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 금융사 채권 회수 안하면 배임…경매 중단 조치 ‘시간 벌기’ 불과 평가
이른바 ‘빌라왕 전세 사기’ 수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건축주는 집값보다 높게 전월세 보증금을 책정한다. 예를 들어 매매 가격이 2억 원이라면 전세 보증금은 2억 5000만 원이나 3억 원이다. 집값 2억 5000만 원은 건축주가 갖고 나머지 5000만 원은 분양 대행사, 부동산 중개업자, 집주인 행세를 할 ‘바지 사장(일명 빌라왕)’이 나눠 갖는다. 애초 돈이 들지 않는 사기 수법이라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 아파트와 달리 빌라는 시세가 분명치 않다. 감정가 기준으로 전세 대출이 가능하다. 감정가는 평가 방법에 따라 ‘고무줄’이다. 실제 가치보다 비싼 평가가 가능하다. 집값을 부풀려 실제 집값보다 더 높은 전세 계약이 가능한 이유다
전세 계약이 만료되기 전까지는 사기를 당한 사실을 알기 어렵다. 알고 난 뒤에는 수습이 어렵다. 정상적인 임대차 계약이라면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임차인은 임차권등기명령을 통해 집을 강제 처분해 채권을 회수하면 된다. 임차권등기명령을 받아 등기가 이뤄지면 임차인이 개인 사정으로 먼저 이사를 하더라도 대항력 및 우선변제권을 상실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번 전세 사기는 애초부터 보증금이 집값보다 높았다. 경매와 공매로 팔리는 주택은 정상 시세보다 낮은 가격에 주로 거래된다. 경매와 공매로 넘긴다 하더라도 보증금을 모두 돌려받기 어렵다.
전세 대출을 받은 세입자는 자기 재산으로 부족분을 갚아야 한다. 세입자가 전세 대출을 갚지 못하면 금융회사와 금융기관은 경매와 공매로 강제 채권 회수에 나서게 된다. 경매 중단이란, 세입자가 전세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상황에서 채권자가 채권회수를 위해 집이 강제로 파는 것을 일시적으로 막는 조치일 뿐이다.
채권 회수는 금융회사와 금융기관으로서는 자기 손실을 막기 위해 당연히 해야 할 의무다.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면 배임이 될 수 있다. 자산관리공사(KAMCO·캠코)와 같은 공공기관은 대주주인 정부가 채권회수 연기를 용인하면 당장의 책임 추궁은 회피할 수 있다. 지난 4월 19일 기준 전세 사기·깡통 전세 피해자 전국대책위원회에 가입된 인천 미추홀구 34개 아파트·빌라 1787세대 가운데 공공기관인 캠코의 관리 주택은 128채(6.81%)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시중은행을 포함한 민간 금융권이 채권자다. 게다가 현재 피해 세대의 약 60%인 1066세대는 이미 경매·공매에 넘어간 상황이다. 낙찰 후 채권 회수가 진행되면 세입자들은 곧바로 집을 비워줘야 한다.
민간 금융회사는 정당한 이유 없이 채권회수를 늦추면 건전성 지표가 악화돼 주주이익을 침해하게 된다. 배임 추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금융감독원은 경매 일시 중단에 민간 금융권의 참여를 최대한 끌어내기 위해 피해자의 거주주택에 대해 금융권의 자율적 경매와 더불어 6개월 이상 매각 유예 조치를 추진할 계획이다. 이번 전세 사기에 연루된 주택 대부분은 다세대·연립주택 등이다. 은행보다 상호금융 등 제2금융권에 대출이 몰려있다. 지역 또는 단위별 기관이어서 규모가 작다. 최근 부동산프로젝트파이낸싱(PF)으로 ‘제 코가 석자’인 곳들이다. 손실을 감수하면서까지 사기 피해자들을 지원할 여력이 될지는 미지수다.
설령 민간 금융회사가 경매 유예 조치에 동참해도 경매 중단은 강제 퇴거를 일시적으로 늦추는 조치일 뿐 피해자들을 위한 구제책이 될 수는 없다. 현행 법령에서는 국가가 나서 사기 범죄 피해자들을 구제할 근거가 없다. 헌법 제30조는 타인의 범죄행위로 인하여 생명·신체에 대한 피해를 받은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로부터 구조를 받을 수 있다고 돼 있다. 이에 따라 2017년부터 범죄피해자보호법이 시행됐지만 구조 대상 범죄피해를 ‘사람의 생명 또는 신체를 해치는 죄에 해당하는 행위’로 제한한다. 세계적으로도 경제범죄 피해를 국가가 배상하는 제도는 찾기 어렵다.
전세 사기 피해자들은 정부가 임차인의 보증금 반환 채권을 우선 매수해 피해자들을 구제하고, 피해 주택을 사들여 공공임대주택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정치권에서 내놓은 관련 법 제정안도 있다. 조오섭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발의한 '주택 임차인의 보증금 회수 및 주거안정 지원을 위한 특별법안'에는 캠코 등 채권매입기관이 보증금 반환 채권을 우선 매수해 임차인 피해를 구제하는 내용이 담겼다. 임차인에게 보증금을 대신 지급해주고 그 채권을 인수하는 방식이다. 이후 주택을 팔거나 한국토지주택공사(LH) 등에 우선 매각해 공공임대주택으로 공급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다.
정부가 피해 주택을 직접 매입하는 것은 국가 예산으로 사기 피해 금액을 지원해 주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어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다른 경제 사건과의 형평 문제가 제기될 수도 있다. 이 법안들은 아직 국회 국토교통위원회에서 제대로 논의되지 않고 있다.
현행법에서 정부가 경제적 도움을 주는 내용이 있기는 하다. 주택임대차보호법에서 최우선변제 제도다. 전셋집이 경매나 공매로 넘어가더라도 은행의 선순위 근저당설정(대출)에 앞서 최우선해 소액 임차인에게 일부 금액을 돌려주는 제도다. 금융기관의 채권회수액을 제한하는 구조로 피해 구제에 정부 재정이 투입되는 것은 아니다. 말 그대로 ‘소액’을 위한 제도인 만큼 법령에서 정한 보증금 한도(서울 1억 6500만 원, 광역시 8500만 원) 이하 계약이어야 한다. 최우선 변제금도 서울 5500만 원, 광역시 2800만 원으로 제한된다.
이 밖에도 국세기본법은 임차보증금을 국세 체납액보다 앞서 변제하도록 하고 있다. 지방세에 대해서도 같은 취지의 법 개정안이 발의된 상태다. 역시 직접 재정을 투입하는 것이 아니라 세입 상의 손실을 감수하는 간접적 지원 형태다.
한편 정부는 올해 전세 사기 피해자에게 연 1%대의 낮은 이자로 대출해주기 위해 ‘전세 피해 임차인 지원대출’ 예산 1660억 원을 편성했다. 올해 1분기까지 집행 실적은 8명, 9억 원이다. 이사를 원치 않는 피해자가 많아 집행 건수가 적다는 것이 국토부의 설명이다. 임차인 입장에서 임차권등기명령을 받기 전에 집을 비우면 대항력을 가지지 못한다. 보증금을 돌려받을 길을 찾지 못하면 섣불리 살고 있는 집을 떠날 수 없다.
최열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