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동주 국내투수 최초 시속 160km 신기록 달성…페디 역대급 이력 증명하듯 명품 투구 선보여
지난 시즌 최고 투수였던 키움 히어로즈 안우진의 위력이 여전하고, 한화 이글스 2년 차 투수 문동주는 강속구로 연일 야구계를 달아오르게 하고 있다. 두산 베어스 1차 지명 출신인 곽빈도 데뷔 후 가장 좋은 스타트를 끊으면서 '1999년생 최고 유망주'의 가능성을 꽃피우는 모양새고, 키움 최원태 역시 매 경기 호투 릴레이를 이어가고 있다.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 다녀온 뒤 잠시 주춤했던 KIA 타이거즈 양현종, 삼성 라이온즈 원태인, NC 다이노스 구창모도 최근 등판에서 위력적인 투구를 하면서 제 궤도에 오르는 모양새다.
여기에 새 외국인 투수인 NC 에릭 페디, KT 위즈 보 슐서, KIA 숀 앤더슨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고, LG 트윈스 2년 차 외국인 투수 애덤 플럿코, 3년 만에 KBO리그로 복귀한 두산 라울 알칸타라 등도 존재감을 뽐내고 있다. 여러 구장에서 펼쳐지는 선발 투수들의 호투쇼에 야구팬들의 눈이 즐겁다.
#문동주가 연 '시속 160㎞ 시대'
이들 중 가장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투수는 단연 문동주다. 한국 프로야구에 '시속 160㎞ 시대'를 열어젖히면서 순식간에 리그 정상급 스타플레이어로 떠올랐다.
문동주는 지난 12일 KIA와의 광주 원정경기에서 1회 말 1사 후 박찬호를 상대로 3구째 시속 160㎞가 넘는 강속구를 던졌다. 이 공은 KBO 공식 기록통계업체 스포츠투아이가 운영하는 피치 트래킹 시스템(PTS)에 시속 160.1㎞로 측정됐다. PTS가 공식 도입된 2011년 이래 국내 투수가 시속 160㎞를 넘긴 건 문동주가 처음이다. 외국인 투수까지 포함하면 레다메스 리즈(전 LG·2011~2013년)와 파비요 카스티요(전 한화·2016년)에 이어 세 번째다.
시속 160㎞는 투수들에게 '꿈의 구속'으로 통한다. 특히 한 경기에 100구 안팎의 공을 던져야 하는 선발투수에게는 더 어려운 고지다. 10년 넘게 국내 투수 최고 구속 기록을 보유했던 최대성(시속 158.7㎞)을 포함해 역대 순위 상위권을 대부분 불펜투수가 점령하고 있다. 한화 한승혁(시속 157.7㎞) SSG 랜더스 조요한(시속 157.2㎞), 키움 조상우(시속 157.19㎞), LG 고우석(시속 156.54㎞·7위) 등이 모두 그렇다.
선발로 등판해 최고 시속 155㎞을 넘긴 투수는 문동주 외에 안우진(키움·158.4㎞)과 김광현(SSG 랜더스·시속 156.1㎞)이 전부다. 김광현은 2014년의 기록이지만, 문동주와 안우진은 구속이 점점 상승하는 추세다. 둘 다 20대 초중반이라 앞으로 더 빠른 공을 던질 수 있다는 기대를 모은다.
고교 시절부터 강속구로 유명했던 문동주는 지난해 1차 지명 신인으로 한화에 입단해 '수퍼 루키'로 기대를 모았다. 첫 시즌엔 옆구리와 어깨 근육 부상으로 재활하는 기간이 길어져 이름값은 하지 못했다. 13경기에서 28⅔이닝을 던져 1승 3패 2홀드, 평균자책점 5.65를 기록한 게 전부다. 건강한 몸으로 출발한 올 시즌은 다르다. 개막 선발 로테이션에 포함돼 3경기를 던졌고, 16⅔이닝 동안 6피안타 6볼넷 18탈삼진 2실점으로 호투해 평균자책점 1.08을 기록하고 있다. 심지어 강속구로 한국 선수 최초의 시속 160㎞ 이정표까지 남기면서 한화의 오랜 에이스 갈증을 풀어 줄 준비를 하고 있다.
