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적 대응 준비 중에 HUG 보증 취소 날벼락…집주인마저 잠적, ‘선구제 후회수’ 필요성 제기
#보증금 보증 약속 믿었는데…
부산에 거주하는 20대 A 씨는 다가올 추석 명절이 지옥 같다고 털어 놓았다. 전세로 거주하는 집의 주인이 약 한 달째 어디론가 잠적해 연락이 닿지 않기 때문이다. 이웃인 20세대가 전부 같은 상황이다. 진즉에 전세계약이 끝났지만 보증금을 못 돌려받아 방을 빼지 못하고 있다.
10여 개의 건물을 소유한 이 집주인한테 피해를 입었다는 인원만 100여 명이다. 대부분 2030세대 청년들로 피해 액수는 200억 원대로 추산된다. 이들이 사회 경험이 부족해 당했다고 보긴 힘들다. 입주 때부터 집 주인의 과도한 부채 등은 확인했다. 그러나 주택도시보증공사(HUG)가 보증금 보존을 약속해 믿었다.
HUG는 일찍이 집주인이 가입한 보증금 보증의 증서를 발행했지만 갑자기 집 주인이 제출한 서류에 허위사실이 발견됐다며 보증을 중도에 취소했다. HUG의 '개인임대사업자 임대보증금보증 약관' 제14조에 따라 가능한 조치라는 설명도 덧붙였다(관련기사 HUG 너마저…전세금 보증 중도 취소에 2030 세입자 '날벼락').
A 씨는 일요신문과 인터뷰에서 "명절이 코앞인데 미칠 노릇"이라며 "온 가족이 초비상 상태"라고 토로했다. 특히 "공기업인 HUG의 보증에 대한 신뢰야 진즉에 무너졌지만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막막하다"며 "법적 대응에 나설 계획이긴 한데 해도 너무 한다"고 울분을 터트렸다.
이웃 단지에 사는 30대 B 씨도 암울하긴 마찬가지다. 역시 보증금을 못 돌려받아 이사할 형편도 안 되는 데다 거주하는 건물이 경매에 넘어가며 더욱 막막해졌다. 늘 그렇듯 올 명절에도 친척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할 텐데 식구들과 당장 오가는 얘기도 이번 전세사기 사태를 어떻게 해결할지가 전부다.
B 씨는 여러 차례 이사로 거주지를 옮겨온 만큼 집 계약에 관해선 잘 안다고 자부해 왔다. 집주인이 제2금융권 부채까지 끌어들였다는 사실도 당연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도 계약은 했다. 해당 집주인이 보유한 인근 여러 건물의 주민 대부분이 그동안 문제없이 잘 지내온 데다, HUG도 보증금 보증을 약속한 까닭에서다.
그는 "이제 막 취업했는데 도저히 일에 집중이 안 된다"며 "주변 친구들과 만나도 피해 하소연뿐이고, HUG에 문제를 제기하니 대답을 듣기도 힘든 현실"이라고 털어 놓았다. 특히 "보증금에 쓰인 대출을 갚아야 하는 상황 속 소송비용도 걱정인 게 사실이지만 경찰도 수사에 속도를 좀 내줬으면 좋겠다"며 분노했다.
평범한 청년들이 인생을 살며 소송 등 법적 절차를 준비할 일이 결코 흔치는 않다. 그나마 피해자들끼리 연대하면 부담이 덜하겠지만 이마저 현실은 녹록지 못하다. 전세 계약이 만료된 사람과 곧 앞둔 사람, 얼마 되지 않은 주민들의 상황이 제각각이라 구체적인 대응 방안이 다를 수밖에 없는 탓이다.
피해자들은 우선 처지가 비슷한 사람끼리 3~5명이 무리를 이뤄 HUG 및 집주인 등에 소송을 제기할 계획이다. HUG에 대해서는 중도에 보증금 보증을 취소한 조치가 적절치 않다는 취지로 시시비비를 가려볼 계획이고, 집주인에는 사기죄 등을 묻겠다며 이미 여럿이 고소를 마친 상태다. 국토교통부에도 피해 구제를 요청해둔 상태다.
#'대체 누가 이런 일을…'
대검찰청·경찰청에 따르면 2023년 7월까지 1년 동안 발생한 전세사기 피해자만 5013명이다. 이들 가운데 57.9%인 2902명이 20대와 30대 청년들이다. 사기 건수는 총 1538건으로 경찰 등은 1034명을 입건해 수사를 벌이고 있다. 국토부가 '전세사기피해지원위원회'를 열어 전세사기를 인정한 건수도 올 9월 20일 기준 총 6063명이다.
