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7월 3일 5시간 21분 혈전이 역사의 서막…통산 전적은 LG가 롯데에 앞서
엘 클라시코는 스포츠 전 종목을 통틀어 가장 유명하고 전통 있는 라이벌전 중 하나로 꼽힌다. 숙적인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선수들은 만났다 하면 은근한 신경전을 주고받으면서 자존심을 건 명승부를 펼쳐왔다. LG와 롯데는 조금 달랐다. 비슷한 시기에 암흑기를 거친 터라 유독 마운드가 붕괴하고 난타전으로 이어지는 경기가 많았다. 치명적인 수비 실책이나 미숙한 주루 플레이 탓에 다 잡았던 경기를 놓치고 엎치락뒤치락 혈투를 벌여 온 역사도 있다.
물론 비슷한 점도 있다. 두 팀은 KIA 타이거즈와 함께 전국구 흥행을 보장하는 자타공인 KBO리그 3대 인기 구단이다. 팬들의 열기와 응원전도 그만큼 뜨겁다. LG와 롯데가 올 시즌 선두권에 머물면서 순위 싸움을 이어가자 야구장으로 구름 관중이 몰려들기 시작했을 정도다.
심지어 5월 30일부터 6월 1일까지 열린 두 팀의 잠실 3연전에는 평일 야간 경기인데도 사흘간 6만 3619명의 팬이 관중석을 채웠다. 화요일 첫 경기에 2만 330명, 수요일 두 번째 경기에 2만 1269명, 목요일 마지막 경기에 2만 2020명이 모여 3경기 모두 관중 2만 명을 넘어섰다. 포스트시즌을 방불케 하는 열기였다.
#엘롯라시코의 시작
LG와 롯데는 1982년 프로야구 출범 이래 총 740차례 맞붙었다. 통산 전적에선 LG가 롯데에 371승 23무 347패로 앞서 있다. 초창기인 1980년대에는 주로 롯데가 LG의 전신 MBC 청룡에 우위를 점했다. 그러나 LG가 1990년 팀 이름을 바꾸고 새 출발한 뒤엔 롯데가 지는 날이 더 많아졌다. LG는 1997년부터 2004년까지 8년 연속으로 정규시즌 상대 전적에서 앞서기도 했다.
그 후엔 두 팀이 1~2년 간격으로 승자를 바꿔 가며 시소게임을 했다. 두 팀이 동률로 마친 시즌은 1989년(10승 10패)과 2016년(8승 8패)이 전부다. 포스트시즌 맞대결은 1995년 플레이오프가 유일하다. 정규시즌 3위였던 롯데가 2위 LG를 꺾고 한국시리즈에 올라간 뒤 두산 베어스에 져 준우승했다. 이후 두 팀의 가을야구 맞대결은 지난해까지 27년째 열리지 않고 있다.
야구팬들은 ‘엘롯라시코’라는 애칭이 널리 쓰이게 된 계기로 2010년 7월 3일 잠실 경기를 꼽는다. 여러 의미로 역사적이긴 했다. 토요일이라 오후 5시에 시작한 경기가 오후 10시 21분에야 끝났다. 양 팀이 8명씩 총 16명의 투수를 내보냈는데, 선발 두 명을 포함해 그 어떤 투수도 3이닝 이상을 던지지 못했다. 두 팀이 연장 11회 승부에서 합계 22번의 이닝을 거치는 동안 16번이나 득점이 나와 역대 한 경기 최다 이닝 득점 기록을 썼다. LG는 선발 타자 전원 안타를 기록했고, 롯데는 강민호를 제외한 8명이 안타를 때려냈다.
이뿐만 아니다. 경기 도중 동점 상황만 다섯 번 나왔고, 롯데 불펜은 한 경기에서 블론세이브를 두 번 했다. 1회 시즌 23호 홈런을 때린 롯데 이대호는 4회 포구 실책과 5회 송구 실책을 잇달아 범하며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LG는 도루 실패·주루사·견제사 등 다양한 방식으로 번번이 역전 기회를 날렸다. 다른 구단 팬들로부터 “우리 팀 경기를 놔두고 채널을 돌려 LG-롯데전을 봤다”는 증언이 속출했을 정도다. 같은 날 나온 삼성 라이온즈의 9연승과 KIA의 13연패도 이 경기의 화제성을 이기지는 못했다.
