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정 없이 맨얼굴로 첫 장르물 도전…“외모만으로 끝나고 싶지 않아, 중요한 건 노력이죠”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마스크걸’의 출연진 크레딧에 그의 이름이 올랐을 때 놀람은 세 번 이어졌다. 원작자가 한 번, 대중들이 한 번, 그리고 그 자신이 한 번. 이런 작품의 출연 제의가 올 것이라곤 데뷔 이래로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는 배우 고현정(52)은 놀라움에 이어 곧바로 “나는 운이 좋구나”라는 생각을 했다고 덧붙였다.
“쉰 살이 넘으니 인생에서 운이 8~9할을 차지한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더라고요. 이번에 ‘마스크걸’을 하게 된 것도 저는 운이 참 좋았던 거예요. 제가 개인적인 취향이나 생활을 보여드린 적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제가 뭘 좋아하는지, 여가시간엔 뭘 하는지 모르시니까 저에겐 이런 장르물 제안이 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어요. 제가 장르물을 좋아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으니까요. 그랬는데 이 작품이 들어왔을 땐 정말 너무 반가운 거예요. 난 정말 운이 좋다, 내가 이런 장르물을 할 수 있게 되는 날이 오는구나(웃음)! 이렇게 제가 특화된 역할로 소비되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지를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도 제가 운이 좋아서 그런 것 같아요(웃음).”
외모 콤플렉스를 가진 평범한 직장인 김모미가 밤마다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인터넷 방송 BJ로 활동하던 중 의도치 않은 사건에 휘말리며 겪는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그린 ‘마스크걸’은 총 세 명의 여배우가 김모미라는 한 캐릭터를 연기한다. 외모 콤플렉스에 시달리며 인터넷 방송으로 애정 결핍을 채우려다 살인 사건을 저지르게 된 20대의 김모미를 신인 배우 이한별이,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몸부림치지만 자신에게 복수하려는 이로부터 도망치려다 또 다른 살인에 휘말린 ‘성형 후’ 김모미는 나나가, 그리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교도소에 수감됐다가 10년여 전에 낳은 딸에게 닥친 위험을 눈치 채고 탈옥하는 중년의 김모미를 고현정이 연기했다. 3인 1역이라는 다소 생소한 콘셉트를 두고 한 명의 배우가 특수 분장을 하며 연기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는 우려도 있었지만, 공개된 ‘마스크걸’을 본 시청자들은 세 배우의 각기 다른 매력이 김모미란 캐릭터가 가진 하나의 인생을 완성한다는 데에 큰 호평을 쏟아냈다.
“저도 모미를 배우 세 명이 연기한다는 게 정말 좋았어요. 제가 이제 50대인데 살다 보면 나는 나 자신으로 계속 살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변했다는 생각을 잘 안 하잖아요? 그런데 10대 때 봤던 친구를 40대에 우연히 보게 되면 너무 다르게 느껴질 때가 있는 거예요. 그걸 보면서 저 역시도 누군가에겐 그렇게 비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40대의 모미를 연기한다는 게 부담스럽지 않았어요. 오히려 그게 훨씬 더 사실적인 구성이기 때문에 좀 더 현실감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싶었죠.”
세 명의 다른 배우들이 모두 똑같이 가져간 김모미의 캐릭터성 가운데 하나는 그가 ‘막무가내’라는 점이었다. 결핍된 애정을 채우기 위해 전신 성형을 감행하거나, 만난 지 그다지 오래 되지 않은 친구를 위해 두 번째 살인을 불사하거나, 교도소에서 살아남기 위해 몇 번이고 독방에 갇히면서도 독종같이 상대를 공격하며 결국 승리를 거머쥐거나. 고현정은 이런 김모미를 “똘기가 있다”며 혀를 내두르면서도 바로 그런 면모가 김모미가 가진 모성을 불완전하게 보이도록 한다고 설명했다.
“모미는 딸인 미모가 자라난 모습을 교도소 탈옥한 뒤 그 동굴 안에서 처음 보게 되죠. 원래 신에서는 모미의 대사도 있었고, 둘이 서로 눈을 좀 더 길게 마주치게 해볼까 하는 의논도 있었는데 전 ‘모미라면 그럴 수 없겠다’싶더라고요. 모미는 가끔 ‘쟤 또라이 아냐? 좀 미친 거 아냐?’ 할 모습이 등장하잖아요(웃음). 그런 면모가 있는 캐릭터가 다 큰 자기 딸을 봤을 때 실감이 바로 들까요? 모미는 염치가 없는 캐릭터이기 때문에 그 상황에서 내 감성, 모성 같은 것에 빠지기 전에 미모를 빨리 구하자는 생각만 했을 거예요.”
그러면서 김모미가 첫 번째로 살해한 주오남(안재홍 분)의 어머니이자 김모미와 대척점에 서 있는 김경자(염혜란 분)의 모성에 대해서는 “잘된 모성인지는 모르지만 명분이 있는 모성”이라고 분석했다. 아들을 사랑했기에, 혹은 아들을 사랑했다고 ‘믿었기에’ 거침없이 복수를 향해 달려갈 수 있는 그의 모성을 김모미가 부러워했을 것이라는 게 고현정의 이야기다.