한화뿐 아니라 한국 야구대표팀도 문동주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 한국은 지난 3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시속 150㎞대 강속구로 무장한 일본 투수들과의 격차를 뼈저리게 느꼈다. 문동주는 향후 국가대표 에이스로 성장해 그 아쉬움을 씻어낼 선봉장으로 꼽힌다. 국가대표 4번 타자의 대명사였던 이승엽 두산 감독은 "최근 우리 투수들의 평균 스피드가 확실히 올라온 것 같다. 우리 야구도 구속이 정체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예전에 내가 뛸 때는 시속 140㎞ 정도면 빠른 공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시속 150㎞를 넘겨야 강속구라고 한다. 그만큼 눈높이도 높아졌다. 갈수록 문동주 같은 투수가 더 나오게 될 것"이라고 반겼다.
'역대급 유망주' 문동주가 본격적인 실력 발휘를 시작하면서 한화도 유무형적인 효과를 누리고 있다. 문동주의 바로 다음 등판인 지난 18일 대전 두산전을 앞두고 경기 시작 두 시간 전부터 야구장 후문 밖으로 수백m의 긴 줄이 늘어섰다. 마치 포스트시즌을 연상케 하는 장면. 화요일 야간 경기에 비가 오락가락하는 흐린 날씨라 흥행에는 악조건인데도 그랬다.
이유가 있다. 한화는 이날 문동주의 시속 160㎞ 투구 기념 이벤트를 마련했다. 장외 무대에 숫자 '160.1'을 포토 조형물로 설치했고, 특별 제작한 문동주 포토카드를 선착순 1600명에게 선물했다. 관중 출입구 앞부터 야구장 밖 도로변까지 늘어선 행렬은 바로 이 포토카드를 받기 위한 인파였다. 오랜 기간 '절대적인 에이스'를 기다려왔던 한화 팬들은 새로운 특급 스타의 출현에 열광적인 성원을 보냈다. 한화 관계자는 "평일 저녁 경기에 이렇게 관중 줄이 늘어선 걸 보고 다들 깜짝 놀랐다"고 혀를 내둘렀다. 야구장 내 구단 오피셜 스토어에서도 문동주의 레플리카(판매용 유니폼)가 압도적으로 많이 팔린다는 후문이다.
문동주는 이날도 홈팬들의 응원 속에 5⅔이닝 2피안타 4볼넷 8탈삼진 무실점으로 잘 던졌다. 득점 지원을 받지 못해 승패는 기록하지 못했지만, 시속 160㎞ 투구 이후 쏟아진 폭발적 관심에 동요하지 않고 침착하게 제 역할을 해냈다. 관심을 모았던 직구 최고 구속은 한화 구단 자체 측정 시스템인 트랙맨 기준으로 시속 159㎞까지 나왔다. 4회 송승환 타석에서 던진 4구째 직구였다. 다만 KBO 공식 시스템인 PTS는 이 공의 스피드를 시속 156.1㎞로 측정했다. 문동주는 "시속 160㎞는 그동안 몸을 잘 만들었고, 현재 컨디션이 좋다는 것을 증명하는 기록이라는 데에 의미가 있는 것 같다"면서도 "앞으로도 구속을 너무 의식하며 던지진 않겠다. 중요한 건 효과적인 투구를 하는 것"이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한화는 그런 문동주에게 잠시 휴식을 주기로 했다. 등판 다음날인 19일 문동주를 1군 엔트리에서 제외해 선발 로테이션을 한 차례 거르게 했다. 지난 6일 삼성전에서 70구, 12일 KIA전에서 92구를 던진 뒤 18일 경기에서 데뷔 후 가장 많은 98구를 소화한 점을 고려했다. 구단의 '보물'인 문동주가 행여 부상이라도 당할까 미리 보호하는 차원이다. 문동주는 2군에 내려가지 않고 1군 선수단과 동행하며 컨디션을 관리하고 있다.
#외국인 투수 중 으뜸인 NC 페디
외국인 투수 중에서는 NC의 '신관' 페디가 단연 최고의 기량을 펼치고 있다. 또 다른 외국인 투수 테일러 와이드너와 외국인 타자 제이슨 마틴이 부상으로 빠져 있는 상황에서도 NC가 상위권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다.