5시간 21분에 걸친 이날의 혈전에서 끝내 마지막에 웃은 팀은 롯데였다. 롯데는 9회 말 투아웃에 통한의 동점을 허용해 연장 승부를 시작해야 했지만, 11회 초 선두 타자 조성환이 2루타를 치고 출루하면서 뒤늦게 승리의 실마리를 풀었다. 이 안타는 조성환이 이 경기에서 때려낸 네 번째 2루타이기도 했다. 롯데는 홍성흔의 몸에 맞는 공과 이대호의 고의 4구로 무사 만루 기회를 잡은 뒤 손아섭의 희생플라이로 고대하던 결승점을 뽑았다.
물론 LG도 그대로 호락호락하게 패하진 않았다. 11회 말 선두 타자 김태군이 중전 안타로 출루했고, 1사 후 이진영이 다시 우전 안타를 쳐 롯데 벤치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그러나 바로 그때 1루 주자 김태군이 2루를 찍고 다음 베이스까지 욕심내다 3루에서 태그 아웃됐다. 상승세에 찬물을 끼얹는 치명적인 주루사였다. 다음 타자 이병규가 곧바로 우익선상으로 2루타를 때려냈기에 LG의 한숨은 더 컸다. LG는 결국 이택근의 고의4구로 이어진 2사 만루에서 정성훈이 중견수 플라이로 돌아서면서 아쉽게 무릎을 꿇었다.
#경기가 다음 날 끝났다
그래도 엘롯라시코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경기는 역시 2017년 6월 27~28일의 부산 사직구장 맞대결이었다. 한 경기인데 날짜를 굳이 27~28일로 표기한 이유는 27일 오후 6시 30분에 경기가 시작돼 28일 0시 8분에 끝났기 때문이다. 총 5시간 38분에 걸친 연장 12회 혈투. KBO리그 역대 최초로 '무박 2일' 경기라는 새 역사가 쓰인 날이었다. 특히 연장 10회 초 LG가 5점을 내자 10회 말 롯데도 딱 5점만 뽑아 연장 11회로 넘어가던 순간은 이 경기의 백미(?)로 통했다. 심지어 롯데의 11-10 승리에 마침표를 찍은 기록은 끝내기 홈런도, 안타도, 희생플라이도, 땅볼도, 밀어내기 볼넷도 아닌 LG의 끝내기 실책이었다.
초반부터 ‘특별한 경기’가 될 거라는 조짐이 보였다. LG가 1-0으로 앞선 2회 말 1사 만루. 롯데 문규현의 타구가 마운드에 서 있던 LG 선발 차우찬의 왼쪽으로 향했다. 차우찬은 본능적으로 발을 내밀어 타구를 막아낸 뒤 얼른 공을 집어 홈 쪽으로 던졌다. 투수-포수-1루수로 이어지는 병살타가 충분히 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그때 차우찬의 송구가 느닷없이 포수 오른쪽의 허공으로 날아갔다. 아웃을 직감하고 천천히 들어오던 롯데 3루 주자 강민호조차 당황하게 만든 실책이었다. 결국 강민호에 이어 2루 주자 황진수까지 홈을 밟으면서 전세가 뒤집혔다. 롯데는 3회 말 이대호의 병살타 직후 강민호의 솔로홈런이 나오면서 3-1로 달아났다.
그러나 LG도 4회 초 공격에서 곧바로 역전했다. 선두타자 양석환이 실책으로 출루한 뒤 정성훈과 채은성의 연속 안타로 1점을 추격했다. LG가 이 이닝에서 뽑은 3점 중 유일하게 적시타로 올린 득점이었다. 이어진 무사 2·3루 오지환 타석에서 롯데 선발 송승준의 포크볼이 포수 앞에서 바운드된 뒤 뒤로 흘러 LG 3루 주자가 동점 득점을 올렸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송승준은 2사 후 강승호와 11구 승부 끝에 볼넷을 내준 뒤 다시 한번 흔들렸다. 이형종 타석에서 이번엔 포수 머리 위로 넘어가는 폭투가 나와 LG에 역전 득점을 헌납했다.
