상헌 감독은 "나는 비교적 늦은 시기인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축구를 시작했다. 그때의 나보다 어린 친구들을 지도하고 있다"며 "잘하고 있다는 칭찬을 많이 해준다. 현재보다는 결국 성인이 됐을 때 좋은 선수가 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나의 몫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인천에서 뛰던 시절 장외룡 감독님이 가르쳐 주신 것이 많이 떠오른다. 축구는 인내, 희생 같은 부분이 필요한 종목이다. 우리팀 아이들을 인성 부분까지 성장시키려 한다"고 덧붙였다.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