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O리그 4년 활약 이후 메이저 진출…제구력 마법사 매덕스 소환
그 후 9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올해, 켈리는 MLB 최정상급 투수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SK에서 4년간 활약하다 미국으로 돌아간 뒤 어느덧 MLB 5년 차 투수가 됐고, 당당하게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에이스 자리를 꿰찼다. 6월 16일(한국시간) 기준 내셔널리그 다승 공동 1위(8승)에 올라 있다. KBO리그에서 성장해 빅리그에서 꽃을 피우는, 이른바 '역수출' 신화의 최고봉을 찍는 모양새다.
#MLB로 '역수출' 된 켈리
켈리는 미국 애리조나 태생이다. 아버지가 리츠 칼튼 호텔 지배인 출신이라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오직 빅리그 마운드만을 꿈꾸며 야구를 해왔고, SK의 영입 제안을 받기 전까지는 한국에 프로야구 리그가 있는 줄도 몰랐다. 그러나 2014년 마이너리그 최상위 레벨인 트리플A에서 2점 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하고도 5년째 빅리그 콜업을 받지 못하자 심신이 지친 상태였다. 시속 150㎞ 안팎이던 켈리의 구속이 MLB에선 그리 빠른 편이 아니었던 데다 탬파베이 마이너리그에 쟁쟁한 유망주 투수가 너무 많아서였다.
때마침 그때 SK가 켈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직전 시즌에 루크 스캇, 조조 레이예스 등 화려한 경력의 외국인 선수를 영입했다가 큰 낭패를 봤던 SK는 이름값 대신 켈리의 가능성과 차분한 성격에 주목했다. 켈리는 과거 삼성 라이온즈에서 뛴 적이 있는 덕 매티스에게 KBO리그에 관해 문의했고, 매티스는 "마이너리그보다 좋은 환경에서 뛸 수 있을 것"이라며 한국행을 적극 추천했다. 그렇게 켈리와 SK의 인연이 성사됐다.
켈리는 KBO리그 첫 시즌이던 2015년부터 김광현과 함께 리그 정상급 원투펀치를 구축했다. 개인 타이틀은 2017년 한 차례 탈삼진 1위(189개)에 오른 게 전부지만, 매 시즌 KBO리그 외국인 투수 중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만큼 건실하고 강한 투수로 자리매김했다. 4년간 총 119경기에 나가 48승 32패, 평균자책점 3.86을 기록했을 정도다. 2015년 30경기에서 181이닝을 던지면서 11승을 올렸고, 두 번째 시즌엔 무려 200⅓이닝을 책임지면서 평균자책점 3.68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다만 그해 유독 승운이 따르지 않아 9승 8패로 시즌을 마쳐야 했다. 켈리는 그렇게 200이닝 이상 던지고도 10승 고지를 밟지 못한 역대 세 번째 투수로 기록됐다. 한때 그가 '켈크라이(켈리+크라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이유다.
