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이승엽 데뷔전 연장 끝내기 승…‘양강’ LG-KT 1승 1패 접전
그러나 '야구의 봄'을 기다린 야구팬들은 예상을 뛰어 넘는 열기로 개막을 맞았다. 화창한 날씨 속에 서울 잠실구장과 고척스카이돔, 인천 SSG랜더스필드, 수원 KT위즈파크, 대구 삼성라이온즈파크에 모두 만원 관중이 찾아 8개 구단 체제였던 2012년 이후 11년 만에 정규시즌 개막전 전 구장 매진을 달성했다. 개막전 총 관중 수도 10만 5450명으로 2019년 개막일(11만 4021명)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많았다. 당시엔 잠실·인천과 부산 사직구장·창원 NC파크·광주 기아챔피언스필드가 매진됐다.
이뿐만 아니다. 두산 베어스-롯데 자이언츠전이 열린 잠실의 2만 3570석과 SSG 랜더스-KIA 타이거즈전이 열린 인천의 2만 3000석은 이튿날까지 이틀 연속 꽉 찼다. SSG는 인천 연고 프로야구단 최초로 개막 2연전 매진을 기록했고, 두산도 2019년 이후 4년 만에 개막 2연전 매진을 달성했다.
#이승엽 감독 쉽지 않았던 첫 승
이틀간 4만 7500명이 찾은 잠실구장 최고의 화제는 이승엽 두산 감독의 '프로 사령탑 신고식'이었다. 이 감독은 삼성 라이온즈 신인 타자였던 1995년 4월 15일 LG 트윈스와의 정규 시즌 개막전에서 9회 대타로 나가 당대 최고 소방수 김용수를 상대로 중전 안타를 쳤다. KBO리그 역대 최고 타자가 태동한 출발점이었다. 그로부터 28년이 지난 2023년 4월 1일, 삼성이 아닌 두산 감독으로 역사적인 프로 사령탑 데뷔전을 치렀다. 이 감독은 이날 서울 잠실구장에서 열린 롯데 자이언츠와의 개막전에 앞서 "선수로서나, 감독으로서나 첫 경기는 잠실에서 하게 됐다"며 "선수 때는 팀이 졌지만, 그때는 내가 스타팅 멤버가 아니었다. 이번엔 내가 '스타팅 감독'으로 나간다. 꼭 이기고 싶다"고 재치 있는 출사표를 던졌다.
현역 시절엔 실력도, 인기도 모두 최고였던 이 감독이다. 두산 사령탑에 앉은 뒤 하루하루 선수 때와는 다른 스트레스를 경험했다. 가뜩이나 선수층이 두껍지 않은데, 외국인 투수 딜런 파일과 주축 외야수 김대한마저 부상으로 이탈했다. 이 감독은 "선수 때는 '내가 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지금은 선수들이 잘하도록 도와야 하는 역할이라 느낌이 다르다"며 "육체적으로는 덜 힘들지만, 생각해야 할 일이 많아서 정신적으로 더 힘들다"고 고충을 털어놨다. 그러면서도 "고민은 내가 할 테니, 선수들은 그라운드에서 고민 없이 최선을 다해 뛰었으면 좋겠다"며 "우리 팀에는 경기를 풀어나갈 줄 아는 선수들이 많다. 두산은 결코 약하지 않다"고 거듭 힘을 실었다.
이 감독의 첫 승은 쉽지 않았다. 두산과 롯데는 역전과 재역전을 거듭하는 4시간 48분의 혈투를 펼쳤다. 두산은 1회 말 먼저 3점을 뽑았지만, 선발 라울 알칸타라(4이닝 4실점)와 계투진의 난조로 3-8까지 끌려갔다. 그러나 7회 말 김재환의 극적인 동점 3점포 등으로 5점을 뽑아 승부를 원점으로 돌렸다. 8-8로 맞선 8회 말 이유찬의 기습적인 스퀴즈 번트 성공으로 결승점을 뽑은 듯했지만, 9회 초 다시 동점을 허용한 뒤 연장 11회 초에도 치명적인 실점을 해 패배 직전까지 왔다.
