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만 명 동시 투약 가능한 50kg, 역대 3번째 규모…수출용 담배에 손댄 상습범이 마약 총책 둔갑
1월 10일 검찰 수사관들이 대구시 수성구 소재의 한 빌라를 덮쳤다. 이날 작전의 목적은 수출용 담배 밀수조직 총책 A 씨(63) 검거였으며 해당 빌라는 A 씨 내연녀 명의였다. A 씨는 무려 13만 2300보루, 돈으로 환산하면 51억 원 상당의 수출용 담배를 밀수한 혐의를 받고 있다. 어렵게 A 씨의 내연녀를 파악하고 내연녀 명의의 빌라까지 파악한 검찰이 기습 작전에 돌입한 상황.
A 씨가 총책인 밀수조직은 수출용 담배를 해외에 수출한다고 배에 선적한 뒤 공해로 나갔다가 몰래 국내로 돌아와 시중에 파는 수법을 활용해 왔다. 2021년 2월 담배 4만 1300보루(시가 14억 5000만 원 상당)의 수출을 신고한 뒤 중국 칭다오 인근 공해까지 갔다가 부산항으로 몰래 돌아와 시중에 판매한 혐의와 2021년 담배 9만 5000보루(시가 36억 5000만원 상당)를 수출한다며 배에 선적해 출항한 뒤 서해 공해에서 다른 어선에 5만 3900보루를 옮겨 실어 전남 목포항으로 보내고 나머지 담배는 몰래 부산항을 통해 국내로 들여와 시중에 판매한 혐의 등을 받고 있다.
그렇지만 이날 작전은 절반만 성공하는 분위기였다. 우선 총책 A 씨를 현장에서 검거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빌라에는 A 씨 혼자 있었다. 그렇지만 수출용 담배 밀수 관련 증거는 거의 찾아내지 못했다. 집에는 별다른 가재도구 없이 텅 비어 있었다. 거주가 아닌 밀수 담배를 보관하고 처리하는 용도로 활용한 빌라로 보였지만 관련 증거가 보이지 않았다. 이미 밀수한 담배를 다른 곳으로 빼돌린 상황에서 뒤늦게 덮친 것일까.
검찰 수사관들이 유일하게 접근하지 못한 곳은 잠겨 있는 안방이었는데 A 씨는 안방 문에 고장난 것이라고 설명했다. 집 안의 다른 곳이 모두 텅텅 비어있는 상황이라 안방 역시 비어 있을 수도 있다. 단지 안방 문은 고장난 것일까.
안방 문을 강제로 열자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플라스틱 재질의 ‘팔레트’ 7개였다. 벽에 기대 있거나 바닥에 놓여 있는 상태였다. 팔레트는 선박 화물 수송 때 바닥 완충 등의 용도로 활용하는 화물 운반대다. 팔레트만 남아 있다는 얘기는 팔레트 위에 있었던 화물은 이미 어디론가 갔다는 의미다. 그 화물이 밀수한 수출용 담배라면 너무 늦은 기습이었을 수 있다. 그런데 그 옆에서 주먹 크기 정도의 비닐봉지 100여 개가 검찰 수사관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비닐봉지에 하얀 가루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다. 검찰 수사관들이 팔레트를 자세히 살펴보니 팔레트 밑바닥 홈에 비닐봉지가 숨겨져 있었다. 팔레트 밑바닥 홈에 비닐봉지를 숨긴 뒤 본드를 사용해 고무패드로 막아 놓은 상태였다. 이날 A 씨는 빌라에서 홀로 팔레트에 감춰 놓은 비닐봉지를 꺼내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비닐봉지에 들어 있는 하얀 가루는 바로 필로폰, 수출용 담배 밀수 사건이 마약 밀수 사건으로 급변하는 순간이었다.
이날 검찰이 압수한 필로폰이 든 비닐봉지는 무려 397개로 무려 약 50kg(시가 1657억여 원)나 된다. 165만 명이 동시에 투약할 수 있는 양으로 국내에서 적발된 필로폰 밀수량 가운데 역대 세 번째인 어마어마한 양이다. 수출용 담배 밀수조직 총책을 검거하러 간 검찰이 대신 역대급 마약 밀수조직 총책을 검거한 셈이다.
이렇게 A 씨를 검거하고 필로폰 약 50kg을 확보한 부산지검 강력범죄수사부 마약범죄 특별수사팀(부장검사 박성민)의 대대적인 수사가 시작됐다. 이후 부산지검은 A 씨가 또 다른 남성 2명 B 씨(56)와 C 씨(61) 등과 함께 팔레트를 승강기에 싣고 해당 빌라로 들어가는 모습이 담긴 CCTV 영상을 확보했다. 이들은 2022년 12월 중순 태국에서 팔레트 7개에 필로폰을 은닉해 대한민국으로 발송한 뒤 12월 27일 부산 용당세관에 도착하게 하는 방식으로 필로폰을 밀수했다.
검찰은 A 씨 휴대전화 디지털포렌식, 통화내역 조회, 용당세관과 A 씨 동거녀 빌라 CCTV 분석 등을 통해 공범 2명을 확인한 검찰은 2월 3일 이들을 체포해 구속했다. 다행히 A 씨 조직이 태국에서 밀수한 필로폰은 국내로 유통되지 못했다. 검찰 측은 “국내 유통 전 단계에서 선제적인 수사로 마약 확산을 차단하고 국내 밀수 조직원을 신속하게 검거해 관련 유통 등의 범행을 방지했다”고 밝혔다.
여러모로 이례적인 사건이다. 우선 팔레트를 활용한 마약 밀수 적발은 이번이 처음으로 세관검사에서 팔레트까지는 잘 확인하지 않는다는 점을 노린 것으로 보인다. A 씨 일당이 수입한 품목은 쓰레기통인데 쓰레기통은 세관 관심품목으로 지정돼 있어 통관 과정에서 철저한 검사를 받는다. 그런데 이들은 쓰레기통이 아닌 이를 운반하는 데 사용한 팔레트에 마약을 숨겨 세관검사를 무사히 통과했다.
이미 A 씨는 검찰이 수사 대상에 올려 두고 있던 상습 밀수범이다. A 씨는 관세법 위반 전력 2회로 누범기간 중에 다시 구속됐다. B 씨는 관세법 위반 전력 2회, C 씨도 관세법 위반 전력 1회다. 이들의 주요 밀수 품목은 수출용 담배로 금괴와 고추 등도 밀수입했다. 요즘 상습 밀수범들은 전문 분야 품목 위주로 밀수를 하는데 이들은 이례적으로 마약 밀수까지 손을 뻗었다가 마약사범으로 검거됐다. 그러다 보니 애초 검찰 수사도 A 씨 조직의 전문 분야인 수출용 담배 밀수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었다. 이런 이례적인 상황으로 인해 수출용 담배 밀수범을 검거하러 간 검찰 수사관들이 역대 세 번째 규모의 필로폰 밀수조직을 검거하게 됐다.
부산지검 강력범죄수사부 마약범죄 특별수사팀은 “관련자 휴대폰 포렌식 결과 등 태국 필로폰 공급 관련 범죄정보를 태국 마약수사청과 공유하고, 태국 내 필로폰 제조․공급 범죄에 대하여 태국 수사당국과 공조수사를 진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전동선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