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리 세 번 동메달 뒤 복식 남북 대결서 금메달 따내…“아직도 키 자라고 있어요”
아시안게임 탁구는 3·4위 결정전 없이 준결승에서 패한 두 팀에 공동 동메달을 준다. 신유빈은 첫 세 종목에서 동메달만 주르륵 땄다. 매번 준결승에서 패해 결승에 못 올랐다는 의미다. 첫 종목이었던 지난달 25일 여자 단체전 준결승에서 일본에 패한 뒤에는 취재진과 인터뷰하다 눈물을 보였다. 여자 대표팀 에이스인 그가 두 번의 단식 경기에서 모두 졌기 때문이다.
세계 최강 중국을 준결승에서 만나지 않게 된 한국은 1990년 베이징 대회 이후 33년 만의 첫 단체전 결승 진출을 노렸다. 세계 8위로 한국 선수 중 랭킹이 가장 높은 신유빈이 이날 1단식과 4단식 주자로 나서 승부의 흐름을 이끌어야 하는 중책을 맡았다. 그러나 1단식에서 자신과 세계 랭킹이 비슷한 하야타 히나(9위)에게 0-3으로 완패했다. 4단식에서는 히라노 미우(16위)와 맞붙어 역시 1-3으로 졌다. 특히 4세트에선 0-6까지 끌려가다 8-8로 따라잡고도 막판 뒷심이 떨어져 승기를 내줬다.
신유빈은 "처음 출전한 아시안게임에서 언니들 도움으로 첫 메달을 함께 딸 수 있어서 감사하다"면서도 "이겼으면 좋았을 텐데, 모든 게 항상 내 뜻대로 되진 않는 것 같다. 문제점을 점검하고 보완해서 남은 경기를 치러야 할 것 같다"며 울먹였다.
신유빈의 눈물은 그게 마지막이었다. 여자 복식에 함께 출전한 '띠동갑' 언니 전지희(31·미래에셋증권)는 "에이스는 누구에게나 너무 무겁고 큰 자리다. 우리 중 다른 누가 그 역할을 맡아도 유빈이만큼은 못할 거다. 유빈이는 슬퍼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신유빈도 주변의 격려 속에 곧 특유의 기합을 되찾았다. 또랑또랑한 눈빛으로 다시 탁구채를 쥐었다.
신유빈이 금메달을 목에 걸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임종훈(26·한국거래소)과 짝을 이룬 혼합복식 준결승에서 세계선수권 챔피언인 중국의 왕추친-쑨잉사 조에게 0-4로 졌다. 두 번째 동메달이었다. 홀로 출전한 여자 단식에서도 준결승에서 쑨잉사(중국)에 0-4로 완패했다. 세 번째 동메달이었다. 세계 1위이자 중국의 에이스인 쑨잉사는 여자 탁구의 '보스'로 불린다. 신유빈과 여섯 번 만나 여섯 번 모두 이겼다. 만리장성의 높은 벽을 두 번 연속 실감했지만, 신유빈은 울지 않았다. "이제 동메달이 세 개라 한 번은 메달색을 바꿔 보고 싶다"는 농담으로 재치 있게 넘겼다.
신유빈은 결국 전지희와 함께 출전한 여자 복식에서 메달 색을 금빛으로 바꿨다. 준결승에서 일본의 하리모토 미와-기하라 미유 조를 4-1로 꺾고 2022년 부산 대회의 석은미-이은실 조 이후 21년 만에 아시안게임 여자 복식 결승에 올랐다. 결승에선 북한의 차수영-박수경 조와 33년 만에 아시안게임 결승 남북 대결을 펼쳤다. 신유빈과 전지희가 4-1로 이겨 아시아 정상에 섰다. 한국 탁구가 21년 만에 따낸 아시안게임 금메달이었다.
신유빈은 그 순간을 마음껏 즐겼다. 전지희와 함께 미리 준비한 '하트 세리머니'를 펼쳤다. 시상대 옆에 무뚝뚝한 표정으로 서 있던 북한 선수들에게 "같이 사진 찍자"며 먼저 손짓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태극기를 흔들다 말고 잠시 멈춰 유심히 살펴보더니, "좌우 문양이 바뀌었다"며 고쳐들기도 했다.
신유빈은 시상식이 끝난 뒤 싱글벙글 웃으며 금메달을 취재진에게 보여줬다. 그리고 "너무 신기하다. 우리 집에 금메달이 생겼다!"며 환호했다. 열아홉 금메달리스트의 솔직한 '한 줄 평'에 주위가 웃음으로 물들었다. 신유빈은 "사실 나는 작년의 부상 때문에 이 자리에 서지 못했을 수도 있었던 선수다. 운 좋게 경기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열심히 뛰었다"며 "성적까지 잘 나와서 평생 잊지 못할 첫 아시안게임이 된 것 같다"고 감격했다.
신유빈은 이번 대회에서 전지희라는 최고의 파트너와 함께 최고의 성과를 냈다. 중국계인 전지희는 중국에서 탁구를 하다 2008년 한국으로 와 2011년 귀화했다. 그 후 10년 넘게 한국 탁구의 에이스로 활약하다 이번 대회에서 12세 어린 후배 신유빈과 함께 첫 종합대회 금메달을 손에 넣었다. 그 사실을 아는 중국 관중은 전지희가 중국이 아닌 다른 나라 선수와 경기할 때는 자국 선수처럼 우렁찬 응원을 보내곤 했다. 전지희는 "중국에서 탁구를 할 때는 내 수준이 떨어져 더 높은 자리에 못 올라가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이 다시 탁구 인생의 기회를 주셔서 제2의 인생을 출발할 수 있었다"며 울컥했다.
그런 전지희를 지켜보던 신유빈은 "언니는 실력이 정말 탄탄한 선수다. 복식 경기를 함께할 때 기술적으로 믿음을 주고, 내가 자신 있게 플레이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존재"라고 신뢰와 감사를 보냈다. 전지희도 "정말 행복하고, 유빈이를 만날 수 있어서 정말 고맙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기쁘다"고 화답했다.
신유빈은 이제 파리 올림픽을 향해 나아간다. "아직 파리 올림픽 국가대표가 결정되진 않았지만, 내가 출전한다면 지금처럼 늘 하던 대로 연습을 착실히 해서 후회 없는 경기를 하고 싶다"고 각오를 다졌다. 전지희도 "유빈이 실력이 많이 올라오고 있기 때문에 파리 올림픽 메달 도전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세계 랭킹을 더 올리고 부상 관리를 잘해서 유빈이와 한 번 더 올림픽에 나가 메달을 따고 싶다"고 했다.
신유빈은 첫 번째 금메달을 목에 걸고 항저우를 떠나면서 뜻밖의 신체 비밀(?)도 하나 공개했다. "성장이 멈춘 줄 알았는데, 키(1m69㎝)가 아직 자라고 있다. 키는 크면 클수록 좋은 것 같다"고 했다. 파리 올림픽에선 키도, 실력도, 멘털도 더 자란 '삐약이'를 보게 될 수 있다.
중국 항저우=배영은 중앙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