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 정보로 대화 내용 추적하는 시긴트 방식 주목…“미국 상상 이상 기술 자국·우방국 안 가려”
첫 시작은 미국 뉴욕타임스 보도였다. 뉴욕타임스는 4월 8일 “미국 국방부 기밀 문건이 소셜미디어에 유출됐고, 이 문건 내용 중에 미국 정보기관이 한국 정부를 감청한 정황이 포착됐다”고 보도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미군에게 우크라이나 전쟁에 사용될 포탄을 공급하는 것이 살상 무기 지원 금지 원칙에 위배되는지 여부를 둘러싼 한국 정부 내부 논의 내용이 유출 문건에 포함돼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유출된 문건 출처는 ‘시긴트(SIGINT)’라고 명시돼 있다. 신호 정보 보고(Signals Intelligence Report)를 일컫는 약어다. 감청에 따른 정보는 커민트(COMINT: Communication Intelligence Report)와 시긴트로 구성된다. 커민트는 통상적으로 대중에 인식된 감청 개념이다.
전직 정보당국 관계자는 “소통하는 음성을 감청해 직접적으로 듣는 개념이 커민트라면 시긴트는 신호 정보를 분석해 어떤 말을 했는지를 추정하는 감청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신호 정보를 분석하는 시긴트는 음성을 통해 해석하는 커민트보다 고차원적이고 복합적인 감청 방식이다.
이 관계자는 “시긴트 방식 감청의 예를 들면 소리가 없는 상태에서 입 모양을 분석해 그 입 모양에서 음성을 추출 및 해석하는 식”이라면서 “입 모양만 가지고도 어떤 소리를 냈는지 분석하고 그 소리의 의미를 조합해 의미 있는 정보를 추출해내는 방법”이라고 했다.
그는 “신호 정보라는 것은 모든 시각적, 물리적 정보를 바탕으로 수집했다는 것”이라면서 “북한이 ICBM을 발사한다고 가정하면, 시긴트를 통해 미사일에 연료가 얼마나 주입돼 있으며 얼마만큼 날아갈지를 즉각적으로 판단할 수 있을 정도로 섬세한 영역”이라고 덧붙였다.
뉴욕타임스 보도는 국내 정치권을 요동치게 했다. 도·감청 의혹과 관련한 원인 및 책임이 주요 이슈로 떠올랐다. 야권에선 정부 책임론을 제기했다. 4월 10일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최고위원회의에서 “모든 내용이 명확하게 드러난 것이 아니지만 사실 매우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 대표는 “대한민국은 주권국이고 한미는 동맹 관계”라면서 “동맹 핵심 가치는 상호 존중이어야 한다”고 했다. 이어 이 대표는 “일국 대통령실이 도청에 뚫린다는 것도 황당무계하지만 동맹국 대통령 집무실을 도청한다는 것도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덧붙였다.
4월 12일 확대간부회의에서 이 대표는 “공동 이익을 위해 힘을 모을 땐 모으더라도, 친구의 잘못은 단호하게 지적하는 것이 성숙한 동맹”이라면서 “정부는 도청 의혹 실체를 낱낱이 파악하고 사실이라면 미국 정부 공식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을 반드시 받아내야 한다”고 재차 강조했다. 그는 “국회 차원 진상규명을 서두를 것”이라면서 “대통령실 보안 강화를 위한 입법 조치도 적극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4월 10일 이정미 정의당 대표는 관련 의혹을 “대한민국에 대한 심대한 주권 침해를 버젓이 자행한 중대 사태”라고 규정했다. 이 대표는 “한미정상회담에 목매고 미국에 한마디도 못한 채 어물쩍 넘기려 한다면 주권국가 대통령 자격 상실”이라면서 “한마디로 미국 눈치보기부터 한 모양새”라고 윤석열 정부를 비판했다.
이 대표는 “주권 침해 상황에 항의 한마디 못하는 비굴한 태도로 호혜·평등 외교관계를 어떻게 확장시켜나갈 수 있겠느냐”면서 “국익을 포기하려고 작정한 것이 아니라면 안보 구멍이 뚫린 대통령실에서 무슨 외교 전략을 짜겠다는 것이냐”고 반문했다.