그 후 경기는 소강상태였다. 초반 실책했던 차우찬도 6⅔이닝을 추가 실점 없이 잘 막고 임무를 완수했다. 그러나 끝내 정규이닝에서 승부를 가리지는 못했다. LG가 8회 초 유강남의 적시타로 1점을 추가해 5-3으로 한발 더 앞섰지만, 8회 말 강민호가 동점 2점 아치를 그려 승부를 원점으로 돌렸다. 문제는 강민호가 이 홈런을 끝으로 무릎 통증을 호소하며 교체돼 더는 타석에 설 수 없었다는 점이다.
#끝내기 실책으로 갈린 승부
9회부터 다시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형성됐다. 두 팀이 나란히 절호의 득점 기회를 날렸다. 9회 초 2사 만루에서 LG 채은성이 친 땅볼 타구가 3루 쪽 파울라인 근처로 천천히 굴러갔다. 롯데 3루수 황진수가 달려 들어왔지만, 내야안타가 될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황진수가 맨손으로 캐치한 뒤 정확하고 빠르게 1루로 던져 아웃카운트를 잡아냈다. LG는 마지막 남은 비디오 판독 기회까지 소진하며 반전을 노렸지만, 원심은 유지됐다. 9회 말엔 롯데가 연속 안타로 무사 1·2루 기회를 잡았지만, 간판타자 이대호가 병살타로 물러나 찬물을 끼얹었다. 다음 타자는 김사훈. 이날 홈런 2개를 친 강민호 대신 투입된 백업 포수였다. 결국 그의 첫 타석이 3구 삼진으로 끝나면서 경기는 연장으로 넘어갔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모두 전초전에 불과했다. 진짜 드라마는 연장 10회에 펼쳐졌다. LG는 10회 초 롯데 바뀐 투수 배장호의 제구 난조를 틈타 안타와 몸에 맞는 공 2개로 1사 만루 밥상을 차렸다. 다음 타자 이천웅은 바뀐 투수 노경은의 초구 포크볼을 그대로 걷어 올려 오른쪽 담장을 넘어가는 만루 홈런을 때려냈다. LG 더그아웃은 승리를 예감한 환희로 뒤덮였고, 노경은은 전의를 잃은 듯 볼넷-안타-폭투로 1사 2·3루 위기를 자초했다. 정성훈이 희생플라이로 3루 주자를 불러들이면서 LG는 10-5로 넉넉한 리드를 잡았다. 10회 말 롯데 선두 타자 나경민이 우익선상 2루타로 출루했지만, 연장 승부에서 5점은 뒤집기 어려운 격차로 보였다. 롯데 쪽 관중석에는 빈자리가 점점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엘롯라시코’의 기운이 이번엔 롯데 더그아웃에 마법을 부렸다. 무사 2루에서 황진수가 우전 적시타를 쳐 1점을 추격했다. 10-6. 뒤이어 신본기의 몸에 맞는 볼과 이우민의 내야 안타로 베이스가 다시 꽉 찼다. 사직구장이 다시 서서히 술렁였다. 다음 타자 손아섭은 침착하게 밀어내기 볼넷을 골랐다. 10-7. 여전히 끝나지 않은 무사 만루 기회에서 김문호가 결국 일을 냈다. 중견수 키를 훌쩍 넘어 펜스 바로 앞에 떨어지는 2루타를 작렬했다.
