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소비자원 조정 거부 다발기업 1위 ‘오명’…“강제력 없다는 점 노린 것 아니냐” 지적
한국소비자원 소비자분쟁조정위원회의 '분쟁조정'은 소비자들이 사법적 절차를 밟기 전에 할 수 있는 분쟁해결 방법이다. 소비자가 피해구제를 요청하면 한국소비자원에서 사실조사와 전문가 자문 등을 거쳐 먼저 합의를 권고하고 당사자들이 합의를 거부하면 소비자분쟁조정위원회의 분쟁조정 절차로 넘어간다. 한국소비자원에 따르면 2020년부터 지난해까지 3년간 접수된 소비자분쟁조정 신청은 연평균 4729건으로 2017~2019년에 비해 52% 늘었다.
분쟁조정이 진행된다고 해서 소비자의 피해가 구제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한국소비자원이 기업에 “소비자에 배상하라”는 결정을 내린다 해도 소비자가 피해구제를 받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의견이 많다. 분쟁조정 결정에 강제력이 없기 때문이다. 지난해 10월 강민국 국민의힘 의원실이 한국소비자원에서 받은 ‘소비자분쟁조정위원회 분쟁조정 결정 현황’에 따르면 기업이 분쟁조정 결정을 거부하는 경우가 90%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최근에는 대한항공의 분쟁조정 거부 사례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대한항공은 지난해 10월 뉴욕-인천 구간 항공편 장시간 지연에 대해 ‘소비자에게 배상하라’는 한국소비자원의 결정을 거부한 것으로 확인됐다.
논란은 지난해 10월 11일 대한항공의 뉴욕 존F.케네디-인천 구간 항공편이 21시간 35분 지연되면서 시작됐다. 당시 뉴욕시간으로 낮 12시 45분부터 보딩(게이트가 열리고 비행기로 들어가는 과정) 시작이었지만 오후 2시까지 항공기 탑승은 이뤄지지 않았다. 대한항공 측은 오후 2시까지 지연 사유에 대한 설명을 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승객들은 오후 2시가 넘은 뒤 항공기에 탑승했지만 오후 4시쯤 비행기에서 다시 내려야 한다는 안내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현장에 있던 승객들은 분통을 터트렸다. 특히 승객들은 대한항공 관계자들이 지연 사유를 시간이 많이 지난 뒤에 말하고 지연 사유에 대해서도 모두 다르게 말하는 등 분위기가 어수선했으며 ‘기다리기 힘든 사람은 알아서 호텔 잡고 추후 우버 영수증과 호텔 영수증 제출하라’는 안내에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고 주장했다. 일부 승객들끼리 “단체 대화방을 만들어 대한항공에 대응하자”는 이야기도 오고간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승객 A 씨는 지난해 10월 말 한국소비자원에 피해구제를 요청했다. 소비자분쟁조정위원회는 지난 5월 31일 “이 사건 왕복 항공 운임 205만 1100원/2 x 30%(조정비율)에 따라 대한항공이 분쟁조정 신청 승객에게 30만 7665원을 배상하라”고 결정했다. 하지만 대한항공은 이 결정을 거부했다.
공정거래위원회 고시 소비자분쟁해결기준에 따르면 항공(국제여객 기준) 12시간 초과 운송지연 발생시 지연된 해당 구간 운임의 30%를 배상할 것이 권고된다. 다만 국토교통부에서 정하고 있는 항공기 점검을 했거나 기상사정, 공항사정, 항공기 접속관계, 안정운항을 위한 예견하지 못한 조치 등을 증명한 경우에는 제외된다. 불가항력적 사유로 결항하거나 지연됐음을 항공사가 입증하지 못하면 배상 책임을 져야 한다.
소비자분쟁조정위원회는 결정문에서 ‘피신청인(대한항공)은 이 사건 항공편의 운항정보확인서만 제출했고 해당 확인서에는 지연 사유가 정비로 기재돼 있는데, 운항정보확인서만으로 피신청인이 합리적으로 요구되는 정비의무를 다하여도 이 사건을 피할 수 없었다고 인정하기에는 부족하고, 달리 이를 인정할 증거가 없다. 따라서 피고의 면책 주장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했다.
A 씨는 “(한국소비자원) 담당자 통해 대한항공이 정비사유가 확실하다는 증명서를 안 줬다고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급한 일정이 생겨서 한국으로 가는 비행 날짜를 이틀 당겼는데 지연되면서 일정을 소화하지 못했다”며 “대한항공에선 지연에 대해 증명을 제대로 안하고 배상은 거부하고 이에 불만 있으면 개인적으로 소송을 거는 것밖에 없다는데 개인이 기업을 상대로 소송하는 게 쉽나”라고 하소연했다.
대한항공 측은 신청인(소비자)이 제출한 서류만 가지고 소비자분쟁조정위원회에서 배상하라는 판단을 내렸다는 입장을 보인다. 대한항공 관계자는 “불가항력적 사유로 지연된 것에 대해 증명하고 싶었는데 (배상하라는) 결정문을 받고 (내용을) 알았다”며 “조정 결정문에 정비 사유 때문에 지연됐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국소비자원 관계자는 “소비자로부터 피해구제 신청이 들어오면 (한국소비자원에서) 사업체에 증빙자료를 제출하라고 전한다. 또 소비자분쟁조정위원회에 올라가도 사업체와 소비자 두 당사자에게 통보하게 돼 있다”며 “(사업체가) 내용을 인지할 수밖에 없고, 이 과정에서 담당자가 통화하면서 자료 요구를 계속한다”고 반박했다.
법조계에선 대한항공 측이 분쟁조정에서 거부 행사를 해 소비자가 직접 소송 절차를 밟아야 하는 것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로펌고우의 고윤기 변호사는 “한국소비자원 조정안에 대해 (대한항공이) 인정하지 않으면 (소비자가) 법원에서 소송 절차를 밟고 배상 판단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대한항공이 배상에 대해 강제력이 없다는 걸 알고 거부권 행사만 한 채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것 아니냐고 지적이 나온다. 대한항공은 이미 분쟁조정 다발기업 1위로 꼽힌 바 있다. 2019년 10월 전재수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한국소비자원에서 받은 ‘최근 5년간 소비자분쟁 현황’ 자료에 따르면 대한항공은 당시 조정거부 다발기업 1위를 기록했다. 소비자 조정 신청 내용을 보면 △정비 △항공기 기체 결함 △항공사의 일방적인 운항일정 취소 및 변경에 따른 손해배상 등이 주를 이뤘다. 전 의원은 해당 자료 공개 후 “물컵 갑질 논란이 있었던 2018년 대한항공은 안에선 직원 갑질, 밖에선 소비자 갑질을 일삼았다”며 “조정 결정에도 피해를 보상받지 못하는 억울한 소비자들을 위해 제도 보완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거부권을 행사할 수는 있지만 이를 지속적으로 행사하는 것은 소비자 권리를 존중하지 않는 것이라고 질타했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공신력 있는 공공기관에서 소비자분쟁조정위원회를 열고 (피해구제 여부를) 판단한 건데 (대한항공이) 번번이 거부권을 행사하는 건 소비자의 권리를 존중한다고 보긴 어렵다”고 강조했다.
정소영 기자 upjs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