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항공산업 경쟁력 약화 우려…조원태 회장 경영권 방어 위해 무리한 합병 추진 지적도
대한항공의 아시아나항공 합병은 약 3년째 진행 중이다. 합병을 위해서는 14개국의 합병 승인이 필요한데, 현재 14개국 중 11개국의 승인을 받은 상태다. 유럽연합(EU)과 미국, 일본의 승인만 남겨두고 있다. 그중 EU는 기업결합 심사가 까다로운 곳이다. 대한항공은 2021년 1월 기업결합 신고서를 EU에 제출했지만 EU는 올해 3월과 6월 두 차례 심사기간을 연장했다. 이후 EU 집행위원회는 지난 8월 3일까지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합병 승인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었지만 양사 합병 시 독과점이 나타날 수 있다는 이유로 연기한 상태다. 앞서 EU집행위는 대한항공에 ‘합병할 경우 유럽 노선에서 승객·화물 운송 경쟁이 위축될 수 있다’는 내용을 담은 심사보고서를 통보한 바 있다.
EU집행위는 합병 승인 여부가 연기된 기간 동안 대한항공과 시정 조치를 협의해 승인 여부를 결정할 것으로 보인다. 대한항공은 합병 시정조치안을 이번 달 안으로 EU 집행위에 제출할 예정이다. 다만 대한항공이 EU 경쟁당국의 승인을 받기 위해 아시아나항공의 화물사업을 매각하고, 일부 슬롯 및 노선을 반납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져 합병 실효성에 대한 우려가 나오고 있다. 중요한 사업과 노선 등을 내주면 오히려 국내 항공산업의 경쟁력이 떨어져 합병 효과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아시아나항공의 화물사업은 지난해 매출이 약 3조 원에 달할 정도로 큰 사업이다. 지난해 화물사업 매출이 7조 7200억 원에 달하는 대한항공과 합병하면 화물 사업에서 시너지가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또 업계에서는 대한항공이 노선을 반납한다면 인천~파리, 인천~프랑크푸르트, 인천~로마, 인천~바르셀로나가 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김광일 신라대 항공운항과 교수는 “대한항공이 현재까지 다른 나라에 합병 승인을 받으면서 이미 상당수 슬롯을 반납했다”며 “외국에서는 슬롯을 다른 항공사한테 팔기도 하는데 슬롯을 줄여버리면 항공사에는 굉장한 손해”라고 말했다. 항공업계 관계자 A 씨는 “이렇게 다 손해를 볼거면 뭐 하러 합병하는지 모르겠다”며 “영국에도 좋은 슬롯을 다 반납하고 승인을 받았는데 계속 이런 식으로 해서 합병 승인을 받아야 된다면 합병을 안 하느니만 못하다”고 지적했다.
대한항공은 이미 다른 경쟁당국 심사에서 상당수 슬롯을 반납하기로 했다. 영국 항공사에 슬롯 17개 중 7개를 반납하기로 했고, 중국의 승인을 받을 때도 주요 9개 노선에 대한 슬롯을 신규 항공사에 이전한다는 내용을 중국 당국에 제출한 바 있다. 대한항공은 합병 자금으로 이미 약 1조 원에 달하는 자금을 투입했으며, 국내‧외 로펌 및 자문사 비용으로 1000억 원이 넘는 금액을 썼다. 이렇게 많은 시간과 비용을 쏟아 부었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사업과 슬롯 등을 내주기만 하면 합병의 실익을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얘기가 많다.
국부 유출 논란도 커지고 있다. 앞서 대한항공이 영국의 합병 승인을 받을 때 아시아나의 인천~런던 노선 운수권과 슬롯을 영국 항공사인 버진애틀랜틱에 넘기겠다고 해 합병 승인을 받았다. 아시아나항공조종사노동조합 관계자는 “노선 운수권이 항공사만의 자산이 아니라 국가 자산이기도 한데 합병을 위해 다 반납을 해버리면 국가 경제적 측면에서 큰 타격을 받는 것”이라며 “아시아나항공만 타격을 받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 항공 산업에도 좋을 것이 전혀 없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한국의 입지가 줄어드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말했다.
