씩씩하고 털털한 여고생 초능력자 장희수 역…“나와 닮은 캐릭터 만나서 행운”
“‘무빙’ 오디션은 현장에서 지정된 대본을 읽는 식으로 진행됐어요. 저는 사실 즉석 대본 리딩을 잘 못하는 편인데, 희수는 처음 봤는데도 저와 성격과 말투가 너무 비슷해서 낯설지도 않고 그냥 막힘없이 술술 읽히더라고요. 대본 속 희수의 여러 신들을 읽으며 ‘내가 했으면 좋겠다, 나 합격했으면 좋겠다, 진짜 잘할 수 있는데…’ 속으로 그랬죠. 그런데 정말 제가 된 거예요(웃음).”
초능력을 숨긴 채 현재를 살아가는 아이들과 아픈 비밀을 감춘 채 과거를 살아온 부모들의 이야기를 그린 디즈니+ 휴먼 액션 시리즈 ‘무빙’에서 고윤정은 치킨집을 운영하는 아버지이자 전직 국정원 특수요원 장주원(류승룡 분)의 딸 장희수를 연기한다. 아버지의 초재생능력을 그대로 물려받은 그는 이전 학교에서 일진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는 친구를 도와주려다 폭력 사태를 일으켜 사실상 퇴학을 당한 뒤 정원고로 전학 오게 된다. 다소 무뚝뚝하고 살갑진 않지만 홀로 외동딸을 키우는 아버지를 위하는 마음은 극진하고, 곤경에 처한 친구에겐 먼저 손을 내밀 줄 아는 ‘의리파’의 면모가 돋보이는 독특한 여성 캐릭터로 방영 초반 시청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기도 했다.
“작품에서 저와 정말 성격이 똑같은 캐릭터를 한 번 만나보고 싶단 생각을 했었는데 희수를 딱 만난 거예요. ‘재미있겠다!’ 이 생각이 제일 먼저 들더라고요. 극 중 희수와 저는 말투가 가장 비슷해요. 제가 연구한 희수의 모습이 담겨있기도 하고요. 낯간지러운 말을 잘못하는 것도 실제 저랑 비슷하고, 감정표현이나 고통에 좀 무딘 것도 닮은 것 같아요. 저도 희수만큼은 아니지만 어디 다쳐있어도 잘 모르기도 하고, 배 아파서 병원에 갔다가 ‘왜 이제 왔냐’고 혼날 만큼 고통에 둔감하기도 하거든요(웃음). 씩씩하고 털털한 모습이 저와 많이 닮았는데, 그래서 아마 강풀 작가님이 ‘윤정이 네 목소리랑 말투가 희수랑 닮은 것 같아’하고 말씀해주셨던 것 같아요. 또 옆에 봉석이란 캐릭터가 있어서 상대적으로 더 털털해 보이는 것도 있고요(웃음).”
그런 희수를 연기하면서 제일 기억에 남는 장면을 꼽아본다면 역시 ‘17 대 1 사건’이다. 일진에게 지독한 괴롭힘을 당하던 친구를 대학 입시를 앞둔 고등학생 신분이란 이유로 못 본 척하려다 결국 폭발해 17명의 일진들을 맨손으로 상대한 사건이었다. 캐릭터 장희수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초능력을 처음으로 제대로 자각한 터닝포인트이기도 했고, 배우 고윤정에게는 여성 배우로서는 쉽게 경험할 수 없는 신을 주도할 수 있었던 흔치 않은 기회로 기억에 남는 신이었다고 했다.
“17 대 1 싸움 멋있죠. 어디 나가서 ‘나 17 대 1로 싸운 신 찍었던 사람이야!’ 이럴 수도 있고(웃음). 사실 이런 게 남자들의 로망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여성 캐릭터에겐 그런 설정을 쉽게 주지 않았을 것 같아요. 그래서 더 영광인 것도 있고, 고교 액션물을 찍은 것은 아니지만 ‘17 대 1 전설’이란 타이틀을 가지게 된 것도 너무 좋죠(웃음). 그 신은 원작과 달리 진흙탕에서 찍게 됐는데 10월 말에 찍은 거라 날씨도 춥고 바람이 계속 부니까 몸에 발려있던 진흙이 자꾸만 마르는 거예요. 그게 굳으면 하얘지니까 계속 분무기로 물을 뿌려서 촉촉하게 만들다 보니 저를 포함한 배우 분들, 액션 팀들이 다 고생했죠. 특히 저 같은 경우는 치마, 반팔인 여자 교복을 입은 채라 맨팔 맨다리가 다 까졌는데 상처가 있으면 안 되는 캐릭터라서 커버하는 게 진짜 힘들었던 기억이 나요(웃음).”