NC는 지난 시즌을 마친 뒤 4년간 에이스 역할을 맡았던 드류 루친스키를 떠나보냈다. 루친스키는 4시즌 동안 통산 53승을 올리고 평균자책점 3.06을 기록한 리그 최정상급 에이스였다. 매년 170이닝 이상을 소화했고, 특히 지난 시즌엔 193⅔이닝을 던지면서 무너져가던 NC 마운드를 떠받쳤다. 구단은 당연히 재계약을 원했지만, 루친스키는 메이저리그(MLB) 재도전을 위해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와 계약했다. 페디는 바로 그 루친스키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NC로 온 투수다. 지난해 12월 계약 당시부터 팀과 팬들의 기대가 컸다.
그도 그럴 것이, 페디는 역대 KBO리그 외국인 선수 중 '역대급'으로 화려한 이력의 소유자다. 일단 2014년 MLB 신인 드래프트 1라운드 지명 출신이다. 미국 전역의 수많은 유망주들 틈에서 워싱턴 내셔널스의 첫 번째 선택을 받았다. 2017년 빅리그 데뷔 후 성장세도 가팔랐다. 5선발로 확실한 가능성을 보였다. 선발과 불펜을 오가며 스윙맨으로 활약한 2019년에는 워싱턴의 월드시리즈 우승에도 힘을 보탰다. 2021년과 지난 시즌에는 2년 연속 27경기를 풀타임 선발로 소화했다. NC 팬들조차 "왜 이 정도 선수가 한국에 와서 '우리 팀'에서 뛰는지 모르겠다"고 고개를 갸웃할 정도다.
심지어 나이도 그리 많지 않다. 1993년생이라 딱 서른이다. 양쪽으로 휘는 투심패스트볼을 비롯해 컷패스트볼, 커브, 체인지업 등 다양한 구종을 던진다. 상대 타자들은 연일 "똑바로 오는 공이 없다"며 혀를 내두른다. 이런 그를 수년 전부터 눈여겨 보던 NC는 지난해 페디가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얻자 새 외국인 선수 몸값 총액 상한선인 100만 달러를 안기면서 영입에 성공했다. 아마도 올해 최고의 선택 중 하나로 꼽히게 될 계약이다.
화려한 MLB 경력이 외국인 선수의 좋은 성적을 보장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 경우가 더 많았다. MLB에서 '이름 좀 날렸다' 싶은 선수들이 한국에 와서 콧대만 높이 세우다 결국 적응에 실패해 조기 퇴출 당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했다. 페디는 이들과 다르다. 그가 MLB에서 풀타임 선발 투수였던 이유를 KBO리그 마운드에서도 실력으로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페디는 3월 시범경기에 세 차례 등판해 12⅔이닝 7피안타 12탈삼진 1실점으로 어렵지 않게 적응을 마쳤다. 개막 후에는 4경기에서 24이닝을 소화하면서 자책점을 2점(5실점)만 허용했다. 성적은 2승 1패. 평균자책점이 0.75, 탈삼진이 29개다. 강인권 NC 감독은 "페디가 기대 이상으로 잘해주고 있다. 적응 기간도 필요 없이 벌써 KBO리그에 녹아든 느낌"이라고 흐뭇해했다.
페디는 특히 지난 7일 키움과의 창원 홈 개막전에서 키움 에이스 안우진과 '명품 투수전'을 펼쳐 깊은 인상을 남겼다. 안우진은 이날 최고 시속 158㎞에 이르는 강속구를 뿌리면서 7이닝을 12탈삼진 1실점으로 막았다. 6회까지 볼넷 하나만 내주고 노히트 행진을 이어가기도 했다. 7회 초 선두 타자 박세혁에게 맞은 솔로홈런이 이날의 유일한 피안타이자 실점이었다. 그러나 NC 선발로 나선 페디는 이보다 더 강력했다. 8이닝을 사사구 없이 4피안타 무실점으로 버텼다. 탈삼진 10개도 곁들였다. 공 112개를 던지면서 안우진과의 정면 대결을 끝내 승리로 이끌었다. NC의 새 에이스가 완벽한 대관식을 마치는 순간이었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