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측에 유리하게 써달라 요구, 일부 노무사 일탈 존재”…정체불명 근로자대표 서명도 문제
국민의힘 박대수 의원은 '산재 조사 신뢰 확보법'을 대표 발의한 배경을 이같이 밝혔다. 여전히 남은 과제가 많다는 노동계 지적도 있지만 노무사 등 전문가들은 대체로 반기는 분위기다. '산재조사표 위조' 등 일부 노무사들의 일탈 행위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이유에서다.
#"회사에 유리하게 써달라는 요구 많아"
"재해발생 원인을 쓰는 칸이 작아 산재의 복합적 요인을 자세히 담을 수가 없다. 안전모 미착용 등 노동자 과실을 부각하는 건 한 가지 방법이다. 혹은 입증 불가능한 사항을 꾸밀 수도 있다. 이렇게 쓰기만 하면 다음은 쉽다. 사업주가 임명하는 근로자 대표한테 서명만 받으면 된다. 법망을 피할 수 있도록 노무사들이 일일이 코치해 주는 회사가 의외로 적지 않다."
수도권의 한 노무사가 설명해준 산재조사표의 조작 방식이다. 완전히 거짓된 사실을 기재하진 않으나 향후 소송 등이 불거질 경우 사측에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목적이다. 이 조사표는 산재 발생 후 사측이 고용노동부에 제출해야 하는 문서다. 사고의 날짜와 시간 및 사건 발생 상황 등을 쓰도록 해 재해의 원인 규명은 물론 수사 자료로도 폭넓게 활용된다.
그동안 산재조사표는 조작으로 점철됐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일요신문과 만난 노무사들도 이 같은 관행이 일각에서 실제 존재한다고 고백했다. 사측의 부실한 관리·감독 책임을 면제하거나 축소하기 위한 의도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기업이 일방적으로 작성하는 문서인 데다 사고 피해자나 유족은 열람이 어려운 구조라 이런 관행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지정노무법인의 소민안 노무사는 "대기업일수록 사실관계 축소 등 회사에 유리하게 써달라는 요구가 많다"며 "건설 현장을 예로 들면 사업장 과실이 분명해도 안전장비 미착용 등 노동자 잘못만 드러내는 일이 흔한 편"이라고 꼬집었다. 또 "산재조사표 제출 자체를 안 하는 방법을 구할 때도 있다"며 "자주 내면 노동부 등에서 안 좋게 볼까 우려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노무사는 직접 경험한 일을 말해줬다. 그는 "어느 공장에서 구조물 추락으로 한 차례 부상을 당했고, 복귀 첫날 같은 사고를 당해 결국 사망한 일이 있었다"며 "사업장의 부실 관리 책임이 명백했지만 노동자가 임의로 구조물을 만지는 등 업무를 태만히 하다 벌어진 일로 둔갑해 달라는 식의 사측 요구가 강했다"고 떠올렸다.
#'근로자대표 서명'의 비밀
실제 일요신문이 확인한 일부 중대재해 사건의 산재조사표를 보면 노무사들의 설명이 쉽게 이해된다. 일례로 2019년 10월 부산 남구 문현동에서 발생한 고 정순규 씨의 경동건설 공사현장 사망사고의 경우 산재조사표에 '수직사다리(2m) 내려오던 중 미끄러져 추락한 사고로 추정됨'이라는 한 줄이 전부다. 사고 원인과 재발방지 계획은 아예 내용이 없다.
단 한 줄 적힌 내용마저 법원에서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길이가 최소한 2m는 넘는다는 판단이 나왔다. 엄밀히 보면 사다리 높이는 사고의 핵심 원인도 아니었지만, 산재조사표에 적힌 불과 한 문장 때문에 유족들은 이를 놓고 재판에서 소모적인 논쟁을 벌여야만 했다. 이 사건의 사측 관계자들은 1·2심에서 징역 또는 금고형의 집행유예를 선고 받았다.
2021년 평택항에서 발생한 고 이선호 씨 사망 사건에서도 마찬가지다. 인근 세관에서 동식물 검열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잠시 부두 개방형 컨테이너 작업 현장으로 불려가 300kg가량의 날개에 깔려 숨진 사건이다. 산재조사표에는 '작업 시 안전작업 절차 미준수' '근로자 안전모 등 보호구 미착용' 등 마치 이 씨의 잘못이 원인이라는 듯 적혔다.
