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 에이전트 보라스와 손잡아…“샌프란시스코·샌디에이고·양키스가 관심 보여”
이정후는 이날 3개월 만의 복귀전이자 올 시즌 마지막 홈 경기를 치렀다. 지난 7월 27일 왼쪽 발목 수술을 받아 시즌을 조기 마감한 듯했는데, 빠른 속도로 회복과 재활을 마치고 홈팬들 앞에 다시 서는 의지를 보였다. 올해는 그가 KBO리그에서 뛰는 마지막 시즌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샌프란시스코 단장도 지켜본 고별전
이정후는 올 시즌이 끝나면 포스팅 시스템(비공개 경쟁입찰)을 통해 MLB에 도전한다. 이미 그에게 관심을 보이는 구단이 많아 MLB 진출은 기정사실로 여겨진다. 이정후와 키움 팬들에게 이날 삼성전은 사실상의 '작별 인사'나 다름없었다.
이정후는 이날 선발 출장하지 않았지만, 키움이 5-3으로 앞선 8회 1사 후 대타로 타석에 섰다. 고척스카이돔 관중석이 들썩였고, 우렁찬 육성 응원이 쏟아졌다. 퍼텔러 단장도 자리에서 일어나 기다리던 선수의 등장을 박수로 환영했다. 헬멧을 벗어 관중에게 정중하게 인사한 이정후는 코끝이 찡한 표정으로 잠시 감정을 추슬렀다. 그리고 삼성 투수 김태훈과 12구 접전을 벌인 끝에 3루수 땅볼을 쳤다. 1루에서 아웃되고 더그아웃으로 돌아가는 이정후를 향해 다시 한 번 큰 박수가 쏟아졌다. 2017년부터 키움을 지탱해온 활약했던 젊은 주장에게 팬들이 보내는 감사 인사였다.
키움 구단도 경기 후 이정후를 위한 특별한 송별회를 준비했다. 전광판을 통해 이정후의 데뷔 시절부터 지난해 정규시즌 최우수선수(MVP)에 등극하기까지의 과정이 담긴 하이라이트 영상을 상영했다. 관중들은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하고 이정후와의 추억을 감상했다. 일부 팬은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이정후는 "전날 밤부터 많이 설랬다. 긴장도 많이 했다. 팬들에게 홈구장에서의 내 마지막 모습을 보여드린다는 생각에 열심히 준비했다"며 "7년이라는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는 사실이 느껴졌다. 앞으로 7년보다 더 긴 야구 인생이 남았겠지만, 내가 처음 시작했던 이 7년은 가슴 속에서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다"는 소감을 밝혔다.
#이제 MLB로 향하는 이정후
이정후는 역사적인 선수다. KBO리그에서 7시즌 뛰는 동안 통산 타율 0.340, 출루율 0.491, 장타율 0.407, 안타 1181개, 홈런 65개, 515타점, OPS(출루율+장타율) 0.898이라는 놀라운 성적을 남겼다. 데뷔 때부터 남달랐다. 2017년 고졸 신인 최초 전 경기 출장과 역대 신인 한 시즌 최다 안타(179개) 기록을 작성하면서 신인왕에 올랐고, 곧바로 국가대표 주전 외야수로 자리 잡았다. 2021년에는 처음으로 타격 1위에 올라 아버지 이종범(현 LG 트윈스 코치)과 함께 세계 최초의 부자(父子) 타격왕으로 기록됐다.
특히 지난 시즌엔 142경기에서 타율 0.349(553타수 193안타), 홈런 23개, 113타점, 출루율 0.421, 장타율 0.575을 기록하면서 타격 5관왕(타율·타점·안타·출루율·장타율)을 차지해 만장일치에 가까운 지지 속에 정규시즌 MVP로 선정됐다. 아버지가 보유했던 역대 최소 경기 1000안타 기록도 779경기에서 747경기로 단축했다. 한국 무대에서 더는 이룰 게 없는, 최고의 타자로 우뚝 섰다.
