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내장이요? 왜요?”
갑자기 망치로 얻어맞은 기분에 반사적으로 물으면서도 내가 한심하다. 왜라니, 병이 찾아올 만해서 찾아왔다는데 왜라니. 감히 ‘실명할 수도 있는 병 아닌가요?’라고는 묻지 못했다. 당황한 나는 그저 가만히 있었고, 경험이 많은 의사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간다. 녹내장은 주로 안압 때문에 생기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이렇게 안압이 낮아도 녹내장이 찾아오는 경우가 많단다. 그렇다면 안압을 낮추는 치료도 무의미하다는 뜻 아닌가.
얼마나 절망스러웠는지 모른다. 삶은 순식간에 마법이 일어난 것처럼 달라진다. 내가 좋아하는 학생들과 학교, 친구들은 그대로인데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는 그 익숙한 풍경들이 모두 낯설어지고 내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나는 두려움인 줄도 모른 채 두려움에 휩싸여 며칠을 보냈다. 그러고 나서 정신을 차리니 그것은 염라대왕이 보낸 안부편지였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 중에 사진작가 김아타가 있다. 그의 작품 중에 파르테논 신전 형상을 얼음으로 조각해서 그것이 어떻게 녹아 사라지는지를 촬영한 비디오 작품이 있다. 얼음이니 당연히 녹을 텐데 얼음은 같은 속도로 평등하게 녹아내리지 않는다. 건물의 가장 약한 부분이 먼저 녹아내리며 신전의 형태가 붕괴되고, 무너져 내린 그것까지 천천히 소멸해가는 것이다. 내게 녹내장이 바로 무상한 세월, 소멸의 사인(Sign)이었던 것이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세상, 세상사 뜬구름과 같구나. 이 몸이 죽어죽어 무덤으로 들어가니 객들은 다 흩어졌네. 아, 산은 적적하고 황혼엔 달이 깃드는데….”
고대 중국에 맹산군이라는 부자가 있었다. 잘 먹고 잘 베풀며 사는 그의 집에는 늘 식객이 들끓었다. 세상으로부터 존경을 받고 사는 그가 환갑잔치를 벌이니 온 집안이 손님과 음식과 술로 넘쳐흘렀다. 잘 살아왔다는 자부심에 충만해 있었던 맹산군은 술이 살짝 오르자 객을 향해 들뜬 한마디를 던졌다. 기쁘고 기쁜 이날 누가 나를 슬프게 할 수 있겠는가? 그때 눈먼 봉사가 걸어 나와 해금을 켜며 부른 노래가 저 노래다.
“산은 적적하고, 황혼에 달이 깃드는데, (사람은 간 곳이 없고) 두견새 울음소리만 또렷하구나.”
마지막 노랫가락과 함께 해금 줄이 탁, 끊기자 맹산군은 통곡을 했단다. 그가 왜 통곡했는지 알 것 같지 않은지. 예술혼에 이끌려 기쁨을 받치고 있는 슬픔을 만난 것이다. 슬픔이 훅, 올라와 그의 기쁨을 정화하며 황혼의 생, 들뜨지 않고 살 수 있도록 그를 인도한 것은 아니겠는지.
잘나갈수록 외면하고 싶은 진실이 있다. 노래가 끝나고 줄이 끊기는 것. 그러나 시작은 언제나 끝을 향해 달려가고 만남은 이별을 예약하고 있는 법이다. 끝이 불쾌하고 이별이 두려워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자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겁쟁이일 뿐. 누가 외로운 자의 삶의 투정을 받아줄 것인가.
생을 믿는 자는 인연이 다했을 때 인생아, 고마웠다며 인사하며 돌아설 줄 안다. 오랫동안 눈을 사용했다. 아마 나도 모르는 사이에 혹사했던 것 같다. 어떻게든 치유해보겠다는 의지는 병을 친구처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눈에 대한 집착이다. 어둠이 내리면 어둠에 익숙한 채로 가만히 눈을 감고 있으면 병도 잊어버린 채 눈의 감각을 관조한다.
나는 병을 통해 배우리라 생각지도 못한 것들을 배웠다. 집착, 두려움, 그리고 고립감이었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나니 평화가 찾아왔다. 마하리쉬의 말이 생각난다. 몸 자체가 병인데 병에 병이 들었다고 호들갑 떨 일이 있겠냐는 말. 그대, 평화롭기를.
※외부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