“김경자에겐 명분이 있어요. ‘내가 이런 행위를 하는 것에 하나님 외엔 어떤 누구의 심판도 받고 싶지 않다!’란 생각으로 분기탱천해서 행동하기 때문에 거침도 없죠. 처리했다고 생각했는데 자꾸만 다시 등장하는 김경자를 보며 모미는 ‘그만했으면 좋겠는데, 뭐가 그렇게 분하냐’ 하면서도 속으론 그런 경자의 모성이 부럽기도 했을 것 같아요. 저는 모미가 딸을 구하는 그 신을 찍을 때 모성과 함께 부성을 느꼈거든요. 제 생각에 그런 상황에서 부성은 ‘지키는 것’에 초점을, 모성은 ‘내 아이가 괜찮나? 맞지는 않았나?’ 하고 살피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런 의미에서 모성보단 부성이 조금 더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모성은 자연스럽게 있을 수 있는 거지만 모미는 그런 걸 표현하기엔 좀 염치가 없으니까, 모성과 부성의 가운데 지점에 있었을 것 같아요.”
현장에서 김경자 역 배우 염혜란과 직접 맞붙으며 그의 연기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고현정은 현장 밖에서야 완성된 작품을 통해 볼 수 있었던 김경자의 아들, 주오남 역 배우 안재홍을 봤을 땐 단 한 마디만 머릿속에 떠올랐다고 했다. “내가 졌다.” 성형 전 김모미를 유일하면서도 잘못된 방식으로 사랑했다가 결국 김모미의 손에 살해된 첫 번째 희생자인 주오남은 인기 없는 ‘오타쿠 남성’이 가진 모든 단점을 한데 뭉쳐서 만든 것 같은 캐릭터다. 작품이 공개된 뒤 안재홍의 미친(?) 연기력까지 합쳐지면서 “안재홍 이것만 찍고 은퇴하려고 하냐”는 호평 아닌 호평을 받아낸 주오남을 보며 고현정 역시 알 수 없는 패배감과 함께 그 열연에 존경심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고.
“주오남이 모미를 보며 ‘아이시떼루!’(일본어로 사랑한다는 뜻)를 외치는 걸 보자마자 ‘이건 진짜다…’ 싶었다니까요(웃음). 자고로 새로운 역할을 맡아 연기한다는 건 저런 걸 말하는 건데 ‘난 대체 뭐 했지? 오히려 난 너무 덜하지 않았나, 특수 분장도 좀 하고 그럴걸’ 하면서 반성하게 되더라고요. 안재홍 씨는 또 저희 작품의 초반에 나오잖아요. 그 모습을 보며 ‘아, 끝났다… 난 진짜 너무 안했다’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저도 피 분장이며 차와 부딪치는 것이며 다 했는데 안재홍 씨는 그런 건 기본으로 이미 다 하신 상태에서 더 하신 거잖아요(웃음). ‘내가 졌다, 밀렸다, 정말 배우고 싶다, 나는 한참 멀었다’하면서 좋은 자극을 받았어요.”
그렇게 말하지만 실제로 고현정 역시 ‘마스크걸’의 후반부를 책임지며 먼지구덩이에서 구르고, 보정 하나 없이 초췌하고 피곤해 보이는 맨얼굴을 드러내며 열연해 대중들을 또 한 번 놀라게 했다. ‘미스코리아 출신’이란 이름표가 달린 배우답게 늘 변함없는 아름다움으로 익숙했기에 외모에 좀 더 중점을 둘 것이란 선입견 탓이었다. “사람들이 이제까지 예쁘다고 계속 말해주니까 ‘내가 진짜 예쁘긴 한가?’ 싶긴 했다”며 웃음을 터뜨린 고현정은 자신 역시 한번쯤 ‘얼태기’(얼굴에 대한 권태기)를 겪어본 적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외모로 시작했지만 ‘외모만으로’ 끝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계속해서 ‘배우 고현정’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된 셈이었다.
“옛날엔 저도 제 얼굴이 괜찮은 줄 알았거든요(웃음). 중간에 한 번 제가 그렇게 모질게 연예계를 떠났었던 것에 비해 다시 나왔을 때 많은 분들이 따뜻하게 맞아주셨을 땐 정말 외모 덕인가 싶었어요. 하지만 제게 있어서 외모는 그냥 모든 사람들이 가진 외모의 의미와 별로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옛날엔 외모가 다인 줄 알았는데 나이 먹고 보니 내가 실질적으로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간절히 바라는 게 있는지 이런 것들이 더 중요한 것이란 생각이 들어요. 물론 외모는 많은 도움이 되죠(웃음)! 짚고 넘어가자면 고현정에게 외모는 처음이자 끝인 건 맞아요. 하지만 외모만 덜렁 있지 않으려고, 그런 빈껍데기가 되지 않으려고 그동안 노력해왔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