이정후는 결국 키움 구단과 상의 끝에 해외 진출 가능 시한(7년)을 채운 올해 말 MLB 진출에 도전하기로 합의했다. 미국 언론도 이 소식을 일제히 보도할 정도로 큰 관심을 모은 행보였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MLB 최고 에이전트인 스콧 보라스와 대리인 계약을 하면서 본격적인 준비를 시작했다. 보라스는 선수에게 유리한 조건을 이끌어내는 협상 기술로 MLB 최고 몸값의 역사를 잇달아 바꿔온 에이전트다. 구단에게는 '악마', 선수에게는 '천사'로 통한다. 박찬호, 김병현(이상 은퇴), 추신수(SSG 랜더스), 류현진(토론토 블루제이스) 등 한국인 빅리거들도 MLB 계약 때 그를 대리인으로 내세워 '대박'을 쳤다. 지난 3월 미국 애리조나에 차려진 키움 스프링캠프에는 일찌감치 이정후의 성공 가능성을 확인하려는 MLB 스카우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올 시즌엔 부상과 슬럼프로 예년만 못한 성적을 냈지만, 이정후의 진가는 지난 6년간 충분히 증명됐다. 10월 10일 키움의 홈 최종전에 이정후를 보러 온 MLB 관계자는 샌프란시스코 단장만이 아니었다. 뉴욕 양키스와 뉴욕 메츠,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보스턴 레드삭스 관계자도 이정후의 몸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끝까지 관중석을 지켰다. 이정후는 타격한 뒤 1루까지 전력 질주해 발목에 더는 이상이 없음을 보여줬고, 9회 초 중견수로 나서 수비도 무사히 소화했다.
이정후는 MLB 진출의 관문으로 포스팅 시스템을 이용하게 된다. 2018년 개정한 현행 규정에 따르면, MLB 사무국이 이정후를 포스팅 공시한 이후 30일 동안 MLB 30개 구단은 모두 자유롭게 협상을 벌일 수 있다. 현지에선 "20개가 넘는 구단이 이정후의 포스팅에 참여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그만큼 이정후를 향한 관심이 뜨겁다는 의미다.
#이정후 인기는 벌써 폭발적
이유가 있다. 다가오는 MLB 스토브리그에는 대형 야수 프리에이전트(FA)가 많지 않다. 공·수·주에서 충분한 검증을 거친 이정후는 상대적으로 몸값까지 덜 비싸 더 인기가 많다. 가장 적극적인 구단은 역시 단장을 직접 파견한 샌프란시스코다. 선수단 구성을 진두지휘하는 수장이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와 자신의 존재를 노출했다는 건 "이정후는 반드시 우리가 잡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거나 다름없다.
실제로 샌프란시스코는 올해 11명의 선수가 중견수 수비를 소화했을 정도로 확고부동한 주전 중견수가 없었다. 구단이 큰 기대를 걸고 있는 유망주 루이스 마토스가 올해 빅리그에 데뷔해 중견수로 57경기에 나섰지만, 아직은 주전으로 자리잡기엔 시간이 필요하다. 샌프란시스코 구단의 파르한 자이디 야구운영부문 사장은 현지 언론과 인터뷰에서 "한국에서 (키움) 동료로 뛴 김하성이 샌디에이고에서 성공한 덕분에 이정후의 평가가 높아졌다. 한국에 방문해 이정후를 여러 번 체크했고, 후반기 부상으로 결장했으나 건강을 되찾을 것"이라고 직접적으로 관심을 표현하기도 했다.
미국 언론도 이정후의 행선지를 예측하거나 성공 가능성을 점치는 보도를 이어가고 있다. CBS스포츠는 최근 MLB 포스팅에 참여할 아시아 선수 3명을 집중 조명하는 기사에서 이정후를 소개하면서 "왼손 타자로 7시즌 동안 3할 4푼대의 타율, 장타율 0.407, 출루율 0.491을 기록하고 있다. 65개의 홈런을 날렸고, 69개의 도루를 기록했다"며 "타격 면에서 분명히 매력이 있는 선수다. 지금까지 주자와 중견수로서도 플러스 능력을 보여줬다"고 총평했다. 이 매체는 또 "KBO리그 출신 선수들이 타자로서 MLB 투수들의 피칭에 대응하는 것에는 회의론이 항상 존재해왔다. 적어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필요할 수 있다"면서도 "이정후는 5시즌 연속 삼진보다 볼넷이 더 많았다. 평균 이상의 콘택트 능력과 스트라이크존 관리 능력을 보여줬다. 올해는 9%의 헛스윙을 했고, 직구 헛스윙은 3%였다"고 이정후의 기록을 상세히 분석했다.