신본기-이우민-손아섭이 차례로 홈을 밟을 때마다 사직구장의 함성은 점점 더 커졌다. 10-10 동점, 그리고 여전히 무사 2루. 이번엔 롯데의 끝내기 승리가 눈앞으로 다가온 듯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예감은 빗나갔다. 전준우가 삼진으로 돌아서 1사 2루가 되자 LG 배터리는 이대호를 고의4구로 걸렀다. 다음 타자는 김사훈. 이날의 두 번째 끝내기 기회가 하필이면 또 김사훈 앞에 돌아왔다. 결과는 가혹했다. 강민호가 더그아웃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김사훈은 3루수 쪽으로 땅볼을 쳤다. 이대호가 2루에서, 김사훈이 1루에서 나란히 아웃됐다. 병살타였다.
아쉬움을 삼킨 롯데는 자정이 다 돼 시작한 12회 말 공격에서 다시 1사 1·2루 마지막 기회를 맞았다. 이어 앞선 타석에서 삼진을 당했던 전준우가 중전 안타를 쳤다. 깊지 않은 안타라 2루 주자가 홈으로 들어오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였다. 그러나 앞으로 달려 나온 LG 중견수 안익훈이 타구를 급하게 처리하려다 공을 더듬어 뒤로 빠뜨렸다. 3루에 멈추려 했던 이우민은 다시 가속도를 붙여 홈으로 달려들었고, 그대로 경기 종료. 11-10 롯데의 승리였다. 롯데의 10번째 투수인 강동호가 2이닝을 무실점으로 막고 역사적인 경기의 승리 투수로 기록됐다.
#롯데 12-20 패배에도 박수받은 이유
이 두 경기 외에도 여전히 야구팬의 기억에 남아 있는 명승부들이 존재한다. 그중 하나는 2015년 5월 22일의 부산 사직구장 맞대결이다. 양 팀이 32점(LG 20점, 롯데 12점)을 주고받은 난타전이었다. 시작부터 심상치 않았다. 먼저 공격한 원정팀 LG가 3회 초까지 10점을 뽑아 10-0으로 앞섰다. 1회 나성용의 만루홈런 등으로 5점, 2회 오지환과 황목치승의 연속 2루타 등으로 4점을 냈다. 롯데 선발 김승회는 3회에도 추가 실점하면서 3이닝 동안 공 93개를 던지고 9피안타(2피홈런) 3볼넷 10실점을 기록한 뒤 마운드를 내려갔다.
그 와중에 LG 선발 루카스 하렐이 2회 롯데 최준석을 삼진으로 잡은 뒤 최준석 특유의 홈런 세리머니를 놀리듯 따라 하는 모습이 포착돼 벤치클리어링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그 세리머니는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기리는 것으로 알려졌기에 더 그랬다. 루카스가 최준석의 다음 타석에서 사과의 제스처를 취하지 않았다면, 경기 후 더 큰 논란에 휩싸였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롯데는 한발 늦게 추격을 시작했다. 3회 말 손아섭의 2점 홈런으로 추격을 시작한 뒤 4회 말 3점을 더해 11-5까지 따라붙었다. 하지만 한번 기세를 올린 LG 타선은 멈추지 않았다. 5회 3점, 6회 2점을 추가해 성큼성큼 달아났다. 8회 초엔 채은성이 2점 홈런까지 날려 기어이 20점을 채웠다. 20-5. 롯데가 백기를 들어도 이상할 게 없는 스코어였다. 그런데도 야구장을 찾은 관중들은 경기 후 롯데 선수들에게 기립 박수를 보냈다. 롯데가 8회 말에만 7득점 하면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안중열의 좌중간 2루타로 시작한 8회 말은 박종윤-김문호-오승택(2루타)-황재균-손아섭의 6타자 연속 안타로 4점을 추격하면서 한껏 달아올랐다. 1사 후엔 다시 짐 아두치의 2타점 적시 2루타와 최준석의 볼넷이 나왔고, 타순이 한 바퀴 돌아 두 번째 타석에 선 안중열의 중전 적시타가 이어졌다. LG는 결국 불펜 필승조였던 이동현까지 마운드에 올려 남은 아웃카운트 두 개를 잡아내야 했다. 선수들의 투지에 감동한 롯데 팬들은 23일과 24일 사직구장 연속 매진으로 화끈하게 보답했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