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네 아버지 어머니가 그러했듯 아버지는 잠자는 시간 말고는 정말 소처럼 일만 하셨다. 같은 시장통에서 만난 어머니와 단칸방에서 사과궤짝을 밥상으로 사용할 만큼 어렵게 사셨다. 그런 어려운 삶을 영위하면서도 4남매를 다 대학에 보낼 만큼 교육열도 대단하셨다. 당신들은 좋은 옷, 좋은 음식을 마음대로 입지도 드시지도 못하면서 자식들만큼은 어디 가서 기죽지 말라고 항상 배려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다.
이런 헌신적인 부모님 덕분에 우리 4남매는 모두 자기 몫을 하는 사회인으로 성장할 수가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감사함과 존경심은 모든 자식들의 공통점이겠지만 다만 조금 아쉬운 것은 아버지가 손자에 대한 열망(?)을 너무 드러내신다는 점이다.
누나와 여동생은 아들이 있는데 내가 딸이 셋, 내 남동생도 딸만 둘. 아버지 입장에선 외손자는 둘이나 있는데 친손자는 한 명도 없고 손녀만 다섯 명이니 대가 끊겼다는 생각을 하신다.
명절이 되고 제사를 지내게 될 때면 아버지는 음복을 하시곤 “내가 조상님들 뵐 면목이 없다. 손자를 못 봐서. 앞으로 조상님들에게 누가 제사를 지낼 것이며 앞으로 누가 우리 선산이든 조상 묘를 돌본단 말이냐”라며 한숨을 내쉬곤 하신다. 아버지는 당신의 고향 충청도 사람들은 예로부터 조상님의 은덕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고 강조하곤 하셨다.
평생 고생하며 자식·손자들에 대한 사랑을 아끼지 않으셨던 아버지가 몇 년 전부터 기억이 오락가락하는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내가 큰아들인 것은 아는데 가끔씩 내 이름을 부르지 못하신다.
어떤 날은 아버지가 “네 에미가 밥을 안 준다”고 하셔서 깜짝 놀라서 어머니에게 여쭈니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아니 조금 전에 청국장에다 열무김치 넣고 한 사발 쓱쓱 비벼드신 분은 누구냐”며 아버지를 다그치셨다.
그 상황을 바라본 우리 매제(정신과 전문의)가 아무래도 아버님 치매검사를 좀 해봐야겠다고 해서 검사를 받아봤다. 그 결과 약하긴 하나 초기치매증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늘의 도움인지 아니면 아버지가 그리도 믿고 계시는 조상님들의 은덕인지 아버지의 증상이 더 나빠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가끔씩 당신 며느리의 이름도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고 특히 손자·손녀들의 이름을 기억 못 하시는 일은 이젠 하나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명절 때마다 차례를 정성껏 지내고, 또 언제나처럼 음복을 하곤 술기운이 거나하게 올라오면 또 대가 끊겨서 앞으로는 조상님들에게 제사를 어떻게 지낼 것이냐며 아들, 며느리는 물론 손녀들이 있는 자리에서도 한탄을 하신다. 명절 분위기가 참으로 어색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얼마 전 본가에 아버지 어머니를 뵈러 갈 일이 있었다. 아버지는 그날따라 컨디션이 좋아보였고 어머니가 차려주신 음식도 맛나게 드셨다. 식사를 하던 중 아버지는 불현듯 큰아들인 나에게 물었다.
“얘 큰애야 네가 자식이 몇이지?”
난 아버지를 바라보며 태연하게 “아버지, 제가 아들만 셋입니다”라고 거짓말을 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기분 좋게 막걸리를 드시면서 “맞아, 맞아 네가 아들이 셋이지. 내가 아주 든든하다”며 너털웃음을 지으셨다. 물론 나는 아들이든 딸이든 그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으며 딸들도 제사를 지낼 수 있고 조상 묘를 돌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제 90세를 바라보는 아버지가 당신의 제사를 손자가 있어야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을 탓하지 않는다.
이번 설날에도 아버지의 정신이 당신이 셋의 손자를 가진 할아버지로 기억하시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버지가 이번 설날에 나에게 “네가 자식이 몇이지?”라고 물어보신다면 아버지에게 “아버지의 손자가 자그마치 셋이나 됩니다”라고 말씀드릴 준비가 돼 있다. 그러면 아버지는 함박웃음을 지으시며 맛나게 막걸리를 드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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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동연 영화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