피해자들로선 보증금 반환과 동시에 사기 피의자의 실체도 궁금할 수밖에 없다. 일요신문은 HUG가 보증금 보증을 중도 취소한 부산 전세사기 사건에서 잠적한 피의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봤으나 구체적 실체까진 파악을 못했다. 다만 그가 생업마저 뒷전에 둔 채 자취를 꽁꽁 감춰 경찰의 적극적인 수사가 절실한 상황은 확인했다.
집주인 C 씨는 1983년생으로 경남 김해 등에서 여러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2011년 울산에서 숙박업을 시작해 2년 뒤에는 경남 김해에 금속가공업체를 세워 운영해 왔다. 그러다 2021년 부동산 컨설팅 회사를 차린 뒤, 각종 2금융권에서 최소 30억 원가량의 대출을 받아 부산 수영구와 연제구의 건물들을 매입하기 시작했다.
무리한 대출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C 씨의 회사 가운데 그나마 규모가 큰 금속업체는 주택들을 매입하기 1년 전 매출액이 약 7억 원에 불과했다. 다른 회사 2곳은 연 매출액이 각각 1억 원도 안 된다. 제조업체 평균 영업이익률이 5% 안팎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C 씨는 수십억 원 대출을 감당할 여력이 부족했을 수 있다.
마치 '부동산 신화'를 꿈꾼 듯한 양상이 인천 미추홀구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해당 사건을 일으킨 소위 '건축왕' 남 아무개 씨는 대출금과 전세보증금 수입에만 의존해 대출이자와 보증금 등을 돌려막으려다 불어난 이자를 막지 못했다. 그 역시 부산 C 씨와 같은 2금융권에서 대출의 대부분을 충당했다.
실제 C 씨가 대출 외 자기소득으로 자본력을 갖출 의지가 있었는지도 의문으로 남는다. 그가 김해 한 산업단지 안에서 경영한 금속업체 인근의 직원들은 C 씨 회사가 가동한 모습을 몇 번 본 적 없다고 했다. 바로 옆 공장마저 "왜 공장을 방치해두고 있는지 모르겠다"며 "어쩌다 한 번 사람이 왔다갔는데 누군지는 모르겠다"고 했다.
C 씨 회사의 닫혀 있는 정문에는 수개월 치 우편물들이 그대로 쌓인 상태다. 전세 피해자들이 보낸 고소장 등도 전달이 되질 않아 집배원이 남긴 '부재중 재방문' 쪽지도 50개가 넘는다. 근방의 또 다른 업체 직원들도 "으레 멈춘 사업장이겠거니 할 뿐 정확히 언제부터 방치 상태로 있는지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고 털어 놓았다.
다른 부동산 컨설팅 회사는 잘 운영되고 있을까. 가서 보니 낯선 기업이 위치해 있었다. 내부는 비어 있는 상태였는데 인근의 업주들도 "(C 씨의) 회사 이름은 들어보지 못했다"며 "현재 (다른 이름으로 있는) 회사도 자주 비어 있는 상태라 정체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피해자들은 여전히 C 씨에 문자 메시지 등으로 사태 수습을 촉구하지만 의미는 없다. HUG가 보증금 보증을 중도 취소한 2023년 6월부터 약 두 달 동안은 "제가 해결해보겠다”는 답변이라도 돌아왔지만 9월부터는 원론적인 대답마저 없기 때문이다. 입주민들은 지푸라기라도 붙잡듯 "혼란스럽다" "죽고 싶다"는 등 메시지를 남겨놓고 있다.
C 씨에 의한 피해를 토로하는 사람 가운데에는 입주민뿐 아니라 대금을 못 받은 거래업체들도 있다고 한다. 사건을 수사 중인 부산남부경찰서 관계자는 "우선 9월 6일 C 씨를 긴급 출국금지 조치했다"며 "피해자 조사를 진행 중이며 구체적인 수사 상황은 현재로선 설명 드리기 어렵다"고 말을 아꼈다.
본질적인 제도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크다. 2023년 5월 전세사기 특별법이 통과됐으나 피해자들의 가장 큰 요구였음에도 빠지게 된 '선구제 후회수' 방안을 검토해야 할 필요성이다. 공공기관이 피해자들의 보증금 반환 채권을 매입해 먼저 보상해 주고, 이후 경·공매 등을 통해 매입비용을 회수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시민사회대책위원회 공동대표인 이강훈 변호사는 "전세사기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했지만 대부분의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제자리에 있고, 앞으로도 비슷하게 상황이 전개될 우려가 크다"며 "현 제도의 사각지대를 면밀히 분석해 선구제 후회수 등 피해자들의 요구사항을 반영한 추가 입법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부산=주현웅 기자 chescol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