야권에선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한 뒤 용산 대통령실 이전을 서두른 것이 이번 도·감청 의혹 빌미를 제공한 것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박홍근 민주당 원내대표는 4월 10일 “북한 무인기에 대통령실 주변 상공이 뚫리더니 이번에는 도청 정황까지 불거졌다”면서 “결국 대통령실 용산 이전이 졸속 추진되면서 의원들이 지적한 문제가 그대로 실현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대통령실은 대변인실 명의로 도·감청 의혹 관련 공식 입장을 내놨다. 4월 11일 대통령실은 “용산 대통령실 도·감청 의혹은 터무니없다”고 밝혔다. 대통령실은 “용산 대통령실은 군사시설로 과거 청와대보다 훨씬 강화된 도·감청 방지 시스템을 구축·운용 중”이라면서 “대통령 집무실과 비서실, 안보실 등이 산재해 있던 청와대와 달리 현재 (용산 대통령실은) 통합 보안시스템과 전담 인력을 통해 ‘철통 보안’을 유지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대통령실은 “더불어민주당은 진위를 가릴 생각도 없이 용산 대통령실 이전으로 도·감청이 이뤄졌다는 허위 네거티브 의혹을 제기해 국민들을 선동하기 급급하다”면서 “이는 북한의 끊임없는 도발과 핵 위협 속에서 한미동맹을 뒤흔드는 자해 행위이자 국익 침해 행위”라고 비판했다.
아울러 대통령실은 “정보전쟁엔 국경이 없다”면서 “한미정보동맹을 강화하고 발전시켜야 할 중차대한 시점에 더불어민주당 외교 자해 행위에 대해선 국민들이 판단할 것”이라고 했다. 대통령실은 “도·감청 의혹에 대해 한미 양국 국방장관은 해당 문건 상당수가 위조됐다는 사실에 견해가 일치했다”고 덧붙였다.
박진 외교부 장관은 4월 12일 도·감청 의혹과 관련해 “미국과 긴밀히 소통하고 있다”면서 “미국 정부가 지금 진상을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진상)이 파악되면 한미 간 정보를 공유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전직 정보요원(IO) A 씨는 “정보기관 감청이라는 것은 국가 사이에 정보 비대칭을 유발할 수 있는 굉장히 중대한 사안”이라고 했다. 그는 “미국 메릴랜드 주에 본부가 있는 NSA(미국 국가안보국)는 모든 시간대에 걸쳐 전 세계를 대상으로 감청을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면서 “통신 이송을 통해 감청을 할 수 있는 과학기술 정보가 상당히 발달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A 씨는 “정보전에는 아군과 적군이 없다”면서 “평시에는 자국 이익이 있는 쪽으로 감청 기술을 활용하고, 전시에는 적을 궤멸시키는 데 기술을 쓴다”고 했다. A 씨는 “미국 역시 자국과 우방국을 가리지 않고 상상 이상 감청 기술을 활용한다”면서 “미국 정보당국은 재원을 쏟아 부어 각종 정보전 장비 개발에 투자하고 있다”고 했다.
A 씨는 “일반인 입장에서 봤을 때 미국이 활용하는 도·감청 장비는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공상과학 영역에 가깝다”고 했다. 그는 “아무리 도·감청에 대한 보안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미국이 구축하고 있는 감청 시스템을 방어할 수 있는지 여부는 어떻게 확인할 길이 없다”면서 “도·감청을 막을 수 있는 최선의 수를 낸다는 것이지, 그 보안시스템이 도·감청을 무조건 막을 수 있다 이렇게 보장하는 건 아니다”라고 했다.
A 씨에 따르면 정보기관 주요 관계자들이 접선할 때 도·감청 가능성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으로 전해진다. A 씨는 “과거 국외에서 한 정보기관 유력 관계자를 만날 당시 카페 유리창에 500원 동전 크기 고무 조각이 전선과 연결된 상태로 붙어 있었다”면서 “‘이게 뭐냐’고 묻자 ‘도·감청 방지 장비’라고 했다. 그만큼 정보 당국 관계자들 사이에선 도·감청 가능성을 현실의 영역으로 보는 측면이 강하다”고 했다.
A 씨는 “미국은 기술적 우위를 바탕으로 어떤 보안시스템이라도 뚫어낼 수 있는 감청 인프라를 갖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1943년 일본 해군 대장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이동 스케줄을 감청해 격추한 사건이 유명하지 않나. 암호를 감청해 즉각적으로 해석해 일본 해군 대장이 탄 이송기를 정확하게 격추했다. 이 감청으로 일본 해군은 지휘관을 잃었고, 태평양 전쟁 향방이 바뀌었다. 세월이 흘렀지만, 미국 감청 기술 위상은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세계 최고 수준으로 정평이 나 있다.”
A 씨는 “미국 감청망이 얼마만큼 국내에 침투해 있는지는 미국만 알 것”이라면서 “외교적 관점에서 보면 미국이 동맹국을 도·감청한 것이고, 정보전 측면에서 보면 독자적으로 은밀하게 정보 수집 작전을 진행한 것”이라고 했다. 그는 “다만 도·감청 관련 추정 문건이 유출된 뒤 이슈로 불거진 상황 자체는 미국이 정보작전에 실패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