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트 안해요, 노래 즐기세요” 전성기 음색 여전…2003년부터 잠실주경기장서 8차례 공연 모두 매진
‘가왕’(歌王) 조용필(73)에게 물리적 나이는 숫자에 불과했다. 1968년 미8군 무대에서 가수로 데뷔하면서 그의 삶은 다시 시작됐다. 그래서 그의 나이는 아직 55세다. 당연히 그를 향해 “오빠”라 부르는 오빠부대의 나이는 그보다 어리다. 어느새 초로(初老)에 들어선 관객들이 적지 않았지만, 이날만큼은 1970~1980년대 소녀 시절로 돌아간 듯 크게 목청을 높였고, 가왕의 한마디 한마디에 자지러졌다.
5월 13일 서울 잠실종합운동장 올림픽주경기장에서 열린 단독 콘서트 ‘2023 조용필 & 위대한탄생 콘서트’는 조용필의 노래 인생 55년을 집대성한 무대였다. 공연은 시작부터 하이라이트였다. 수많은 폭죽이 터지며 단숨에 공연장의 온도를 높였고, 조용필은 자신만의 세상으로 관객을 이끌겠다는 듯 ‘미지의 세계’를 첫 곡으로 골랐다. 이어 ‘그대여’, ‘못찾겠다 꾀꼬리’를 연이어 부른 그는 “오늘 저하고 같이 노래하고 춤도 추고 마음껏 즐기자”고 관객들의 참여를 독려했다.
공연 내내 조용필은 그리 말이 없었다. 가왕은 “저는 별로 멘트가 없습니다. 그냥 즐기세요. 저는 노래할게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관객들은 불만이 없다. 원래 그가 공연을 펼치며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달변가가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추리고 추려도 공연 시간 내에 다 들을 수 없는 가왕의 노래를 한 곡이라도 더 들려주겠다는 가왕의 배려가 깔렸다.
55주년 공연은 선곡이 돋보였다. 조용필의 어제와 오늘을 모두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75년에 발표하고 하도 안 부르니까 항의하더라”면서 그의 출세작인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불렀다. 대형 LED 화면에는 거대한 배가 무대 위로 들어오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영상이 나왔다. 이 노래를 비롯해 ‘창밖의 여자’, ‘단발머리’ 등이 담긴 그의 1979년 발표 앨범은 한국 대중가요사에서 첫 밀리언셀러로 기록됐다.
“가지 말라고~”라는 후렴구로 유명한 ‘잊혀진 사랑’도 들려줬다. 그가 좀처럼 선택하지 않는 곡이다. 조용필은 “이 노래는 TV에서 한 번도 불러 본 적이 없다. 여러분이 히트시킨 여러분의 곡”이라고 소개했고, 관객들은 떼창으로 화답했다.
이날 공연의 또 다른 주인공은 장소였다. 서울올림픽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올림픽주경기장은 조용필의 이번 공연을 끝으로 리모델링에 돌입한다. 그 원형을 만끽할 수 있는 마지막 공연인 셈이다. 대중 가수가 올림픽주경기장에서 단독 공연을 펼친 것도 조용필이 최초였다. 지난 2003년 데뷔 35주년 단독 콘서트를 통해 잠실벌에 첫 입성한 조용필은 이번 공연까지 총 8차례 이 무대에 섰고 모조리 매진시켰다. 이를 기념이라도 하듯 조용필은 “1988 서울올림픽 전야제에서 이 무대에 올라 불렀다”면서 ‘서울 서울 서울’을 선곡했다.
어느덧 70대에 접어들었지만 조용필의 음색은 여전히 탄탄했다. 전성기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조용필의 수많은 명곡은 단 한 소절로 대변된다. “기도하는~”(비련)의 애절함은 여전했고, “그 언젠가 나를 위해 꽃다발을 전해주던 그 소녀”(단발머리)의 풋풋함도 빛을 잃지 않았다. 수많은 후배 가수들이 모창으로 부르곤 하는 ‘고추잠자리’의 “아마 나는 아직은 어린가 봐 그런가 봐~ 엄마야 나는 왜” 역시 우리가 기억하는 조용필의 그 느낌, 그 목소리 그대로였다.
조용필은 과거에 머물지 않았다. 현재진행형 가수라는 것을 웅변이라도 하듯, 그가 최근 발표한 신곡의 향연이 펼쳐졌다. ‘세렝게티처럼’을 부를 때는 전광판에 광활한 초원이 펼쳐졌고, 현재적 감각으로 매만진 ‘필링 오브 유’와 ‘찰나’ 등의 신곡도 화려한 영상과 함께 들려줬다.
조용필의 공연은 기승전결이 완벽했다. 흐름에 맞춘 기가 막힌 선곡으로 자연스럽게 관객들의 동참을 이끌어냈다. 마지막 곡은 ‘여행을 떠나요’였다. 이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소녀 시절로 돌아간 중장년 팬들에게 “메아리 소리가 들려오는 계곡 속의 흐르는 물 찾아 그곳으로 여행을 떠나”라고 한껏 흥을 불어넣은 후 무대를 마무리했다.
여흥을 주체할 수 없었던 팬들은 당연히 “앙코르”를 연호했고, 가왕은 익숙하게 다시 무대에 올랐다. 특유의 내레이션이 돋보이는 ‘킬리만자로의 표범’으로 들뜬 분위기를 정돈한 가왕의 앙코르 마지막 선택은 ‘바운스’였다. 그에게 20여 년 만에 다시금 차트 1위를 안기며 ‘음원의 시대에도 조용필은 통한다’는 것을 입증했던 이 곡을 부르며 조용필과 관객들은 서로를 향해 “You make me Bounce”(너는 나를 살아 숨 쉬게 만든다)라고 외치는 듯했다. 그렇게 빈틈없이 꽉 채운 2시간의 공연이 마무리됐다.
이날 작은 해프닝도 있었다. 5월의 날씨는 해가 지면 여전히 쌀쌀했다. 게다가 한강에서 불어오는 맞바람이 가왕의 얼굴을 쳤다. “여러분, 안 추우세요? 저는 맞바람에 눈물이, 아니 콧물이 좀…. 하하”라며 너스레를 떨던 가왕은 ‘바운스’를 부를 때 한 소절을 부르지 못했다. 그의 귀여운 실수는 보기 드문 진풍경이었다. 아울러 70대 나이에도 어떤 첨단 기계의 도움 없이 자신만의 목소리로 이 무대를 채우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안진용 문화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