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 지원 속 2025년 1.8나노급 반도체 양산 전망…실적 우려 삼성전자 2위 수성 쉽지 않을 수도
인텔은 지난 9월 19일(현지시각)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호세에서 연례 개발자 행사 ‘인텔 이노베이션 2023’을 열고 1.8나노급 반도체 웨이퍼를 공개했다. 펫 겔싱어 인텔 최고경영자(CEO)는 “내년 1분기 1.8나노 웨이퍼를 처음으로 공정에 투입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1.8나노 공정의 기술적 개발을 끝내고 조만간 팹(반도체 공장)에 투입해 실증에 나선다는 뜻이다.
반도체업계는 통상 실증에서 본격적인 양산 단계까지 접어드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따라서 인텔이 실제 1.8나노 양산에 돌입할 시기는 2025년이 될 전망이다. 이는 경쟁사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속도다. TSMC와 삼성전자는 현재 3나노 양산 초기 단계이고, 2025년 2나노 양산을 계획하고 있다.
인텔은 2021년 파운드리 복귀를 선언한 후 빠른 속도로 공정 미세화를 이뤄내고 있다. 겔싱어 CEO는 행사에서 1.8나노 웨이퍼 외에도 타 공정 진척 상황을 공개했다. 7나노와 4나노는 이미 대량 양산을 진행하고 있다. 또 올해 하반기 중 3나노 양산 준비를 마무리하고, 2024년 내 2나노 생산에 돌입하겠다는 계획이 담겼다. 인텔의 계획대로라면 올해 안에 TSMC와 삼성전자를 따라잡고, 내년에는 이들을 뛰어넘을 수 있다.
반도체업계 한 관계자는 “수십 년 동안 쌓아온 인텔의 노하우와 저력이 미국의 ‘칩스법’ 등 정책적 지원을 받아 빛을 발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칩스법의 주요 내용은 미국에 새로운 반도체 설비 공장을 만드는 반도체 업체에게 총 520억 달러(약 70조 원)의 지원금을 제공하는 것이다. 칩스법에는 반도체 팹에 대한 미국 국방부 등 국가안보기관의 접근을 허용해야 한다는 조항이 담겼다. 미국에 공장을 만들기 위해서는 각 사 기밀을 내놓아야 하는 셈이다. 반도체업계 일각에서는 미국 애리조나에 팹을 만들고 있는 TSMC와 텍사스 오스틴에서 팹을 운영하는 삼성전자의 기술이 인텔로 흘러간 것으로 의심한다.
인텔은 내년부터 파운드리와 설계 사업의 회계를 분리할 계획이다. 인텔의 중앙처리장치(CPU) 등 반도체를 만드는 파운드리 매출은 전체 실적에 녹아 있었다. 하지만 회계를 분리해 독립된 파운드리로서의 성과를 공개적으로 드러내겠다는 것이다. 인텔은 지난해 파운드리와 설계 분야에서 총 200억 달러(약 26조 8000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고 밝혔다. 이는 삼성전자가 기록한 208억 달러(약 27조 8720억 원)와 큰 차이가 나지 않는 수치다. 인텔이 약간의 외부 수주만 성공해도 삼성전자를 뛰어넘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반도체업계는 인텔의 외부 수주 가능성에 대해 여전히 불확실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인텔은 설계와 제조를 함께하는 종합반도체기업(IDM)이다. 따라서 고객사가 인텔에 제조를 의뢰하면 그들의 설계 노하우가 유출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일례로 인텔의 CPU 시장 경쟁자인 미국 AMD나 그래픽처리장치(GPU) 시장 일부 분야에서 경쟁 중인 엔비디아 등 대형 업체들은 인텔에 하청을 맡기는 것이 꺼려질 수 있다. 이는 설계를 하지 않고 제조만 맡는 TSMC가 압도적인 점유율을 가질 수 있는 원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최근 파운드리의 생산능력 한계와 ‘미국 기업’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인텔이 기회를 잡을 것이라는 분석도 만만치 않다. TSMC는 3나노 등 최신 공정 양산에 돌입했으나 수율(생산량 대비 양품 비중)을 끌어올리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는 고성능 시스템반도체 공급난으로 이어지고 있다. 엔비디아의 ‘H100’ 등 고성능 GPU는 주문 후 수령까지 52주(1년) 이상이 걸릴 정도다. 엔비디아 입장에서는 공급량 조절로 몸값을 높일 수는 있지만 더 많은 반도체를 팔지 못해 수익성이 제한된다는 한계도 분명하다.
TSMC는 무리한 3나노 진입으로 결과물의 성능이 예상보다 못하다는 지적도 받고 있다. 애플이 최근 내놓은 아이폰15 프로 시리즈에는 TSMC 3나노 공정에서 제조한 ‘A17 프로’ 칩셋이 쓰였다. 이 칩셋은 생각보다 낮은 성능과 더불어 발열 또한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초미세공정 반도체의 장점인 낮은 전력소모와 발열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다.
파운드리업계 2위인 삼성전자의 처지는 더욱 좋지 않다. 삼성전자는 TSMC와 치열한 초미세공정 경쟁을 벌이고 있지만 주요 발주처들의 외면을 받고 있다. 삼성전자가 생산성과 품질에서 우위를 차지하지 못하고, 인텔처럼 반도체 설계까지 함께하는 IDM이라는 점이 발목을 잡는다.
실제 삼성전자 반도체부문의 최근 분위기는 좋지 않다. 퀄컴은 2022년 ‘스냅드래곤8 Gen 1’ 생산을 삼성전자 파운드리에 맡겼으나 낮은 성능 때문인지 차기작부터는 TSMC에 전량 생산을 맡겼다. 엔비디아도 잠시 삼성전자 파운드리를 사용한 바 있지만 현재 주요 GPU는 모두 TSMC에 맡기고 있다. 시장조사 업체 트렌드포스는 올해 초 보고서를 통해 “삼성전자의 고객사인 퀄컴과 엔비디아가 플래그십 칩에 대한 주문을 TSMC로 할당함에 따라 7나노 이하에 대한 상당한 수요를 잃었다”며 “현재 삼성전자는 주문재할당에 따른 생산능력 부진을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신규 주요 거래처가 없다”고 지적했다.
삼성전자에 대한 우려는 실적으로도 나타난다. 삼성전자의 반도체(DS) 부문은 올해 2분기 매출 14조 7300억 원, 영업손실 4조 4600억 원을 기록했다. 삼성전자는 “2분기에는 메모리 출하량이 예상을 뛰어넘어 1분기보다 실적이 개선됐으나 파운드리는 수요가 약세를 보이는 가운데 라인 가동률이 하락해 이익이 감소했다”고 설명했다.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은 지난해 4분기 △TSMC 58.5% △삼성전자 15.8%였지만 올해 1분기에는 △TSMC 60.2% △삼성전자 9.9%로 격차가 벌여졌다. 삼성전자는 최근 소폭 반등해 올해 2분기 파운드리 점유율 11.7%를 기록했지만 TSMC는 56.4%로 여전히 압도적인 점유율을 이어갔다. 이런 가운데 인텔이 약진하면 삼성전자로서는 2위 수성도 어려워지는 셈이다. 그러나 삼성전자는 이에 대해 특별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민영훈 언론인
박형민 기자 god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