무엇보다 켈리는 김광현이 팔꿈치 인대접합수술 재활로 이탈했던 2017년 가장 좋은 성적을 올리면서 토종 에이스가 빠진 팀 선발 마운드를 지탱했다. 30경기에서 190이닝을 소화하면서 16승 7패, 평균자책점 3.60을 기록했다. 이어 김광현이 돌아온 2018년엔 28경기에서 12승(7패)을 올리면서 그해 한국시리즈 우승에 큰 힘을 보탰다. 전반기의 부진을 후반기의 역투로 완벽하게 만회했고, 한국시리즈 3차전과 6차전에 선발 등판해 제 몫을 했다. 켈리는 결국 우승 반지를 끼면서 SK 입단 당시 수줍게 밝힌 목표를 4년 만에 이뤘다. SK도 당연히 켈리와 다섯 번째 시즌을 함께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켈리는 시즌이 끝난 뒤 조심스럽게 "미국으로 돌아가겠다"는 뜻을 전했다. 쓸만한 5선발을 찾던 애리조나가 한국에서 맹활약하던 켈리를 눈여겨봤기 때문이다. 고심하던 켈리는 익숙한 SK에 안주하는 대신 고향팀 애리조나에서 못다 이룬 꿈에 다시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켈리 덕에 우승까지 해낸 SK도 그의 의사를 존중해 보류권을 풀어줬다. SK와 아름답게 이별한 켈리는 한 달 뒤 고향팀 애리조나와 2년 총액 600만 달러에 계약하고 제2의 도약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31세에 시작된 성공시대
2019년 3월 29일, 켈리는 먼 길을 돌고 돌아 마침내 MLB 소속 투수로 빅리그 개막을 맞이했다. 마이너리그의 벽을 넘지 못하고 KBO리그에 진출했다가 31세의 나이로 꿈에 그리던 MLB 입성에 성공한 켈리의 드라마에 미국 언론도 주목했다. 야후스포츠는 '모든 이의 길은 다 다르다…남다른 여정을 통해 첫 개막전을 맞은 켈리'라는 제목의 기사로 메이저리거로서 첫날을 보낸 켈리를 집중 조명하기도 했다. 켈리는 당시 이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날을 맞기까지 말 그대로 먼 길을 돌아왔다. 정말로 먼 길이었다"며 "선수마다 걸어온 길이 다 다르겠지만, MLB 신인 드래프트에 지명됐을 때 '언젠가 한국에 가고 싶어'라고 생각했던 선수는 없을 것이다. 이날이 지나면 이제 나는 공식적으로 MLB에서 처음으로 서비스타임 하루를 채우게 된다"고 감격했다. 야후스포츠는 "누군가에게는 보잘 것 없을지 모르는 하루가 켈리에게는 얼마나 큰 의미인지, 그리고 그가 MLB에서 하루를 보내기까지 얼마나 먼 길을 걸어왔는지는 누구도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썼다.
켈리는 그해 4월 2일 샌디에이고와의 원정 경기에서 꿈에 그리던 빅리그 마운드 데뷔전도 치렀다. 6이닝 5피안타(1피홈런) 3실점으로 퀄리티 스타트에 성공하면서 빅리그 첫 승까지 신고했다. 스타트를 잘 끊은 그해 32경기에 선발 등판해 13승 14패, 평균자책점 4.42로 성공적인 첫 시즌을 보냈다. 현지에선 "켈리가 받는 연봉을 고려하면 최고의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 선수였다"는 평가가 쏟아졌다. 다만 이듬해인 2020년엔 예기치 못한 부상으로 이탈했다. 오른쪽 어깨 신경 충돌 증후군으로 부상자 명단에 올랐다가 복귀하지 못하고 그대로 시즌 아웃됐다. 첫 5경기에서 3승 2패, 평균자책점 2.59로 활약하면서 애리조나 선발진 중 가장 좋은 성적을 내던 참이라 더 아쉬운 결과였다. 그러나 애리조나는 그해 보장 계약이 끝난 켈리에게 425만 달러의 구단 옵션을 실행해 계약을 1년 연장했다. 부상 전 보여준 실력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몸값 이상의 활약을 해냈다고 판단한 것이다. 켈리는 2021년 다시 빅리그 마운드에 돌아와 기대에 부응했다. 팀 선발진이 연쇄 붕괴한 시즌이라 팀 내 1선발로 활약했다. 이닝(158이닝)과 경기 수(27경기) 모두 팀 내 선발 투수 중 가장 많았다. 타선 지원을 받지 못해 7승 11패(평균자책점 4.44)를 기록했다. 애리조나는 시즌 종료 후 다시 525만 달러의 계약 연장 옵션을 행사해 켈리를 붙잡았다.
