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 건넨 ‘협력사업제안서’에 “인수 위해 1조 8000억 준비” 밝혀…“내부적으로 컨소시엄 구성 추진”
김 전 회장과 방용철 부회장 등 쌍방울그룹 인사들은 2018년 12월 29일 중국 단둥에서 김성혜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실장 등 북한 인사들을 만나 쌍방울이 북한에 지원할 수 있는 사업을 설명했다. 대북사업 우선권을 받아내기 위해서였다.
당시 작성된 '쌍방울그룹 북남협력사업제안서'에 지원사업으로 거론된 내용은 '협동농장 지원(단계적으로 300만~500만 달러)' '1000만 달러 상당 내의 인도적 지원' '태양광, 풍력 등 친환경에너지 사업' 등이었다. 제안서에는 쌍방울그룹의 대북사업 의지를 표명하는 소개 문구도 있었다. 가장 돋보이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쌍방울그룹은 북남사업에 대한 커다란 관심과 대규모 투자를 준비하고 있다. 이 일환으로 대우건설 인수를 위해 1조 8000억 원을 준비하고 있다."
쌍방울그룹의 대우건설 인수 준비는 얼핏 허황된 이야기로 들린다. 그야말로 새우가 고래를 삼키는 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쌍방울그룹 내부에서 진행된 일이었다고 한다.
당시 쌍방울그룹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인사는 "(쌍방울그룹 핵심 인사가) 김성태 전 회장에게 대우건설 인수를 쌍방울그룹 차원에서 진행할 수 있겠냐는 의향을 묻자, 김 전 회장은 호의적으로 반응하면서 적극적으로 진행하자고 이야기했다"며 "건설사업부문은 대북사업과 곧바로 연결되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1조 8000억 원에 달하는 자금 조달 방법에 관해선 "컨소시엄을 구성하는 것으로 계획하고 진행했고, 재무적투자자(FI) 투자를 1조 원 이상 받으려고 했다"고 설명했다.
2018년경 대우건설 최대주주였던 KDB산업은행은 지분 매각을 추진한 바 있다. 호반건설은 2018년 1월 진행된 매각 본입찰에 단독 참여,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 하지만 호반건설은 9일 만에 대우건설 인수를 포기했다. 입찰 과정에서 파악되지 않았던 해외사업 채무를 문제 삼았다.
대북사업을 추진 중이던 김성태 전 회장에게 대우건설은 매력적인 매물이었을 것이다. 2018년 2월 북한의 평창동계올림픽 참가, 2018년 4월 남북정상회담 등으로 남북관계에 훈풍이 불면서 건설업계에 남북경제협력 사업에 대한 기대감이 커졌다. 대우건설도 주목받았다. 대우건설은 과거 김우중 회장 시절 북한 남포공단 조성사업을 진행하고, 현대건설과 함께 북한 경수로를 건설하는 등 남북경협에 참여한 경험이 있었다.
대우건설은 남북경협 참여 의지를 공개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대우건설은 2018년 6월 남북경협에 대비해 북방사업지원팀을 신설했다. 2018년 10월 김형 대우건설 사장은 창립 45주년 비전을 발표하면서 "통일시대에 대비해 남북경협 사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 안정적인 매출과 수익을 창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쌍방울그룹 북남협력사업제안서'에는 기업 인수와 관련한 내용이 또 있다. "IT(정보통신)서비스 우수기업인 동양네트웍스 인수로 첨단 기능을 더했다"는 문구다. 그런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쌍방울그룹 관계사가 동양네트웍스(현 비케이탑스)를 인수한 적은 없다.
이와 관련해 앞서 언급한 쌍방울그룹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인사는 "동양네트웍스 실소유주였던 이인광(에스모 회장)과 김성태 전 회장은 친한 사이다. 동양네트웍스를 매각하려던 이인광이 김 전 회장에게 넘기는 것으로 구두합의를 했다. 그래서 제안서에 내용이 들어갔다"고 말했다. 이어 "결과적으론 인수를 안 했다"며 "동양네트웍스 쪽에 문제가 있었다"고 덧붙였다.
이인광 에스모 회장은 2018년 동양네트웍스 최대주주였던 메타헬스케어투자조합의 실질적인 소유주였다. 이 회장은 라임자산운용의 펀드 환매중단 사태 '몸통' 중 한 명으로 지목된 인물. 이 회장은 무자본 M&A(인수합병)로 코스닥 상장사를 인수한 뒤 주가조작으로 수익을 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이 회장은 현재 해외 도피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 전 회장의 이름은 라임 사태에서 이미 언급된 바 있다. 2019년 8월경 쌍방울그룹 비서실장 엄 아무개 씨는 김 전 회장을 통해 이종필 전 라임자산운용 부사장을 소개받았다. 엄 씨는 이 부사장에게 금융감독원 조사 무마를 약속하며 금품을 받은 혐의로 기소돼 징역 1년 6월과 추징금 5000만 원을 선고받았다.
'쌍방울그룹 북남협력사업제안서'는 대북사업 참여를 대가로 쌍방울그룹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혐의가 있는 이화영 전 경기도 평화부지사 재판에 증거로 제출됐다. 검찰은 제안서에 언급된 '협동농장 지원(단계적으로 300만~500만 달러)'이 2019년 1월과 4월 북한 측에 전달된 총 500만 달러와 관련된 내용이라고 보고 있다. 더 나아가 검찰은 경기도가 북한에 스마트팜 사업을 지원하려고 했으나 어려워지자 쌍방울그룹이 대신 나서 500만 달러를 보낸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이 시기 김 전 회장이 농업회사법인 '착한농산'을 설립한 이유는 아직 베일에 가려져 있다(관련기사 [단독] 대북사업용 법인? 쌍방울 대북송금 직전 설립 농업회사 '착한농산' 정체).
'쌍방울그룹 북남협력사업제안서'는 2019년 1월 17일 중국 선양에서 쌍방울그룹과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가 체결한 1차 경제협력 협약 내용 기초가 됐다. 1차 협약 당시 쌍방울그룹 측은 북한 측에 "경기도와 쌍방울이 컨소시엄을 형성해서 대북사업을 진행하기 때문에 금액 투자뿐만 아니라 글로벌 펀딩이 가능하다" "경기도로부터 남북협력기금을 지원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고 한다.
이 전 부지사 측은 재판에서 "남북협력기금은 공적자금이라 사기업의 이권 사업에 쓸 수 없다"고 반박했다. 증인으로 출석한 쌍방울그룹 전 최고재무책임자(CFO)는 남북협력기금 지원과 관련해 "경기도에 직접 문의한 적은 없다"면서도 "김성태 전 회장 또는 방용철 부회장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오너(김 전 회장) 지시가 있었기 때문에 그런 내용을 포함시켰다"고 진술했다.
남경식 기자 ngs@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