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연이자·소송비용 탓 론스타 취소 소송도 아직…박근혜 이재용 등에 구상권 청구할지 주목
6월 20일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 중재판정부는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5358만 달러(690억 원)를 배상하라”고 최종 판정했다. 여기에 2015년 7월 16일부터 판정일까지 5% 연복리의 지연이자, 법률비용 2890만 달러(373억 원) 지급을 명했다. 엘리엇이 밝힌 한국 정부의 배상 총액은 1억 850만 달러(1397억 원)에 달한다. 다만 엘리엇도 한국 정부에 법률비용 3457만 달러(45억 원)를 지급해야 한다.
이번 판정은 5년 2개월여 만에 나왔다. 2018년 7월 엘리엇은 한국 정부를 상대로 ISDS를 청구했다. 국민연금이 삼성물산-제일모직 간 합병에 찬성했고, 그 결과 삼성물산 주식 가치가 하락해 엘리엇이 손해를 입었다는 주장이 골자다.
법무부에 따르면 PCA 중재판정부는 △국민연금은 사실상의 국가기관 △복지부 관계자 등이 국민연금의 합병표결에 개입한 행위는 협정상 국가 책임의 근거가 되는 ‘조치’ △국민연금의 표결과 삼성물산 주주의 손실 사이 인과관계가 성립 등 사실관계를 인정했다.
엘리엇은 다음날 “대한민국이 결과에 승복하고 배상 명령을 이행하기 바란다”며 “이번 사건은 아시아에서 주주행동주의 전략을 취하는 투자회사가 투자 대상국의 최고위층으로부터 기인한 부패한 범죄행위에 대해 국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최초의 투자자-국가 분쟁 사례다. 중재판정에 불복해 근거 없는 법적 절차를 계속 밟아나가는 것은 추가적인 소송비용 및 이자를 발생시켜 대한민국 국민의 부담만 가중시키게 될 것”이라고 입장문을 배포했다.
국가가 당사자가 되는 소송은 법무부 장관이 대표가 돼 승인·지휘한다. 그러다 보니 한동훈 법무부 장관의 판단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하지만 한 법무부 장관은 엘리엇 중재판정에 대해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한 장관은 같은 날 국회에서 기자들과 만나 “지금 저희가 결정문을 상세히 분석하고 있고 그 이후 어떤 추가적 조치를 할지 숙고한 다음 책임 있는 답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다”고 말을 아꼈다. 법무부도 판정 사흘 뒤인 6월 23일에서야 입장문을 내 “국민의 세금이 불필요하게 지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정부대리 로펌 및 전문가와 함께 판정 내용을 면밀히 분석해 대응하겠다”고 원론적 입장만을 냈다.
이는 한동훈 장관이 지난해 8월 ‘론스타 사건’ 중재판정 선고 당일 “판정을 수용하기 어렵다”고 즉각 반발하며 취소 신청을 예고한 것과 대조된다. 이어 한 장관은 지난해 9월 1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종합정책질의에서 론스타 사건 중재판정에 대한 취소 신청 검토와 관련해 “소수의견이 우리 정부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만 봐도 절차 내에서 끝까지 다퉈볼 만하다”며 “내부적인 판단으로는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말했다. 다만 한동훈 장관의 호언장담과 달리 법무부는 ‘론스타 사건’에 대한 취소 소송도 약 10개월이 지난 현재까지 제기하지 않았다.
한동훈 장관이 취소 소송을 망설이는 이유는 한국 정부의 이의신청이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낮을 뿐만 아니라, 다시 패소하면 지연이자와 소송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혈세’ 부담만 가중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는 사전에 엘리엇과 합의한 대로 취소 소송 시 영국 법원의 판단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앞서 2018년 한국 정부는 이란 다야니 가문과 ISDS에서 패소한 뒤 영국 법원에 취소 소송을 했으나 1년 만에 기각된 바 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국제통상위원장을 지낸 송기호 변호사는 지난해 9월 일요신문 인터뷰에서 “(론스타 중재 판정에 대한) 판정무효 신청이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판정무효 신청이 받아들여진다고 해도 한국 정부 책임이 없다고 나오는 것이 아니다. 론스타와 새로운 국제 소송이 시작될 뿐이다. 한동훈 장관 발언은 설득력이 없다. 소수의견을 낸 중재인도 한국에서 지명한 인사”라고 지적했다(관련기사 [인터뷰] ‘론스타 저격수’ 송기호 변호사 “판정무효 가능성, 제로에 가깝다”).
