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운 감독과 5번째 호흡 그의 예술가적 집요함 사랑해…선배이자 스승 변희봉 별세 비통하고 안타까워”
‘거미집’ 인터뷰에 앞서 송강호는 인터뷰 당일이었던 9월 18일 오전, 갑작스러운 별세 소식이 들려온 고 변희봉(향년 81세)을 추억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2003)을 통해 아버지와 아들로 호흡을 맞췄던 그는 송강호에게 있어 인생이자 연기의 선배였고, 선생님이었으며, 같은 길을 앞서 향해 걸어가고 있던 훌륭한 선구자였다고 했다.
“5~6년 전부터 투병 생활을 하고 계셨던 것으로 기억해요. 조금 호전되셨다가 재발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죠. 너무나도 비통하고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5년 전쯤 제가 부친상을 당했을 때 조문을 오셨는데 그게 마지막이었던 것 같아요. 간간이 봉준호 감독을 통해 투병 소식과 어떤 치료를 받으시는지 이야기를 들었어요. ‘수사반장’부터 시작해서 수많은 작품에서 명연기를 보여주셨던, 대선배님이자 저와는 ‘살인의 추억’, ‘괴물’을 함께한 선생님이셨죠. 인터뷰를 마치면 봉 감독과 함께 조문을 가기로 약속했어요.”
비통함을 뒤로한 채 다시 프로답게 인터뷰에 임한 송강호는 자신의 신작 ‘거미집’에 대해 “지금 시대의 새로운 영화”라고 평했다. 김지운 감독과 다섯 번째로 함께한 ‘거미집’은 문화계에 서슬 퍼런 검열이 존재하던 1970년대를 배경으로, 다 찍은 영화 ‘거미집’의 결말을 다시 찍으면 더 좋아질 것이라는 강박에 빠진 감독이 검열 당국의 방해와 바뀐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배우·제작자 등 미치기 일보 직전의 상황에서 촬영을 감행하면서 벌어지는 처절하고 ‘웃픈’ 일을 그린 영화다. 극 중 송강호는 ‘이 영화의 결말만 바꾸면 세기의 걸작이 된다’는 믿음으로 광기 아닌 광기를 뿜어내며 이틀 만에 모든 재촬영을 끝내버린 김열 감독을 맡았다.
“김 감독을 연기하면서 그를 대변하는 모든 한국의 예술가들, 특히 영화감독들의 고통과 고뇌를 알게 됐죠. 어떻게 보면 이 사회라는 거대한 세트장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희망과 욕망, 좌절 이런 것을 다 담아낸 게 김열 아닌가 싶어요. 그런 걸 담아내는 것이 이 영화의 목표이기도 했고요. 결국 어떤 모든 욕망의 끝을 영화 속 영화 ‘거미집’의 마지막 기괴한 장면으로 보여주지만, 그 장면을 바라보는 김열의 마지막 엔딩 표정은 또 굉장히 미묘하거든요. 인생은 끝나지 않는다, 야망도 끝나지 않는다, 이런 대사가 담긴 듯한 표정이에요. 과연 김열이 (자기 작품을 보며) 만족했는지, 그렇지 않았는진 저도 모르지만요(웃음).”
송강호의 말대로 영화 속 영화 ‘거미집’의 마지막 장면을 촬영하는 김열은 그의 모든 욕망을 말 그대로 쏟아 부어 불태운다. 이 신을 쁠랑 세캉스(Plan-sequence), 즉 장면을 여러 번 촬영해 후편집으로 가공하는 것이 아닌 한 번의 샷으로 전체 시퀀스를 촬영하고자 한 그의 욕망이 스크린에 그대로 펼쳐지면서 이를 바라보는 관객들마저 김열의 열정과 광기에 동참하게 됨은 물론이다. 1960~1970년대 유명한 샹송 가수인 프랑스 갈(France Gal)의 곡 ‘노래하는 샹송 인형(Poupée de cire, poupée de son)’을 배경음으로 휘몰아치는 이 시퀀스는 ‘거미집’을 꼭 관람해야 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고 있다.
“사실 기술적으로 그 신을 어떻게 찍을지는 보여줄 수 없어요. 그 시절엔 CG도 없었고 필름 400장으론 도저히 담아낼 수 없는 신이거든요. 어떻게 보면 저희 영화에선 그것이 일종의 메타포, 상징적으로 처리된 거죠. 그런 식으로 김열 감독의 야심의 결말을 만들고 싶었던 거예요. 극 중에서 촬영할 때도 1층에서 한 컷으로 찍은 뒤에 위로 쭉 따라 올라가는 건데 현실적으로 그 시대에 그렇게 긴 쁠랑 세캉스가 성립될 수 없잖아요(웃음). 그렇게 찍고 싶었다는 김 감독의 욕망을 표현한 거죠.”
