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강’ 바르심과 라이벌전 석패로 은메달…“파리에선 나를 무서워하게 만들 것” 각오 다져
그러나 우상혁이 '정상권'을 넘어 '정상'에 오르려면 뛰어 넘어야 할 거대한 벽 하나가 있다. '현역 최강 점퍼' 무타즈 에사 바르심(32·카타르)이다. 우상혁은 10월 4일 열린 남자 높이뛰기 결선에서 2m33을 넘어 결국 2위로 경기를 마쳤다.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대회에 이어 2회 연속 은메달이다. 금메달은 역시나 2m35를 넘은 바르심이 가져갔다.
이번 대회 남자 높이뛰기는 사실상 우상혁과 바르심의 2파전으로 압축됐다. 둘의 대결은 올림픽닷컴이 개막 전부터 가장 주목한 라이벌전 중 하나였다. 올림픽닷컴은 "아시아 최강 바르심의 라이벌은 우상혁"이라며 "올 시즌 개인 최고 기록은 바르심이 2m36, 우상혁이 2m35다. 둘은 아시안게임에서 치열한 금메달 접전을 펼칠 것"이라고 내다봤다.
바르심은 세계가 인정하는 역대 최강 점퍼 중 한 명이다. '전설' 하비에르 소토마요르(쿠바·2m45)에 이어 세계 2위(2m43) 기록을 보유했다. 남자 높이뛰기에서 2m40 이상을 넘어본 선수는 역대 11명뿐인데, 바르심이 그중 가장 많은 11번을 넘었다. 가장 최근 2m40을 넘은 선수도 2018년 7월의 바르심이었다.
바르심은 2010년 광저우 대회와 2014년 인천 대회에서 아시안게임을 2연패했다. 그러나 2017년 발목을 다쳐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대회에는 불참했다. 이번 대회에서 9년 만의 아시아 정상 복귀를 노렸다. 아시안게임에 집중하기 위해 다이아몬드 파이널 출전도 포기했을 정도다. "파이널은 세 번 우승했으니, 이번엔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따고 싶다"는 각오였다. 우상혁은 바르심이 없는 파이널에서 시상대 맨 위에 서면서 아시안게임의 명승부를 예고했다. 바르심도 "나와 우상혁은 라이벌이자 친구다. 높이뛰기 선수 사이에는 유대감이 있는데, 우상혁은 아시아 선수여서 좀 더 남다른 감정을 느낀다"며 "아시아 육상이 세계로 나아가려면 아시안게임에서도 세계 수준의 경쟁이 벌어져야 한다. 우상혁이 세계적인 레벨로 올라와 무척 기쁘다"고 반겼다.
우상혁에게도 아시안게임 금메달은 간절했다. 그는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대회에서 은메달을 따면서 처음으로 존재감을 알렸다. 바르심이 출전하지 못한 대회에서 아시아 2위에 올랐다. 그 후 5년간 우상혁은 무서운 속도로 성장했다. 한국 육상이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성과를 꾸준히 올렸다. 바르심과 진검승부를 펼칠 수 있는 수준으로 올라섰다. 우상혁은 "바르심 선수가 아시안게임에 나오지 않았다면 오히려 슬펐을 것 같다. 더 재미있는 경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기대했다.
실제로 우상혁과 바르심은 일사천리로 다른 선수들을 따돌렸다. 아시아 무대에서 세계선수권 같은 경쟁을 펼쳤다. 열심히 뒤를 쫓던 시노 도모히로(일본·2m29)가 2m31를 넘지 못하고 3위를 확정한 뒤에도 둘은 나란히 2m31과 2m33을 1차 시기에서 뛰어넘으며 팽팽한 승부를 이어갔다.
우상혁과 바르심의 희비는 결국 올 시즌 우상혁의 최고 기록인 2m35에서 갈렸다. 바르심은 1차 시기에서 가볍게 성공해 아시안게임 신기록을 작성했다. 반면 우상혁은 바에 몸이 걸려 함께 매트로 떨어졌다.
높이뛰기는 세 번 연속 실패 시 탈락이 확정된다. 우상혁은 금메달 도전을 위해 2차 시기 높이를 바르심과 같은 2m37로 올렸다. 과감한 시도였다. 두 팔을 벌려 함성을 유도하는 특유의 준비 동작으로 기운을 한껏 끌어 올렸다. 그러나 역시 무리였다. 2차 시기와 3차 시기 모두 실패로 끝났다. 바르심도 끝내 2m37는 넘지 못했지만, 2m35의 기록으로 금메달을 가져갔다. 동시에 우상혁은 역대 아시안게임 남자 높이뛰기에서 2m33을 넘고도 우승하지 못한 두 번째 선수로 기록됐다. 첫 번째 선수는 9년 전 인천 대회의 장궈웨이(중국)였다. 그때도 바르심이 2m35를 넘어 금메달을 가져갔다.
우상혁의 별명은 '스마일 점퍼'다. 그는 경기 후 은메달을 목에 걸고 다시 활짝 웃었다. "2m33을 1차 시기에 넘었다는 데에 의미를 두고 싶다. 내 최고 기록인 2m35까지 넘고 한국 신기록(2m37)까지 세우고 싶었는데, 이루지 못한 게 조금은 아쉽다"며 "내년 파리 올림픽이 1년도 안 남았으니 잘 준비해서 더 좋은 기록을 내고 싶다"고 했다.
바르심과 우상혁의 상대 전적은 이제 2승 10패가 됐다. 열 번을 졌지만, 다른 높이뛰기 선수들에게는 바르심을 두 번 이긴 것만으로도 대단한 성과다. 우상혁 역시 다시 한번 최고의 기량을 보인 바르심에게 경의를 표현했다. "바르심과 경기하는 게 정말 재미있다. 그 선수와 선의의 경쟁하면서 내 실력이 더 늘고 있는 것 같다"며 "동경했던 바르심과 같은 높이에 바를 두고 경쟁하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다. 바르심 덕에 흥미롭고, 재미있는 높이뛰기를 했다. 그것만으로도 기쁘다"고 했다. 바르심도 우상혁과의 승부에 관해 "재미있는 경기였다. 나도 즐겁게 경쟁했다"고 화답했다.
우상혁은 이미 파리 올림픽 기준 기록(2m33)을 통과해 사실상 올림픽 출전권을 확보했다.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놓친 아쉬움은 올림픽 금메달을 향한 새 원동력이 됐다. 실제로 그동안 주요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낼 때마다 "내게 가장 중요한 대회는 파리 올림픽"이라고 강조하곤 했다. 2년 전 도쿄 올림픽에선 메달까지 한 계단이 모자랐지만, 파리에선 반드시 시상대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게 궁극적인 목표다.
우상혁은 "파리에선 장마르코 탬베리(이탈리아)와 바르심이 나를 무서워하게 만들고 싶다"고 거듭 각오를 다졌다. 탬베리는 부다페스트 세계선수권에서 1위에 오른 선수다. 탬베리와 바르심 모두 강력한 올림픽 금메달 후보로 꼽힌다. 이들과 대결해야 하는 우상혁에게 아시안게임 은메달은 '결과'가 아닌 '과정'이다. 그는 내년 7월 파리 하늘에 태극기를 휘날릴 생각이다.
중국 항저우=배영은 중앙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