켈리는 2+2년 계약의 마지막 해였던 지난 시즌 한 단계 더 도약했다. 33경기에서 200⅓이닝을 책임지면서 13승 8패, 평균자책점 3.37을 기록했다. 잭 갤런과 원투펀치를 이뤄 애리조나 마운드의 기둥으로 활약하면서 빅리그 데뷔 4년 만에 최고의 성적을 낸 것이다. 그 결과 2023시즌을 앞두고 애리조나와 다시 2+1년 계약에 성공했다. 2년간 1800만 달러를 보장 받고 2025시즌엔 애리조나가 700만 달러(바이아웃 100만 달러)의 구단 옵션을 실행할 수 있는 조건이다. 4년 전 애리조나와 계약할 때보다 나이는 네 살 더 많아졌는데, 보장금액은 세 배 뛰었다. 30대 중반인 켈리의 '상승세'에 시선이 쏠릴 수밖에 없다.
#매덕스에 비교되는 2023년
이뿐만 아니다. 켈리는 지난 시즌의 활약에 힘입어 지난 3월 2023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 출전한 미국 야구 대표팀 멤버로 뽑혔다. 스스로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이건 '아메리칸 드림'이다"라는 소감을 남기면서 감격했다. 또 쟁쟁한 빅리거들이 즐비한 미국 대표팀에서도 선발 한 자리를 꿰찬 뒤 일본과의 결승전 선발 투수로 나서는 영광도 누렸다. 비록 무라카미 무네타카에게 홈런을 맞는 등 1과 3분의 1이닝 2실점을 기록하고 패전 투수가 됐지만, '결승전 선발'이라는 상징적인 역할로 자신의 위상을 입증했다.
켈리의 올 시즌은 더 눈부시다. 14경기에서 83이닝을 소화하면서 8승 3패, 평균자책점 3.04를 기록하고 있다. 삼진 89개를 잡는 동안 볼넷은 34개만 내줬다. 이닝당 출루허용이 1.11이고, 피안타율은 0.198 밖에 안 된다. 여러 세부 지표에서 과거보다 더 좋은 성적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켈리가 내셔널리그 다승 레이스에서 선두권을 달리자 현지 언론도 더 자주, 더 크게 켈리를 언급하고 있다. 특히 켈리가 5월 29일 보스턴 레드삭스전에서 6⅓이닝 10탈삼진 1실점으로 활약하며 승리 투수가 되자 적장인 보스턴의 알렉스 코라 감독조차 감탄사를 내뱉었다. 켈리가 탈삼진 10개 중에 6개를 루킹 삼진으로 잡아냈기에 더 그랬다. 심지어 코라 감독은 MLB닷컴 등과의 인터뷰에서 켈리에 관한 질문을 받자 MLB 역사상 최고의 제구력 투수로 꼽히는 '제구의 마법사' 그레그 매덕스를 언급하기도 했다. 코라 감독은 "(켈리가 보여준) 그런 게 바로 '피칭'이다. 우리 팀도 좋은 타자들을 내보냈고 풀카운트까지 집중했지만, 켈리의 피칭에 당했다. 여러 변화구를 섞어 던지는데, 힘 있는 구종이 득세하는 요즘 시대에서 완벽한 제구력으로 (타자들을) 제압하고 있다"며 "마치 매덕스처럼 스트라이크존 구석구석을 이용해 원하는 코스로 던졌다. 홈플레이트를 살짝 벗어났다가 다시 돌아온다"며 극찬했다.
2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이역만리 한국에서 최선을 다해 커리어를 쌓아 올리고, 그 노력을 발판 삼아 세계 최고의 마운드에서 더 높이 도약한 켈리. 이제 MLB의 '전국구 에이스급' 투수가 된 그의 성공은 KBO리그의 또 다른 자랑거리가 됐다. 그와 여전히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 김광현을 포함해 SSG의 옛 동료들은 여전히 켈리에게 아낌없는 응원을 보내고 있다는 후문이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