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CGI “김준기 퇴사해야” vs DB “수천억 사재로 사업 성공시킨 주역” 이견 팽팽…주총 표 대결로 갈 수도
KCGI는 지난 3월 30일 유한회사 캐로피홀딩스를 통해 DB하이텍 주식 312만 8300주를 매수해 지분 7.05%를 확보했다. 당시 KCGI는 DB하이텍의 지배구조 개선과 기업가치 제고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주장은 행동으로 이어졌다. KCGI는 4월 20일 DB하이텍에 1차 주주협의를 요청했다. DB하이텍은 일주일 뒤 일정을 전하기 전에 논의 안건을 구체적으로 제시해달라고 요청했다. KCGI는 5월 4일 DB하이텍이 요청한 안건들을 제시했다. 하지만 DB하이텍 측은 자료가 준비되면 일정을 논의하자며 협의를 연기했다.
KCGI는 결국 DB하이텍에 보냈던 주주서한을 공개하는 선택을 했다. KCGI는 지난 6월 1일 “DB하이텍의 지배주주 및 경영진이 주주와의 소통 및 주주가치 제고에 대한 의지가 있는지 강한 의문을 품게 됐다. KCGI는 DB하이텍이 거버넌스 이슈로 인해 기업가치가 계속해서 하락하는 현실을 두고 볼 수 없어 주주서한 공개를 결정했다”고 전했다.
KCGI가 공개한 주주서한에 따르면 DB하이텍은 수년간 연구개발(R&D) 축적으로 확보한 파운드리 기술경쟁력을 바탕으로 세계 시장에서 10위권 내에 자리한 글로벌 파운드리 업체임에도 △지배주주의 사적이익 추구 △불투명한 경영 및 내부통제 미비 △무시되고 있는 주주 권익 등 때문에 저평가되고 있다.
이에 따라 KCGI는 “주주를 위한 독립적인 이사회를 구성하여 내부통제 장치를 갖추고 주주 권익을 보호해야 한다. 사외이사를 이사회 의장으로 선임하고, 기업이미지를 실추시킨 김준기 창업회장은 퇴사해야 한다. 또 김남호 회장은 비상근 미등기임원으로 재직 중임에도 사실상 DB하이텍의 경영의사결정권자이므로 등기이사로 재직시켜 책임을 부담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외에도 KCGI는 일반주주의 피해가 예상되는 사안에 대해서는 지배주주가 제외된 일반주주들만 표결(Majority Of Minority, MoM)해야 하며, 일반주주의 주주권 보장을 위한 집중투표제를 도입하고 자사주는 매입 즉시 소각을 의무화하는 등 주주 권익 증진을 위한 방안도 제안했다.
DB하이텍은 KCGI가 주주서한을 공개하자 반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KCGI는 “DB하이텍 측이 답변을 보냈으나 구태의연한 경영행태에 대한 형식적인 변명이었다. 주요 사항에 대한 응답은 회피했다. DB하이텍 경영진은 주주와 소통에 여전히 소극적이었다. 무언가를 감추거나 숨기려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KCGI는 DB하이텍 측을 상대로 회계장부 열람 및 이사회의사록 열람등사 가처분 신청을 제기했다. 자료 은닉 및 폐기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한 조치다. 그러면서 향후 주주권 보호를 위해서는 어떠한 형태의 법적 대응도 불사할 것이라고 강하게 압박했다.
이에 대해 DB하이텍은 다소 당황스럽다는 입장을 보인다. DB하이텍 관계자는 “우리가 보낸 답변에 KCGI는 기쁘게 생각한다며 일정에 대해 논의하자고 연락했는데 같은 날 가처분 신청이 제기됐다”고 전했다. 재계 한 관계자는 “행동주의펀드답게 정정당당하게 얘기하고 행동했으면 좋았을 텐데 앞뒤가 다른 행보는 안타깝다. 워낙 KCGI가 이슈 메이킹에 능하기 때문에 DB하이텍이 대처를 잘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DB하이텍은 KCGI와 6월 말쯤 첫 만남을 가졌다. 업계에 따르면 KCGI는 앞서의 주주서한에 담긴 내용들을 DB하이텍에 요구했다. DB하이텍은 독립적인 이사회 구성에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김준기 창업회장 사퇴 문제 등에 대해선 반대 입장을 내놨다. DB하이텍 관계자는 “주요 주주인 만큼 앞으로 성의를 가지고 대화를 이어 나갈 것”이라면서도 “김준기 창업회장은 국내 최초로 파운드리 사업에 도전해 3000억 원이 넘는 사재까지 출연하며 이 사업을 성공시킨 주역”이라며 창업회장 퇴진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전했다.
업계에서는 둘 간의 경영권 다툼이 불가피하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KCGI는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지분을 추가로 매입해 정기 및 임시 주주총회에서 표 대결도 불사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KCGI가 지분을 추가 매입해도 DB그룹 지분을 넘어설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DB그룹 우호 지분은 17.88% 정도다. 여기에 자사주가 2.35% 정도 존재한다. DB하이텍은 자사주 대부분을 임직원에게 교부하는 데 사용하고 있다. 자사주까지 임직원들에게 교부될 경우 DB하이텍의 의결권이 생기는 지분은 20.23%로 늘어난다. 주식 수로는 898만 921주다. KCGI와 차이는 585만 2621주다. 단순 계산으로 KCGI는 지난 12일 종가 기준 약 3581억 원이 필요하다. 다만 KCGI가 주식 추가 매입으로 주가 상승을 노릴 가능성은 충분하다.
DB하이텍도 대비 태세를 갖추고 있다. DB하이텍은 가처분 신청에 대응하기 위해 김앤장 법률사무소를 소송대리인으로 선임했다. 김앤장은 2018년 한진그룹이 KCGI와 경영권 분쟁 당시에도 참여한 바 있다. 지난 6월에는 투자유치설명회(IR)를 열기도 했다. DB하이텍이 공시를 통해 IR 행사를 진행하는 건 1997년 창립 이래 처음이다. 이를 위해 삼성증권을 자문사로 선정했다. 삼성증권도 한진그룹 자문 증권사로 활동했다.
DB하이텍과 KCGI 간 2차 협의 일정은 아직 계획된 게 없다. 그러나 협상이 장기화할 경우 양측 모두 피해가 불가피하다. 반도체업계 한 관계자는 “글로벌 경기침체 장기화와 미·중 반도체 패권 경쟁의 심화로 반도체 불황이 날로 심각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경영권 분쟁은 회사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관측했다.
박찬웅 기자 roone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