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수들도 다 나와!” 오뉴월 서리주의보
“수표로 500만 원을 가지고 왔어…. 나도 돈이 있으면 그 돈을 안 받고 그냥 귓방망이를 한 대 올려붙이고 싶은데, 차마 그 돈을 안 받으면 안 되겠더라고. 어쩔 수 없이 받았어. 유미를 치료해야 되니까.”
삼성 백혈병 피해자 가족의 목 멘 절규의 한 대목이다. 환노위 소속 심상정 통합진보당 의원실에서 준비하고 있는 포스터에 담긴 문구이기도 하다. 심상정 의원은 삼성 백혈병 피해자 및 가족, 통합진보당 의원단 등과 함께 26일 국회에서 ‘삼성 백혈병 피해자’ 증언 대회를 열 계획이다. 이는 수년 넘게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삼성전자 반도체 백혈병 의혹 사건을 국회에서 공식적으로 다시 제기하는 ‘신호탄’이 될 것으로 보인다. 심상정 의원실 관계자는 “이번 국회에서 삼성 백혈병 문제를 비롯해 쌍용차 정리해고 사태, 현대차 비정규직 문제 등 굵직한 대기업 관련 사태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해 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지난해 6월 법원이 처음으로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근무하다 백혈병으로 숨진 노동자들에 대해 일부 산업재해를 인정하긴 했으나, 여전히 논란은 이어지고 있다. 당시 이건희 회장이 직접 대책 논의에 나섰을 만큼 그룹 내에서도 매우 민감한 현안이다. 그런데 19대 국회에서 환노위가 여소야대로 구성된 데다 대선을 앞두고 경제 민주화와 재벌개혁이 정치권의 최대 화두로 급부상한 상태여서 삼성을 포함한 대기업 관련 사건들이 정치권에서 뜨거운 공방을 벌이게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심상정 의원은 지난 6월 22일 현대차 울산 공장을 방문했을 때 현대자동차가 사내하청 한시도급 노동자 1500여 명의 계약을 해지한 것에 대해 현대차 정몽구 회장을 상대로 국정감사 출석을 요구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심상정 의원은 “노동부가 현실적인 방안을 내놓지 않을 경우 이채필 고용노동부 장관도 책임을 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는 이채필 고용노동부 장관이 최근 한 인터뷰에서 “쌍용차 정리해고와 삼성전자 산업재해 문제에 정치권이 직접 개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친재벌적’ 발언에 대한 ‘경고’인 셈이다.
역시 환노위 소속인 은수미 민주통합당 의원도 “삼성 백혈병(56명)과 쌍용차 문제(22명)로 돌아가신 분들이 78명이나 된다. 해당 기업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이는 국가가 나서야 하는 ‘사회적 문제’”라며 “이번에 해결하지 못하면 영영 해결하지 못할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이러한 야권의 드라이브에 새누리당 환노위원들의 스탠스는 사뭇 다르다. 삼성, 현대차 등 특정 대기업에 대한 공격에는 한발 물러서서 분위기를 살피고 있는 것. 새누리당의 한 환노위 소속 의원은 “기업총수를 부른다고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 않나. 지난해 한진중공업 사태에 대해 조남호 회장의 인사청문회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결된 것이 있었느냐”고 반문했다.
은수미 의원실 관계자는 “새누리당 의원들은 초선이라고 관련 사안에 대해 자료 조사가 덜 됐다, 파악할 시간을 달라는 식으로 안이한 모습이다. 피해당사자들 입장이라면 그렇게 하겠는가”라고 일갈했다. 그러나 대권에 가장 근접한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예비후보가 경제 민주화를 주요 공약으로 내세운 만큼 아직까지는 눈치를 보고 있는 새누리당 의원들도 재벌개혁에 동참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이러한 환노위의 움직임에 재계에서도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국회상임위 명단이 발표된 직후 “특히 일자리와 기업의 인력운용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고용·노동정책을 다루는 환노위의 주도권이 야권으로 넘어간 것에 대해 충격을 금할 수 없다”는 성명서를 내놓은 바 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정권에 따라 기업의 명운이 달라지기도 하기 때문에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다”고 털어놨다.
실제로 해당 기업들은 환노위 소속 의원들에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한 야권 의원실 보좌관은 “사전에 자사에 대한 공세 수위와 방향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기업 관계자들이 수시로 연락을 취해온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이미 야권 쪽에서는 “새누리당 쪽에서 삼성 특위는 안 받고 쌍용차만 받기로 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오기도 한다.
야권에서는 지난 13일 열린 환노위 첫 전체회의에서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문제와 삼성전자 백혈병 문제를 다룰 특별소위원회를 설치하자고 주장했고, 여권은 이에 유보적인 입장으로 맞대응하고 있는 상태. 19대 국회 개원과 함께 제일 먼저 재벌개혁의 깃발을 들어 올리며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환노위 야권 의원들의 공세가 어떤 결과를 내놓을까. 대선정국의 핫 이슈와 맞물리며 정·재계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조성아 기자 lilychic@ilyo.co.kr
▲ 재벌개혁에 앞장선 환노위 심상정 의원(왼쪽)과 은수미 의원. 초선인 은 의원은 ‘겁 없는 신인’으로 특히 주목을 받고 있다. 연합뉴스 |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야권 의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재계가 긴장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환노위에서만 8년을 활동해온 4선의 민주통합당 신계륜 의원이 상임위원장으로 선정된 데 이어 홍영표 의원이 18대에 이어 19대에서도 민주통합당 간사를 맡았다. 여기에 은수미 한정애 김경협 장하나, 네 초선 의원이 포진하며 ‘겁 없는 신인’의 공세를 보여줄 기세다.
한명숙 전 민주통합당 대표와 통합진보당 심상정 의원의 가세도 눈길을 끈다. 민주통합당과 새누리당 환노위 소속 의원들이 각 7명씩 배정된 데 이어 통합진보당 심상정 의원은 뒤늦게 환노위에 가세하면서 여소야대의 환노위가 구성되게 됐다. 이미 지난 6월 25일 심상정 은수미 의원이 주도해 ‘쌍용자동차 문제해결을 위한 국회의원 모임’을 발족하기도 했다.
특히 ‘이건희든, 정몽구든 국감장에 부를 수 있다’며 단단히 벼르는 은수미 의원이 뜨거운 주목을 받고 있다.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 사건으로 복역한 바 있는 은 의원은 ‘제2의 심상정’이라는 평을 듣고 있기도 하다. 만약 이들이 19대 국회에서 대기업 총수와의 ‘날선 공방’을 벌인다면, 과거 정주영 현대그룹을 회장에 대한 질타로 ‘청문회 스타’로 급부상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처럼 ‘제2의 청문회 스타’로 급부상할 수도 있다는 전망이다.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