시즌 첫 판부터 이어진 연장 승부에 마침표를 찍은 건 올해 처음 두산 유니폼을 입은 외국인 타자 호세 로하스였다. 로하스는 정수빈과 허경민의 연속 안타로 만든 무사 1·3루에서 롯데 불펜 문경찬의 초구 직구를 통타해 우중간 담장을 넘겼다. 두산의 12-10 승리. 리그 역대 4호이자 두산 구단 최초의 개막전 끝내기 홈런이었다. 두산 선수들은 펄쩍 펄쩍 뛰며 그라운드로 달려 나왔고, 더그아웃의 이승엽 감독은 코치들과 얼싸안으며 극적인 승리의 기쁨을 나눴다. KBO리그 최고의 홈런 타자였던 이 감독이 홈런 덕에 기념비적인 1호 승리를 선물 받은 셈이다.
이 감독은 경기 후 '힘들게 이겼다'는 취재진의 인사에 "그냥 '힘들다'는 말로는 표현이 안 된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이어 "이긴 것도 좋지만, 5점 차 열세를 뒤집고 끝내 승리했다는 점에서 두산의 힘을 느낀 것 같아 더 좋았다"며 "힘들 것 같은 상황에서 다시 점수를 내면서 끝까지 버티다 이겼기 때문에 그냥 일반적인 승리와는 또 다른 기분이 들었다"고 했다. 또 "선두 타자 볼넷 5개를 포함해서 볼넷이 총 10개가 넘었다. 11회 초에도 선두 타자를 잘 잡고도 다음 타자를 볼넷으로 내보낸 게 실점의 원인이 됐다"며 "앞으로도 수많은 위기가 오겠지만, 이런 실수를 계속 줄여나가야 우리 팀이 더 강해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두산 선수들은 경기 후 더그아웃 앞에 둥글게 모여 감독의 첫 승을 축하하는 꽃다발을 건넸다. 몇몇 선수는 감독에게 장난스럽게 물을 뿌리며 축하 세리머니를 하기도 했다. 이 감독은 "진짜로 선수 때보다 (감독으로서 받는 게) 훨씬 좋았다"며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이유가 있다. "예전엔 내가 잘할 때 기뻤는데, 지금은 선수 중 어느 누구라도 잘해주면 내 어깨가 올라간다. 그래서 더 애틋하다"고 했다.
빈말이 아니다. 이 감독은 구단 직원이 외야에서 회수해 온 승리 기념구를 건네자 "나보다 (KBO리그 데뷔전을 치른) 로하스에게 줘야 한다. 나는 다음 경기에서 승리하고 받으면 된다"며 손사래를 쳤다. '감독 이승엽의 데뷔전 승리구'보다 '타자 로하스의 KBO리그 첫 홈런구'로 더 의미 있다고 생각해서다. 그러나 정작 로하스가 그 공을 사양했다. "첫 안타(7회 말 우전안타) 기념구를 이미 받았다. 감독님에게 더 큰 의미가 있으니 받아주셨으면 좋겠다"고 화답했다. 그 공은 결국 감독의 호의와 선수의 양보 끝에 다시 이 감독의 손에 들어왔다. 이 감독은 "소중하게 간직하겠다"며 고마워했다.
#첫날 타격전 둘째 날 투수전
야구는 요지경이다. 불타는 타격전 끝에 12점을 내고 이긴 두산은 다음 날 재대결에서 한 점도 뽑지 못하고 졌다. 반면 불펜이 연쇄적으로 무너지면서 아쉬운 연장 재역전패를 당한 롯데는 선발 투수가 호투하고, 중심 타자가 결승 타점을 올리고, 마무리 투수가 승리를 지키는 이상적인 경기를 했다. 래리 서튼 롯데 감독이 "우리 팀이 가야할 방향과 정체성을 보여준 게임"이라고 흐뭇해했을 정도다.
롯데 선발 나균안이 6과 3분의 2이닝을 5피안타 무실점으로 호투해 승리 투수가 됐다. 지난해 은퇴한 이대호의 후계자로 불리는 차세대 거포 한동희는 팽팽한 0의 행진이 이어지던 7회 초 1사 1·3루에서 좌중간을 가르는 2타점 적시 2루타를 터트려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개막 후 9타석 연속 침묵하다 10번째 타석에서 천금같은 결승타를 만들어냈다. WBC에서 활약한 소방수 김원중은 9회 1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 2-0 승리를 지켜내고 시즌 첫 세이브를 따냈다.