두 사례에서 눈에 띄는 또 다른 부분은 '근로자대표 서명'이다. 경동건설 사고에 관한 조사표에는 서명이 존재하지 않았고, 평택항 사건에서는 원청인 동방의 한 직원 명의로 서명돼 있었다. 숨진 이선호 씨와 같은 현장에서 일한 부친 이재훈 씨는 "모르는 사람"이라며 "10여 년을 같은 현장에서 일하며 근로자대표가 있는 줄도 몰랐다"고 했다.
이는 근로자대표를 회사가 임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노조가 있는 회사라면 노조위원장이 근로자대표로서 산재조사표를 보고 사인을 할 때도 있으나, 그렇지 않은 회사가 훨씬 많기 때문에 가능한 방식이다. 두 유족은 이마저도 힘겹게 확인했다. '사측이 원치 않는다'며 정보공개를 거부당하다 언론보도로 사건이 공론화하며 국회 도움을 받아 얻을 수 있었다.
삼성 반도체 노동자의 직업병 문제 해결을 위해 결성된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의 조승규 노무사는 "산재가 발생하면 대부분의 기업들은 이미지 훼손이나 대외 감시망 등을 피하고자 공상을 유도한다"며 "노동자들도 회사와 다투기보단 보상으로 마무리 짓는 경우가 많아 산재조사표의 축소나 은폐 시도도 비교적 수월한 것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근로계약서 조작 행위도 발생"
박대수 국민의힘 의원이 5월 16일 대표발의한 '산재 조사 신뢰 확보법'(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은 그래서 주목된다. 조사표에 명시된 산재 발생 개요와 원인 및 재발방지 계획 등을 외부의 독립된 전문가가 확인하고 그 의견을 노동부 장관에게 보고하도록 하는 게 내용의 핵심이다. 노무사나 의사 및 시민사회 등이 함께 감시에 참여할 길이 열렸다.
박사영 노무사(한국공인노무사회 부회장)는 "사측에 우호적인 근로자를 섭외해 진술을 받고 산재조사표에 반영하는 방식 또한 흔한 수법"이라며 "이 같은 축소나 은폐뿐 아니라 작성 자체를 안 하도록 컨설팅을 해주는 일도 빈번한 현실이므로, 외부 전문가의 조사표 검토는 최소한의 조치로서 입법화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고 밝혔다.
물론 갈 길은 여전히 멀다. 위조나 은폐가 횡행하는 문서가 산재조사표에 그치진 않기 때문이다. 권미정 김용균재단 사무처장은 "산재조사표 외부 검토 법안은 실효성을 담보할 구체적 방법론이 과연 있을지 지켜봐야겠다"면서 "자칫 불필요한 절차만 새로 만들어져 산재 처리 속도를 오히려 늦추는 부작용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권미정 사무처장은 특히 "노동자가 근로계약서를 대부분 제대로 읽지 않는 점을 악용해 사고 발생 후 피해자에 불리한 내용을 담은 근로계약서를 새로 만들어 중간에 끼워 넣는 식의 조작 행위도 자주 발생한다"며 "산재조사표만 손볼 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문서 위조 등에 관한 처벌 강도를 높이고 실제 집행에 적용하는 등의 개선이 이뤄져야 한다"고 꼬집었다.
경동건설 중대재해 피해자인 고 정순규 씨의 유가족들도 같은 입장이다. 이들은 지난 5월 15일 경동건설과 하청사 JM건설을 사문서위조 및 위조사문서행사 혐의로 부산경찰청에 고소했다. 사고 책임을 둘러싼 재판 과정에서 사측이 고인 명의로 작성됐다며 제출한 '관리감독자 지정서'가 조작된 사실이 확인됐음에도 판결에 반영되지 않은 까닭에서다. 이 조작 사실은 고인의 아들 정석채 씨가 필적감정 등을 거쳐 확인했다.
정석채 씨는 "산재 유족들은 단순 피해 사실뿐 아니라 문서의 위조 정황까지 직접 입증해야 하는 등 사고 발생 후 더 큰 아픔을 맞닥뜨려야 하는 게 현실"이라며 "산재조사표는 아예 제도를 없애버리자는 말이 나올 만큼 피해자와 유족에게는 특히 큰 상처를 입혀왔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 씨는 그러면서 "2022년 9월 발생한 현대아울렛 대전점 화재에 따른 7명의 하청업체 노동자 사망 사건에서도 사측이 중대재해법 적용을 피하고자 안전보건협의체 회의록을 조작한 사실이 최근 드러났다"며 "그 외에 여러 중대재해 발생 사업장에서도 각종 문서를 위조한 정황이 파악돼 공론화는 물론 엄벌을 촉구할 계획"이라고 경고했다.
주현웅 기자 chescol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