EU 경쟁당국에서 대한항공이 제시한 시정조치안을 승인한다 해도 문제다. 아직 합병 승인을 하지 않은 미국과 일본에서도 이에 준하는 요구를 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정원섭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공항항만운송본부 조직쟁의부실장은 “유럽에서 승인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아직 승인을 하지 않은 미국과 일본이 대한항공이 EU에 제시했던 사업이나 노선 및 슬롯에 준하는 것들을 요구할 수 있다”며 “영국, 중국 등 다른 나라들이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기업결합 심사하는 것을 봐왔을 것이고, 자국과 자국 항공사에 이익을 챙기기 위해 당연히 똑같이 혹은 그 이상으로 요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한항공이 계속 양보하는 방식으로 합병 승인을 받으려고 한다면 노동자들의 고용이 불안정해질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아시아나항공조종사노동조합은 성명서를 통해 “대한항공이 아시아나항공의 수많은 슬롯과 화물을 반납하고, 껍데기만 남은 채로 인수하면 아시아나항공 직원의 고용 유지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라며 “대한항공이 반납한 슬롯에 따른 아시아나항공의 영업력 부족과 적자를 그대로 두지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 이어 “대한항공이 그 많은 적자를 감수하고 아시아나항공의 직원들에게 동일한 고용조건을 보장하리라는 감상에 젖은 아시아나항공 직원들은 없다”고 덧붙였다. 정원섭 조직쟁의부실장은 “노선이 사라지면 비행기도 사라질 것이고, 해당 업무와 관련된 기장, 부기장, 객실 승무원, 표 관리하는 사람들, 수화물 옮기시는 분들 등 직원들이 다 사라질 것”이라며 “영국이나 중국에 슬롯이랑 노선 내어준 것만 봐도 30% 이상 인력 감축이 될 것으로 보이고, 아시아나항공의 위탁회사 노동자들도 타격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우려와 지적에도 대한항공의 아시아나항공 합병 의지는 굳건하다. 조원태 대한항공 회장은 올해 6월 튀르키예 이스탄불에서 열린 국제항공운송협회 연례총회에 참석해 “현재 양사 합병에 100% 올인하고 있다”며 “무엇을 포기하든 아시아나와 합병을 성사시킬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대한항공이 알짜 사업매각, 노선 양보 등을 고민하면서 합병을 추진하는 것에 대해 일각에서는 조원태 회장의 경영권 방어와 관련 있는 것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 2020년 11월 대한항공을 계열사로 둔 한진칼 경영권 분쟁 시기에 산업은행이 한진칼에 8000억 원을 투자하며 조원태 회장의 우호 주주로 등장했다. 산업은행의 도움으로 당시 조 회장과 지분 경쟁을 하던 사모펀드 케이씨지아이(KCGI)-반도건설-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3자 연합)은 경영권 다툼에서 물러났다. 현재도 산업은행은 한진칼 지분 10.58%를 보유하고 있다.
당시 산업은행이 한진칼에 투자한 배경은 아시아나항공 인수다. 산업은행은 그동안 아시아나항공에 투입한 대규모 공적 자금을 회수해야 하는데 합병이 무산되면 이 자금을 회수할 방법이 없다. 조원태 회장 입장에서는 합병이 무산되면 산업은행이 보유한 한진칼 지분을 팔고 나가 경영권 분쟁이 재점화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무리한 합병을 추진한다는 것이다. 황용식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는 “합병이 무산돼 산업은행 지분이 빠지면 조원태 회장의 우호 지분이 아닌 지분이 들어올 수 있다”며 “합병 무산 시 산업은행이 한진칼 지분을 계속 갖고 있을 만한 이유는 없기 때문에 이와 관련된 대비도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항공업계 관계자 B 씨는 “경영권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고, 산업은행 눈치도 보여서 대한항공 입장에서는 합병을 열심히 추진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며 “나중에 설사 합병이 되지 않더라도 대한항공에서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합병이 안됐다’는 변명이라도 하려면 최대한 합병에 심혈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대한항공 관계자는 “합병을 위해 최대한 노력을 다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EU 경쟁당국과 현재 경쟁제한성 완화를 위한 시정조치안을 면밀히 협의하고 있으며, 일자가 정확히 정해지지는 않았지만 늦어도 10월 말까지는 시정조치안을 확정해 제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현재 협의 중인 시정조치안 세부 내용은 경쟁당국의 지침상 밝히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이민주 기자 lij907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