허난이 법무법인 광장 국제통상연구원도 6월 27일 ‘2023년 국정 현안 대응 형사·법무정책 학술대회’에서 “여전히 약 2800억 원을 배상해야 하는 상황이라 법무부가 취소 신청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며 “그러나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 협약의 5가지 취소 신청 사유 중 론스타 사건이 어디에 해당하는지 불분명해서 취소될 가능성은 매우 적다. 만약 취소 신청이 인용돼도 기존 중재판정 자체가 없어지게 되는데, 그러면 론스타가 새로운 중재판정부에 다시 중재를 요청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엘리엇이 ‘윤석열-한동훈의 검찰 수사로 입증됐다’고 콕 집어 언급한 것도 한 장관에겐 부담되는 지점이다. 엘리엇은 앞서 입장문에서 “이번 중재판정을 통해 정부 관료와 재벌 간의 유착 관계로 인해 소수 주주들이 손실을 입었다는 사실이 재차 확인됐다”며 “이는 사실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검찰 재직 당시 수사 및 형사 절차를 통해 이미 입증했다. 현 정부가 이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계속해서 부패와 싸워나가기를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실제 중재판정부는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과 홍완선 전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의 형사사건 징역형 판결을 판단 근거로 했다.
취소 소송 등 대응이 쉽지 않다 보니, 한동훈 장관의 법무부가 엘리엇 소송의 핵심 인물들에 구상권을 청구할 수 있을지 관심이 모아진다. 참여연대는 6월 26일 “이번 사태에 책임이 있는 박근혜 전 대통령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문형표 전 장관, 홍완선 전 본부장 등에 대해서도 책임을 물어야 한다. 구상권 청구나 손해배상청구 등의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김성훈 변호사 역시 6월 24일 ‘YTN 뉴스와이드’에서 구상권 청구에 대해 “법리적으로는 지금 이 내용대로 확정된다면 가능하다. 문형표 전 장관이 합병 조건에 대해 찬성하도록 지시한 이 행위가 이번에 원인이 됐다고 한다. 확정된 판결에 따르면 이재용 회장이 박근혜 전 대통령한테 뇌물을 주며 합병에 도움을 달라고 했고, 그것이 원인이 돼서 이런 국가 행위가 벌어졌다. 바로 이 국가 행위로 인해서 국가가 손해배상 책임을 지게 됐다면 적어도 이 과정에 있어서 피해를 본 주주들에 대해서는 이 모두는 공동불법행위자로서 책임을 질 수가 있다”고 분석했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한동훈 장관은 평소 강조하는 ‘정의’ ‘상식’에 부합하려면 배상금을 혈세로 지출해서는 안 되고, 엘리엇 소송 책임이 있는 박근혜 전 대통령, 이재용 회장에게 구상권을 청구해야 한다. 론스타 사건 역시 당시 책임자들을 밝혀내 구상 책임을 물어야 한다”며 “하지만 한동훈 장관은 차기 총선 출마 등 정치권 진출이 거의 확실해 보인다. 그런데 법무부 수장으로서 박 전 대통령이나 이 회장에 구상권을 청구하면 보수진영이나 재벌을 적으로 돌리는 행위다. 정의를 강조하는 한동훈 장관이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꼬집었다.
이와 관련해 법무부 관계자는 구상권 청구에 대해 말을 아끼며 보도자료를 참고해달라고만 밝혔다.
한편 법무부 판단은 현재 남은 ISDS 5건에도 영향을 끼칠 전망이다. 이 중 2018년 9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으로 인해 2억 달러(약 2700억 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한 미국계 사모펀드 메이슨과의 ISDS 결과도 조만간 나올 전망이다. 엘리엇 ISDS와 쟁점이 유사한 만큼 한국 정부가 또 패소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법무부는 취소 소송에 나설 경우 한미 FTA가 규정한 국가적 ‘조치’ 행위가 없었다는 논리를 펼칠 것으로 보인다. 국민연금이 독립적으로 의결권을 행사한 것이지, 한국 정부의 ‘조치’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허일권 기자 oneboo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