미국 스포츠 전문 매체 디 애슬레틱도 최근 '양키스가 두 명의 국제 스타를 영입할까'라는 제하의 기사를 통해 이정후와 일본인 투수 야마모토 요시노부(오릭스 버펄로스) 관련 소식을 상세히 다뤘다. 이 매체는 이정후에 대해 "왼손 타자 이정후의 스윙과 (홈으로부터) 오른쪽 펜스가 짧은 양키 스타디움 특성이 맞물리면 홈런 개수도 늘어날 것"이라며 "양키스도 이정후 영입전에 뛰어들 것이다. 또 김하성이 있는 샌디에이고나 샌프란시스코도 그와 연관성이 있다"고 짚었다. 디 애슬레틱은 앞서 "김하성 영입으로 성과를 낸 샌디에이고가 이정후에게도 관심이 많다. 고위급 인사 여러 명을 한국으로 보내 이정후의 플레이를 분석했다"고 전했던 매체다.
CBS 스포츠 역시 이정후에게 가장 관심 있는 구단으로 샌프란시스코와 샌디에이고를 언급했다. "샌프란시스코는 중견수가 필요하다. 샌디에이고는 이정후가 김하성의 옛 동료라는 것에서 더 장점을 찾을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김하성이 고마운 이정후
이정후는 자신을 둘러싼 여러 파장에 동요하지 않고 차분하게 MLB 진출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계약 문제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다. 어느 구단과 이야기할지도 아직 모른다. 포스팅이 시작되면 에이전트가 잘 진행해주리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또 "앞서 미국에서 뛰었던 선배들에게 물어보면 '현지 적응'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시더라. 그래서 영어 공부도 조금씩 하고 있다"며 "매일매일 하지 않아서인지 자꾸 까먹는다. 앞으로는 더 열심히 하려고 한다"고 웃어 보였다.
때마침 이정후의 MLB 도전에 가장 중요한 도움을 줄 '조력자' 김하성도 귀국했다. 이정후와 키움 시절부터 절친했던 김하성은 2021년 샌디에이고와 4+1년 최대 3900만 달러에 계약한 뒤 지난해 풀타임 주전 내야수로 도약했다. 이어 올 시즌 치열한 내부 경쟁을 뚫고 샌디에이고의 주전 2루수이자 리드오프로 안착하면서 KBO리그 출신 야수의 위상을 높였다. 올해 152경기에 출전한 김하성의 성적은 타율 0.260, 홈런 17개, 60타점, 84득점, 38도루다. 홈런 3개가 모자라 20홈런-20도루 클럽 가입은 실패했지만, 현지의 많은 언론이 김하성을 "올 시즌 샌디에이고의 MVP"로 꼽을 정도로 존재감을 뽐냈다. 이정후는 "평소에도 하성이 형과 많은 얘기를 나눈다. 형의 미국 진출 과정을 옆에서 보면서 나도 많이 배웠다"며 "이제 귀국했으니 더 많이 물어보려고 한다"고 했다.
김하성 역시 이정후의 MLB 진출을 기다리고 있다. 그는 귀국 인터뷰에서 "정후에게는 조언할 게 딱히 없다. 워낙 완성형에 가까운 타자다. 본인이 직접 스프링캠프 때부터 MLB 투수들 공을 많이 보고 적응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 같다"며 "정후에게 내가 느낀 걸 충분히 얘기해주려고 한다. 아무래도 쉬운 곳이 아니기 때문에 '준비를 잘 해야 한다'고 말해줄 것"이라고 했다.
이정후의 행선지 후보 중 1순위로 꼽히는 샌프란시스코는 샌디에이고와 함께 내셔널리그 서부지구에 소속돼 있다. 이정후가 샌프란시스코 유니폼을 입는다면 김하성과 같은 경기에서 만날 확률이 높아진다. 그래도 김하성은 "그런 점은 딱히 신경 쓰이지 않는다. 최대한 정후가 잘 할 수 있는 팀에 가서 좋은 모습 보여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또 샌디에이고에서 한솥밥을 먹게 될 가능성에 대해서도 "한국에서 이미 같은 팀에서 많이 뛰었기 때문에 정후가 알아서 해야할 일이다. 그런 부담은 주지 않으려고 한다"고 응원했다.
물론 김하성은 이정후에게 이미 큰 도움을 줬다. 올 시즌 김하성의 활약이 이정후의 MLB 진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김하성은 "아직 부족하지만 나도 결국에는 (이전에 먼저 빅리그에 진출했던) 메이저리거 선배들의 덕을 봤다. 그 선배들에게 너무 감사하다"며 "이정후도 나한테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고 웃어 보였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