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판사 출신 변호사 한 분이 하소연했다.
“작년에 법정에 갔더니 간단한 사건인데도 다음 해 4월로 재판기일을 잡는 거야. 기가 막혔어. 그건 재판을 안 하겠다는 거잖아? 그 사이에 판사들 인사이동이 있으니까 그 다음에 온 판사 앞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셈이잖아? 내가 재판장을 할 때는 그렇게는 하지 않았어요.”
지방 도시에서 일하는 변호사를 만난 적이 있다. 그 지역 법원에 골치 아픈 판사가 있는데 소송을 제기한 지 1년이 돼도 재판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격무에 시달려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그러면 예전에는 어땠을까. 판사실은 밤에도 불이 밝혀져 있었다. 사건기록을 가지고 집에 가서 밤을 새워 판결문을 쓰는 판사도 많았다. 판사마다 경쟁하듯 사건을 빨리 처리했다. 사건이 누적되면 법원장의 지적이 있었다. 그런 배경에는 승진 경쟁이 작동하고 있었다.
판사들은 평생 경쟁에 이골이 난 사람들이었다. 지고는 못사는 사람이다. 승리를 위해 경주마같이 트랙을 달리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 트랙이 없어졌다. 승진이라는 목표가 없어진 것이다. 유능하거나 무능하거나 나이 65세까지는 신분이 보장된다. 사건을 빨리 처리하거나 느리게 하거나 뭐라고 할 사람도 없어졌다. 윗사람도 근무평정도 없다. 오히려 일반판사들이 법원장을 선택한다. 판사투표를 통한 법원장 추천제도다.
그렇게 평등한 사회에서 간섭받지 않는 사회에서 누가 열심히 일을 하고 싶을까. 그 결과가 오늘의 법원 풍토인지도 모른다. 판사는 법과 양심에 따라 재판을 하게 되어 있다. 그게 사법권의 독립이다. 그런데 이상한 게 있다. 법은 재판을 다섯 달 안에 선고하도록 훈시하고 있다. 그 법을 지키지 않는 판사가 많다. 훈시규정은 무시해도 되는 것일까. 법관의 양심도 그게 어떤 건지 의문이다.
대장동 사건에서 이른바 '50억 클럽'에 속하는 국회의원이 아들을 통해 뇌물을 받았다고 기소됐다. 담당 판사는 결혼한 아들이 받았으니 뇌물이 아니라고 했다. 법의 밥을 40년가량 먹었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다. 법관의 양심은 상식을 벗어나도 되나 보다. 불법 절차라도 목적이 정당하면 괜찮다는 판결도 나왔다. 앞으로 고문을 하더라도 범죄수사라는 정당한 목적이면 괜찮은 건가. 선거법 위반으로 걸린 국회의원도 판사 마음먹은 대로 그 직을 박탈할 수도 살릴 수도 있다.
더 심한 판결문도 있었다. 유전자 검사 결과 99.9999% 아들이라는 판정이 난 사건이 있다. 담당 판사는 ‘아들로 볼 수 없다’라고 한 판결을 선고했다. 과학도 뭉갠 판사의 양심이었다. 뭐든지 마음대로 해도 되는 게 법관의 양심일까. 사람을 죽인 오판도 책임지는 판사를 보지 못했다. 이래도 되는 것일까. 사법부는 이 사회에서 배출되는 쓰레기들을 분류해서 처리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 쓰레기들의 분류를 잘못하면 똥이 다시 사회로 복귀한다. 법원이 게으름을 피우면 사회 전체에 오물이 쌓이고 악취가 퍼진다.
요즈음 사법부는 작동을 멈춘 기계 같다. 사법시험의 면접관을 몇 년 한 적이 있다. 판사 지망자들에게 왜 법관이 되려고 하느냐고 물었다. 그들의 가치관과 철학을 알고 싶어서였다. 그들은 한결같이 약자를 위하고 정의를 실현하겠다고 했다. 판사는 단순한 관직이 아니라 국가가 부여하는 거룩한 소명을 수행해야 할 성직자 같은 의무가 있다고도 대답했다. 사람을 앞에 놓고 징역형을 선고하는 행위는 사회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고 말한 사람도 있었다.
모두 기가 막히게 명답을 말했다. 그러나 현실의 사법부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판사가 그냥 법원 공무원 같아 보이기도 한다. 판결문들에서 판사의 인격과 혼이 보이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철학이 있고 건전한 가치관이 들어간 판결문이 작품으로 대접받는 풍토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명품과 짝퉁을 걸러내는 시스템이 만들어져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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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