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울며 겨자 먹기 선행학습…국가가 나서 공교육 불신 없애야
저출산 원인으로 사교육 이야기를 뺄 수 없습니다. 요즈음은 아이를 둘 낳고 싶어도 돈이 없어서 못 키운다는 말을 합니다. 경제가 힘들어지고 평균수명이 길어져 노후 준비하기도 힘든 마당에 세계 최고 수준인 양육비가 부모를 힘들게 합니다. 그중에 상당수는 사교육비입니다. 아이들이 놀아야 할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아니 1~3세 아기 때부터 어지간한 부모는 남들이 하는 아이 선행학습을 다 따라하다가 주머니가 탈탈 털립니다. 저렇게 많은 돈을 써도 될지 보는 사람이 걱정될 정도입니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영어‧한글‧수학 등 선행학습으로 아이도 부모도 모두 힘든 것이 현실입니다. 사교육은 대학 입학 때까지 이어지고 점점 더 많은 비용이 들어 갑니다. 이런 선행학습을 처음부터 하지 않을 수 있다면 사교육의 악순환도 줄일 수 있고, 사교육비를 줄이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그럼 선행학습 안 시키면 될 거 아니냐고요? 제 말이 그 말입니다. 그런데 이게 부모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선행학습을 시키지 않으려면 초등학교에서 선생님들이 선행학습을 하지 않은 아이들을 기준으로 가르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부모들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선행학습을 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초등학교 입학 전에 한글 가르치지 마세요"라고 말하면 부모들은 "한글은 당연히 입학 전에 미리 배웠다는 걸 전제로 진도를 확확 나간다"고 하소연합니다. "입학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받아쓰기 시험을 하는 바람에 아이가 기죽어 당황했다", "한글을 미리 공부하지 않은 아이들은 산수 문제를 풀 수 없는 경우가 있어서 황당했다"는 부모도 있습니다. 그래서 절대로 한글을 미리 가르치지 않겠다던 부모들조차 입학이 다가오면 내 아이가 불이익을 받을까봐 어쩔 수 없이 부랴부랴 가르치기도 합니다. 영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가 기죽을까봐 선행학습을 합니다.
저출산 대책으로 사교육을 줄이려면 공교육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을 없애야 합니다. 지금부터라도 초등학교 입학 전에 한글을 하나도 배우지 않고 입학해도 한글 교육은 무조건 공교육에서 완벽하게 책임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합니다. 아무리 많은 아이가 한글을 미리 배우고 입학했어도 한글을 전혀 모르는 아이들 기준으로 기초부터 제대로 가르치고, 평가에서 전혀 불이익을 받지 않는 교육이 정착돼야 합니다. 영어도 마찬가지죠. 아무리 영어를 잘하는 아이가 있어도 ABCD부터 차곡차곡 가르치는 게 확실하게 자리잡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말도 제대로 모르는 어린 아이들에게 불고 있는 영어 조기교육 광풍을 잠재울 수 있습니다.
아이에게 선행학습을 시키지 않는 게 부모의 노력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국가가 나서서 선행학습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확신을 주는 게 먼저입니다. 국가에서 ‘한글 교육을 확실하게 할 테니 미리 가르쳐서 보내지 마세요’라 천명하고 실행하면, 부모들이 너무 좋아하실 거 같습니다. 그럼 저출산의 주범 중에 하나인 엄청난 사교육비를 줄이는 데도 크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적어도 초등학교에서는 한글‧영어 조기교육을 하지 않고 학교에서만 공부하면 된다고 부모들이 믿게 만들어야 합니다. 저출산 대책으로 아무리 많은 돈을 투자해도 부모 주머니에서 나가는 돈을 줄일 수 없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선행학습을 하지 않아도 되는 환경을 만들어야 아이들도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마음껏 뛰어놀면서 몸도 마음도 튼튼해지겠죠. 사교육비도 줄여 저출산의 한 요인도 제거할 수 있고, 나아가 아이를 우리나라의 미래의 인재로 키우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
하정훈은 서울대학교 의대를 졸업한 소아청소년과 의사다. 대한소아과개원의협의회 교육이사, 대한소아과개원의협의회 모유수유위원회 위원장, 대한소아청소년과개원의사회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하정훈소아과의원 원장이다. 베스트셀러 육아지침서이자 육아교과서라 불리는 '삐뽀삐뽀 119 소아과'의 저자이기도 하다.
하정훈 소아청소년과 전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