두산 역시 선발 투수 최원준이 7이닝 2실점으로 호투하면서 팽팽하게 맞섰다. 그러나 하루 전 집중타를 쏟아낸 타선이 일제히 침묵에 빠지면서 롯데 마운드를 공략하지 못했다. 두산과 롯데의 뜨겁던 개막시리즈는 타격전과 투수전이 한 차례씩 오간 끝에 1승과 1패를 주고 받고 마무리됐다.
다른 구장도 다르지 않았다. 키움 히어로즈와 한화 이글스가 맞붙은 고척스카이돔만 빼고, 4개 구장에서 대결한 8개 팀이 모두 1승 1패를 기록했다. 특히 올 시즌 SSG와 함께 '3강'으로 분류된 KT 위즈와 LG 트윈스는 수원에서 불꽃 튀는 기선제압 경쟁을 펼쳤다.
#미리보는 KS
LG와 KT는 개막 직전 열린 미디어데이에서 나란히 경계대상 1호로 꼽힌 팀이다. 10개 구단 감독 중 6명이 '올해 가을야구에서 만날 것 같은 두 팀을 골라달라'는 질문에 LG와 KT를 지목했다. 때마침 올 시즌 첫 경기부터 정면 대결을 하게 돼 더 흥미를 끌었다. 일단 첫 판은 KT가 잡았다. KT는 강백호와 앤서니 알포드가 홈런을 터트리는 등 장단 13안타를 몰아치면서 11-6으로 이겼다. 특히 KT의 천적으로 꼽혔던 LG 에이스 케이시 켈리를 무너뜨려 기쁨이 더 컸다. 2019년 LG에 입단한 켈리는 지난해까지 KT전 10경기에서 5승 무패, 평균자책점 1.80을 기록한 '저승사자'였다. 그러나 KT 타선은 이날 1회 말부터 알포드의 2타점 적시타로 앞서 나간 뒤 3회 말 강백호의 중월 솔로홈런으로 3-0 리드를 잡았다. 5회까지 무안타로 침묵하던 LG가 6회 초 서건창의 적시타로 1점을 만회했지만, KT는 6회 말 타자일순하며 대거 8점을 뽑았다. 알포드의 우월 솔로포, 박병호의 우전 안타, 황재균의 2루타가 이어지자 켈리도 더는 마운드에서 버티지 못했다. LG가 9회 초 마지막 공격에서 5점을 뽑았지만, 만회하기는 어려운 격차였다. KT 선발 웨스 벤자민은 6이닝 1실점(비자책)으로 첫 승을 따냈고, 켈리는 5와 3분의 1이닝 8피안타(2피홈런) 6실점으로 KBO리그 다섯 시즌 만에 KT전 첫 패를 안았다.
두 팀은 다음 날도 한국시리즈를 방불케 하는 총력전을 벌였다. 4시간 47분 동안 연장 11회 혈투를 펼쳤고, 양 팀 투수 17명(LG 9명, KT 8명)이 마운드에 올랐다. 경기 초반까지만 해도 예상할 수 없었던 흐름이라 더 극적이었다. LG는 3회가 끝나기 전에 KT 선발 소형준을 끌어내렸다. 1회 초가 시작하자마자 서건창-문성주-김현수-오스틴 딘의 연속 안타로 3점을 뽑았고, 2사 후 문보경의 적시타로 1점을 추가했다. 3회 초에도 안타 4개와 도루 2개, 사사구 3개를 묶어 5점을 뽑았다. 소형준은 LG 타선의 공세를 이기지 못하고 2와 3분의 1이닝 10피안타 9실점으로 무너졌다. KT가 1회 말 앤서니 알포드의 2점 홈런과 3회 말 3득점으로 추격했지만, LG는 핵심 불펜 백승현-김진성-정우영을 연속 투입해 7회까지 4점 리드를 지켜냈다.