그런 대단한 액션과 동시에 풋풋한 첫사랑과 든든한 우정을 함께 연기할 수 있다는 건 ‘무빙’ 속에서 고윤정이 거머쥔 또 다른 행운이었다. 희수를 향해 ‘자신은 숨겼다고 믿지만 남들은 다 눈치챈’ 첫사랑을 진행 중인 같은 반 친구이자 또 다른 능력자인 봉석(이정하 분)과 희수에게 능력자로서의 동질감과 호감을 동시에 느끼고 있는 반장 강훈(김도훈 분)과의 삼각관계는 방영 초반부터 ‘무빙’의 든든한 시청자 결집을 이뤄내기도 했다. 실제로 스물일곱 살인 고윤정과 두 살 차이인 두 남동생 배우들은 정원고등학교에서 촬영하는 한 달 동안 하루가 멀다 하고 붙어 다니며 예상 이상으로 빠르게 친해질 수 있었다고 한다. 드라마에서 표현되는 캐릭터들 간의 케미스트리는 실제보다 덜 나온 것이란 게 고윤정의 이야기다.
“정하는 정말 순하고 다정한 친구고, 도훈이는 현장이 힘들면 어떻게든 웃겨주려고 노력하는 분위기 메이커예요(웃음). 제가 17 대 1로 싸우는 신을 찍을 때 전날부터 메신저 단체 채팅방에서 ‘얘들아, 나 어떡하지? 잘할 수 있을까?’하고 설렘 반 긴장 반으로 메시지를 남겼었는데, 그 다음날 정하는 사실 촬영 날이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패딩까지 챙겨서 저를 응원해주러 와준 거예요. 서울에서 촬영장이 있는 홍성까지 3시간이나 걸리는데…. 진짜 너무 감동했죠. 도훈이 같은 경우는 작품 안에서 희수랑 봉석이는 친하지만 강훈이는 그렇지 않아 보이잖아요? 그래서 배우들끼리 비하인드 사진에서 다 같이 함께 하는 모습을 최대한 찍으려고 해요. 시청자 분들이 그렇게 친해 보이는 모습을 너무 좋아해 주시더라고요(웃음).”
비교적 진지하고 어두운 부모 캐릭터들의 관계성과 대비되게 해맑고 밝은 10대들의 풋풋한 로맨스는 ‘무빙’을 보는 틈틈이 시청자들에게 숨 쉴 곳을 마련해주는 고마운 설정이기도 했다. 그런 만큼 특히 초반에 가장 뚜렷이 드러난 희수와 봉석의 러브라인이 언제쯤 진전을 보일 것인지에 대한 관심도 높다. 이에 대해 고윤정은 “그 둘은 아직까진 남녀의 사랑이라고 보기엔 좀 어려울 것”이라며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래도 어른들의 멜로가 2부에 있다 보니 희수 봉석은 조금 멜로나 로맨스 느낌보단 친구처럼, 또는 풋풋한 첫사랑처럼 보이기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의도해서 뭔가 더 풋풋하게 보이려고 한 건 없는데 워낙 정하랑 친하다 보니 너무 자연스럽고 예쁘게 장면이 나왔던 것 같아요(웃음). 그 둘은 정말 둘도 없는, 처음으로 비밀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잖아요. 게다가 희수에게 봉석이는 전학 와서 처음 만난 친구니까요. 각별한 사이이지 아직 서로 사랑하는 남녀의 사이로 정의하기엔 좀 아쉬운 것 같아요.”
2022년 여름 고윤정은 배우 이정재의 감독 데뷔작인 ‘헌트’로 함께 성공적인 스크린 데뷔를 마쳤었다. 이 직전에는 tvN 드라마 ‘환혼’으로 판타지 무협 장르까지 섭렵하는 등 최근 1~2년 새 장르와 무대를 가리지 않는 열연으로 국내는 물론 해외 시청자들에게까지 제대로 눈도장을 찍고 있다. “학교를 졸업하는 느낌”이었다는 ‘무빙’을 뒤로하면 올겨울 공개 예정인 티빙 오리지널 시리즈 ‘이재, 곧 죽습니다’로 다시 안방을 찾을 예정인데 7월에는 ‘응답하라’와 ‘슬기로운’ 시리즈 신원호 PD의 신작 주인공으로 낙점됐다는 소식까지 전했다. 데뷔 4년 차에 이만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배우에게 있어 이는 행운임과 동시에 부담으로 다가올 수도 있을 터다. 고윤정은 그런 상반된 두 해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중이라고 귀띔했다.
“저는 성향이 원래 그런 편인지 후회를 잘 안 해요. 물론 모든 일에는 고민도 있고 후회를 할 수도 있겠지만 그걸 감내할 만큼 재미있게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작품을 촬영하는 동안 고등학생으로도 살아보고, 초능력도 써보고, 사극 주인공으로도 살아봤잖아요(웃음). 이렇게 여러 삶을 살 수 있다는 매력을 느끼며 촬영하고 완성된 게 길면 1년 이상 걸려서 세상 밖으로 나와요. 공개된 작품에 대한 호불호도 있겠지만, 저는 ‘호’를 위해서 해요. 좋은 반응을 받으면 ‘열심히 일하길 잘했구나’란 생각이 들고요. 그런 대중들에게 늘 궁금한 배우로 남아있었으면 좋겠어요. 뭔가에 흥미를 느끼게 된다는 건 호기심을 기반으로 하는 거니까요. 항상 뻔하지 않은, 대중들이 호기심을 느끼게 만드는 그런 배우였으면 좋겠어요.”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