그런 김열 감독을 연기하면서 송강호의 머릿속에는 그의 배우 인생 동안 함께했던 여러 감독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가진 않았을까. 벌써 다섯 번째 호흡을 맞춘 김지운 감독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캐스팅 당시 김 감독이 “이번엔 또 얼마나 괴롭힐까”를 걱정했었다며 웃음을 터뜨렸던 송강호는 한편으로 그의 예술가로서의 집요한 기질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도 강조했다.
“괴롭혔다고 얘기하면 김지운 감독이 섭섭해 할 건데(웃음)! 사실 괴롭힌다기보단 예술가로서 집요함이 있단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저는 김 감독님의 그런 점을 사랑하고 존중합니다. 끊임없이 그렇게 본인이 원하는, 미장센이 됐든 연기가 됐든 그걸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가 정말 열정적인 예술가의 모습이니까요. 그런 장면들이 탄생되기까지는 고통스럽지만, 저는 감독님과 다섯 번의 기나긴 시간을 통해 많이 느꼈기 때문에 그런 집요함을 사랑해요(웃음). 감독님의 모습은 ‘조용한 가족’(1998) 때나 지금이나 똑같거든요. 다만 그때는 되게 멋있었는데 지금은 좀 나이가 드셔서, ‘세월 앞엔 장사가 없다!’ 그런 느낌(웃음).”
그런 김지운 감독, 송강호와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으로 함께했던 정우성은 그 의리를 지키기 위해 ‘거미집’에 깜짝 특별출연을 결정했다. 극 중 김열 감독의 콤플렉스의 원천이자 그의 광기에 불을 댕기는 스승 신 감독 역을 맡은 정우성은 이 영화에서 가장 광기다운 광기에 절어있는 모습을 연기한다. 송강호 역시 “이렇게 신나서 광기에 찬 정우성을 처음 봤다”며 웃어 보였다.
“사실 그때 정우성 배우가 ‘서울의 봄’을 찍으러 광양에 가 있었거든요. 그런데 저희 작품을 촬영하려 밤새 달려와서 찍고, 다시 또 밤새 달려 내려가고, 다음날 또 밤새 달려오는 식으로 이틀을 찍었어요. 그런데도 피곤해 하지 않고 막 광기에 차 있더라고요(웃음). 정우성 씨도 끝나고 나서 촬영본 보고 되게 흡족해 하면서 신나 가지고 내려갔어요(웃음). 그런 걸 보고 있자면 고맙다는 걸 넘어서 감동적이라고 느끼죠. 이렇게 신세를 졌으니 언젠가 좋은 기회가 있으면 저도 갚아줘야 할 텐데, 저한테 도와달라고 안 할 것 같아요. ‘필요 없어 형’ 이럴 거 같아요(웃음).”
캐릭터부터 출연진, 그리고 감독까지. 영화에 미친 사람들만 한데 모아 만들어낸 ‘영화다운 영화’다 보니 이 독특한 영화를 분명 사랑할 수밖에 없는 관객들이 있을 터다. 송강호 역시 그런 관객들을 다시 한 번 마주하고 싶었다고 힘주어 말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한국 영화계의 위기니, 극장가의 종말이니 하는 어두운 이야기들 사이에서 그럼에도 빛나는 작품은 여전히 있을 것이고, 그 빛을 따라올 관객들 역시 그대로 존재할 것이란 믿음이다.
“이런 위기를 거치며 영화와 관객, 영화관, 스크린에 대한 소중함을 모든 영화인들이 새삼 가지게 되는 것 같아요. 스마트폰을 손에 들고 이렇게 보는 거랑 큰 스크린으로 그 모든 사운드와 배우들의 호흡, 눈빛 이런 것을 함께 느끼며 공감하는 메커니즘 자체에 대한 로망이 점점 짙어지죠. 영화에 대한 가치가 더욱 절실해진 지금, 그래서 ‘거미집’ 같은 영화가 관객들에겐 흥행을 떠나더라도 반가울 것 같아요. 이런 건 OTT에서 볼 수 없으니까요. 앞으로 한국 영화산업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물론 고통도 따르겠지만, OTT나 드라마에선 할 수 없는 이야기를 창조하고 완성해나가는 것은 영화만이 가지고 있는 가치라고 생각해요. 그런 시대가 오기 위해선, 그래서 ‘거미집’이 잘 돼야 하지 않을까요(웃음)?”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