LG의 손쉬운 승리로 끝날 듯했던 경기는 8회 말부터 급변했다. 1사 1루에서 LG 투수 박명근이 KT 김상수를 3루수 땅볼로 유도했다. 병살타로 이닝이 마무리되는 분위기. 그런데 이때 LG 3루수 문보경이 2루로 악송구하면서 도리어 1사 1·3루 위기가 찾아왔다. 이어 등판한 진해수는 조용호에게 볼넷을 내줘 1사 만루가 됐고, 강백호의 내야 땅볼 때 3루 주자의 득점을 허용했다. LG의 여덟 번째 투수 이정용은 알포드에게 좌익선상 적시 2루타, 박병호에게 2타점 좌전 적시타를 잇달아 얻어 맞아 끝내 9-9 동점을 허용했다.
결국 승부는 연장 11회에 결정됐다. LG는 선두타자 박동원의 좌중간 안타와 문보경의 희생번트로 만든 1사 2루에서 홍창기의 빗맞은 안타로 2·3루 기회를 이어갔다.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은 KT는 국가대표 선발 고영표를 구원 투입하는 강수를 뒀다. 그러나 대타로 투입된 이천웅은 기습적으로 투수 앞 스퀴즈 번트를 시도했다. 대주자로 투입됐던 송찬의가 3루에서 득달 같이 달려 들어와 홈을 밟으면서 천금같은 결승 득점을 올렸다. LG 타선은 19안타를 몰아치면서 올 시즌 처음으로 선발 타자 전원 안타를 기록했다.
#끝내기로 유일한 2승
키움은 10개 구단 중 유일하게 개막 시리즈를 2승으로 마쳤다. 심지어 이틀 연속 끝내기 승리로 한화를 꺾어 역대 세 번째 개막 2경기 연속 끝내기 승리라는 진기록도 세웠다. 첫 경기에선 지난해 말 퓨처스리그(2군) FA 첫 이적 사례를 남긴 이형종이 '해결사'였다.
키움은 3회 말 한화의 개막전 선발 버치 스미스가 어깨 통증으로 조기 강판한 틈을 타 2점을 먼저 뽑았다. 이후에는 에이스 안우진의 역투를 앞세워 리드를 지켜나갔다. 안우진은 6회까지 공 112개를 던지면서 5피안타 12탈삼진 무실점으로 역투했다. 자신의 한 경기 최다 탈삼진(11개)과 KBO리그 개막전 최다 탈삼진(10개) 기록을 동시에 갈아치웠다. 그러나 한화는 7회 초 안우진이 마운드에서 내려가자 1점을 추격했고, 8회 초 끝내 동점을 만들어 승부를 연장으로 몰고 갔다. 결국 승부는 10회 말에야 가려졌다. 1사 후 김혜성의 타구가 비디오 판독 결과 2루타로 인정됐고, 이정후의 고의 사구와 에디슨 러셀의 좌전 안타가 이어져 1사 만루 기회가 생겼다. 다음 타자 김준완이 소득 없이 물러난 뒤 타석에 들어선 이형종은 천금같은 좌전 적시타를 날려 3-2 승리에 마침표를 찍었다. 이형종은 8회 말 1사 만루에서 병살타로 물러났던 한을 다음 타석 끝내기 안타로 풀었다.
키움은 다음날도 7-6으로 천신만고 끝에 승리를 가져왔다. 이번에는 한화가 역전까지 성공했지만, 키움이 다시 동점을 만든 뒤 끝내 뒤집어버린 모양새였다. 한화는 3-4로 끌려가던 8회 초 선두 노시환의 우중간 2루타와 키움 3루수 송성문의 실책, 키움 불펜 원종현의 폭투를 묶어 동점을 만들었다. 이어 2사 2·3루에서 최재훈의 2타점 적시타로 승리를 눈앞에 둔 듯했다. 그러나 8회 말 믿었던 불펜 필승조 강재민, 김범수가 2루타-3루타-2루타를 연이어 얻어맞아 다시 동점이 됐다. 기세가 오른 키움은 결국 9회 말 안타 2개와 볼넷으로 무사 만루를 만든 뒤 김휘집이 한화 투수 주현상의 볼 4개를 그대로 골라내면서 큰 힘을 들이지 않고 끝내기 결승점을 뽑았다. 키움을 상대로 끈질긴 추격을 이어갔던 한화는 다이내믹했던 개막시리즈를 소득 없이 2패로 마쳐야 했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