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크 단백질 30여 개 더 많아 빠른 확산…우세종 돼야 대유행, WHO 등 아직은 신중론
코로나19 바이러스는 거듭해서 변이가 등장하며 유행세를 주도해왔다. 새로운 변이 바이러스가 등장해 우세종이 되면 대유행이 벌어지곤 한 것. 델타 변이와 오미크론 변이 등이 우세종이 됐을 당시 세계적인 대유행이 진행됐었다.
오미크론 변이 등장 이후에는 계속 오미크론의 하위 변위들이 등장하며 우세종이 계속 바뀌었지만 더 이상의 대유행은 없었다. 기본적으로 오미크론 하위 변위라 큰 변화가 감지되는 변위들이 아니었다. 물론 우세종이 바뀔 때마다 전염력은 다소 강해지는 변화는 있었지만 그만큼 위중증률과 사망률은 낮아졌기 때문이다. 이런 변화는 엔데믹으로 향하는 청신호가 됐다.
문제는 최근 등장한 BA.2.86 변이다. 역시 오미크론의 하위 변위지만 이번에는 조금 다르다. 스파이크 단백질의 돌연변이 수가 스텔스 오미크론 변이(BA.2)보다 무려 30여 개나 많아 훨씬 더 강력한 전염력과 면역회피력을 갖고 있는 것. 스파이크 단백질은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인체에 침투하는 과정에서 사용하는 일종의 무기다. 변형이 많을수록 기존 면역체계를 뚫을 가능성이 증가하는데 BA.2.86 변이는 무려 스파이크 단백질의 돌연변이 수가 30여 개나 많다. 코로나19 백신의 효능까지 무력화할 수 있는 수준이다.
피롤라(Pirola)라는 별명이 붙은 BA.2.86 변이는 2023년 7월 덴마크에서 처음 발견된 뒤 이스라엘, 영국, 프랑스,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에서 감염 사례가 이어졌다. 미국에서는 8월 31일 미시간에서 첫 감염 사례가 보고된 뒤 뉴욕, 버지니아 등 5개 주로 확산됐으며 8월 29일 캐나다에서도 첫 감염자가 보고됐다. 무시무시한 전파력을 갖춘 변이 바이러스인 터라 빠르게 각 대륙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확진자를 양산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우려의 목소리를 쏟아내고 있다. 덴마크 코펜하겐 대학 국립 혈청 연구소(SSI)의 모르텐 라스무센 선임 연구원은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이렇게 급격히 변해 30개의 새 돌연변이를 일으키는 건 매우 드문 일로 마지막으로 이런 큰 변화를 본 건 오미크론 변이였다”고 말했다. 지금껏 가장 큰 세계적인 대유행을 불러일으킨 오미크론 변이만큼의 위험성을 가진 새로운 변이의 등장이라는 의미다.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 유전학 연구소장인 프랑수아 발루 교수 역시 “BA.2.86는 오미크론 등장 이후 가장 눈에 띄는 변이 바이러스”라고 설명하며 “BA.2.86은 바이러스 감시가 열악한 지역에서 유행하다가 세계 각국으로 전파된 것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미국 시애틀 프레드 허친슨 암센터의 바이러스 진화학자 제시 블룸 역시 “오미크론이 처음 생겨났을 때와 비교할 정도로 큰 진화상 도약”이라고 피롤라 변이를 평가했으며, 미국 스크립스 연구소의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연구원은 “피롤라는 유행할 수 있는 것들이 지니는 전형적 특징 모두를 지니고 있다”고 적었다.
만약 피롤라(BA.2.86)가 오미크론 수준의 새로운 변이라면 오미크론 대유행 수준의 대유행이 2023년 가을이나 겨울에 전세계를 강타할 수도 있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피롤라 변이 확진자가 나왔다. 중앙방역대책본부는 8월 31일 BA.2.86 변이가 국내에서 최초로 1건 검출됐다고 밝혔다. 국내 첫 BA.2.86 변이 확진자는 해외여행력이 없어 국내에서 감염된 것으로 추정돼 이미 일정 정도 지역사회 전파가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질병관리청이 ‘코로나19 4급 감염병 전환 및 2단계 조치 시행안’을 통해 8월 31일부터 코로나19를 4급 감염병으로 전환했다. 이에 따라 신규확진자의 전수조사를 중단하고 표본조사를 시작했다. 코로나19의 위중증률과 사망률이 충분히 관리된다는 방역당국의 판단에 따른 조치인데 새로운 변이로 인한 대유행이 시작되면 깜깜이 환자가 급증하는 위기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 즈음 미국과 캐나다는 물론이고 국내에서도 피롤라 확진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다만 아직 피롤라 변이가 확산되기 시작한 초기인 터라 아직까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는 신중론도 대두되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새로운 변이가 잠재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지 확인되지 않아 신중한 평가를 하고 있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 역시 “BA.2.86을 면밀히 모니터링하고 있지만 현재 유행 중인 다른 변이들 이상으로 공공보건에 위험을 초래할지는 아직 알 수 없다”는 입장이다.
현재 피롤라는 WHO가 ‘감시 대상’으로 지정해 추적 관찰 중인 새로운 변이 바이러스지만 WHO 감시 대상에는 피롤라(BA.2.86) 외에도 10여 종이 더 지정돼 있다. WHO는 2023년 5월 코로나19에 대한 ‘국제적 공중보건 비상사태(PHEIC)’를 해제하며 계절 독감 수준으로 관리하라고 세계 각국에 권고한 상황이다. 다만 피롤라(BA.2.86)가 ‘감시 대상’에서 ‘관심 변이’나 ‘우려 변이’로 격상될 경우 다시 대유행이 시작될 수 있다.
대유행은 강력한 새로운 변이의 등장만으로 시작되지는 않는다. 아무리 강력한 변이일지라도 우세종이 돼야 대유행을 주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미국에서 우세종은 ‘에리스’라는 별명이 붙은 XBB 변이인 EG.5로 국내에서도 곧 우세종이 될 전망이다. 피롤라(BA.2.86)가 우세종이 되려면 현재의 우세종인 에리스(EG.5)를 밀어내야 한다.
미국 테네시주 밴더빌트대 메디컬 센터의 예방의학 및 전염병 교수인 윌리엄 샤프너는 “오미크론의 모든 변이와 마찬가지로 분명히 전염성이 있지만 유행은 하더라도 우세종이 되지는 않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피롤라(BA.2.86)에 대한 항체 영향 실험을 진행한 스웨덴 카롤린스카연구소의 벤자민 머렐 수석 연구원은 “오미크론이 최초 출현했을 때보다 극단적인 상황은 아닌 것 같다”면서 “피롤라(BA.2.86)가 현재 돌고 있는 변이들을 능가할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으며 우리 항체가 새 변이에 대해 완전히 무력하지는 않은 것 같다”고 설명했다.
전동선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