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LF 사태 여진 여전한데, 8조 규모 ELS 반토막…금소법 적용 때 불완전판매 했다면 손해배상 처벌
#선진국선 개인에 권유 안해
지난 11월 말 금융투자업계 자료를 종합하면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 등 5대 은행에서 내년 상반기에 만기가 도래하는 홍콩H지수 연계 ELS의 규모는 8조 4100억 원이다. 국민은행이 4조 7726억 원으로 압도적으로 많고 농협은행과 신한은행도 각각 1조 4833억 원, 1조 3766억 원으로 상당하다. 4년 전 파생결합증권(DLF) 사태를 겪었던 하나은행과 우리은행은 각각 7526억 원, 249억 원 수준이다.
H지수는 홍콩 증시에 상장된 중국 기업 가운데 50개 종목을 추려 산출한 지수다. 2020년 말 1만 선을 넘어 2021년 2월 12271.60까지 올랐다가 현재 6000선으로 반토막이 났다. 내년 상반기 만기도래분의 40%인 3조 원가량이 손실 구간에 접어들었다. 특히 가입기간 중 지수가 기준선(통상 50%) 아래로 한 번이라도 떨어지면 만기에 최종 상환 기준선(통상 70%) 수준까지는 회복돼야 약정된 원리금을 받을 수 있는 '녹인(Knock-in)형'이 가장 많다. H지수가 만기 전에 7000~8000선까지는 올라야 원금 손실을 막을 수 있다.
ELS 기대수익은 은행 이자보다 높지만 기초자산 가격이 폭락하면 큰 손실을 입을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은행 이자보다 높은 수익을 낼 확률이 상대적으로 높지만 낮은 확률인 기초자산 폭락이 발생하면 투자금의 절반 이상을 날릴 수 있는 구조다. 가격변동 기준이 되는 기초자산의 변동성은 물론 관련 옵션시장에 대한 이해까지 필요한 금융상품이다. 난이도가 상당히 높아 선진국 금융회사들은 일반 개인고객에게는 권유조차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국내에서는 ELS가 꽤 높은 확률로 예금 이자의 몇 배를 벌 수 있는 상품으로 알려지면서 불완전판매 가능성에도 상당기간 인기를 누려왔다. 이번 사태에 대해 ‘터질 게 터졌다’는 평가가 전문가들 사이에서 나오는 이유다. 금융상품 이해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은행들이 그동안 이 상품을 제대로 팔아왔을리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금소법과 자본시장법의 차이
법이 정한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한 불완전판매를 했다면 처벌이 당연하다. 불완전판매 처벌은 손해배상이다. 그런데 법이 애매하다. 금융소비자보호법(금소법)은 2020년 3월 24일 제정됐지만 시행은 1년 뒤인 2021년 3월 24일부터다. 금소법 전에는 자본시장법이 유효하다. 금소법은 법을 어겨서 금융상품을 팔면 금융회사가 손해배상을 하도록 포괄적으로 정하고 있다. 법을 어긴 계약은 해지할 수도(위법계약해지권) 있다. 반면 자본시장법으로는 설명의무를 위반했을 때 손해 배상만 강제할 수 있다.
금융상품 판매자는 일반 투자자에게 투자권유를 하기 전에 투자목적, 재산상황, 투자경험 등의 정보를 파악하고 이에 비춰 적합하지 아니하다고 인정되는 투자는 권유해서는 안된다. 적합성 및 적정성 원칙이다. 은행이 노후자금의 상당 부분인 것을 알고도 원금 손실이 크게 날 수도 있는 상품에 가입시켰다면 안 된다는 뜻이다.
금소법에서는 이 원칙을 위반하면 손해배상을 해야 하지만 자본시장법은 설명의무 위반만 손해배상 책임을 명시할 뿐 적합성 및 적정성 원칙 위반에 대해서는 손해배상 근거 조항이 없다. 금융상품 판매자는 일반 투자자가 금융투자상품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야 한다는 의무다. 설명의무 위반이 인정되려면 투자판단 또는 금융상품의 가치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항을 거짓 또는 왜곡하거나 중요한 사항을 빠뜨리는 경우여야 한다.
ELS가 파생금융상품이고 구조가 복잡하다는 점에서 설명의무 위반 가능성이 높아진다. 특히 증권사와 달리 파생금융상품 이해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은행 직원들이 핵심 위험을 얼마나 잘 설명했을지도 미지수다. 반면 국내 금융권에서 ELS 상품이 오랜기간 판매된 만큼 이번에 손실 위험에 처한 투자자들도 이미 수차례 투자 경험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 불완전판매로 수익을 낼 때는 괜찮고, 손실을 내면 배상을 받으려 한다는 지적 앞에 곤란할 수 있다. 설명의무 위반이 성립되지 않으면 자본시장법상 손해배상은 쉽지 않다.
이 때문에 2019년 DLF 사태 해결은 금감원의 중재로 은행들이 자발적 형식으로 손해를 배상하는 형식을 택해야 했다. 그럼에도 손해배상을 받지 못한 일부 투자자는 소송을 통해 배상을 요구하고 있다. 아직 관련 소송은 진행 중이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최근 언론과 만난 자리에서 “여유자금을 크게 불려 달라는 고객인지, 노후 생계자금인데 정기예금 대신 손실이 나지 않는다며 (ELS를) 권유했는지 등 다양한 경우의 수를 보겠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금감원 CEO 제재권, 이번에도?
금융당국이 은행들에 법적 근거 없이 손해배상을 강요했다가는 은행들이 소송으로 대응할 수 있다. 은행 경영진 입장에서 뚜렷한 근거 없이 손해배상에 나서면 자칫 배임 추궁을 당할 빌미가 된다. 그럼에도 2019년에는 금감원이 법 위반시 CEO를 제재할 수 있는 점을 지렛대로 삼아 일부 배상을 이끌어 냈다. CEO 입장에서 중징계를 받으면 연임은 물론 다른 금융회사 취업도 제한돼 치명적이다.
금융위는 최근 라임·옵티머스 사모펀드 사태 책임을 물어 증권사 CEO들에게 중징계를 확정했다. 박정림 KB증권 대표는 직무정지 3개월을, 정영채 NH투자증권 대표는 문책경고 상당의 제재를 받아 사실상 퇴진이 불가피해졌다. 무려 4년을 끌던 제재가 ELS 사태가 터진 시점에 이뤄진 셈이다. 진옥동 전 신한은행장(현 신한금융지주 회장)도 주의적 경고를 받았다. 조용병 전 신한금융지주 회장(차기 은행연합회장)에겐 주의 상당의 제재가 확정됐다. 은행은 물론 은행의 최대주주인 은행지주 회장에까지 책임을 물은 것이다.
그런데 현 정부 들어 은행과 5대 은행지주 경영진은 모두 바뀌었다. 국민은행 이재근 행장은 2022년 취임했다. 행장 취임 전에는 부행장으로 영업을 총괄했지만 당시 행장이 엄연히 있는데 그만 금융당국의 중징계를 받을 가능성은 낮다. NH농협은행 이석용 행장도 마찬가지다. 올해 1월 은행장 취임 전에는 농협중앙회에서 일했었다. 역시 올해 취임한 이승열 하나은행장도 2021년 당시 역할은 경영지원담당 부행장이었다. 의외로 가장 이번 사태에 민감할 이는 진옥동 신한지주 회장이다. 2021년 당시 신한은행장이었다. 올해 회장이 됐지만 은행장 시절 책임으로 주의적 경고를 받았는데 다시 또 징계를 받으면 자칫 연임의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채권·외환시장 충격 우려도
ELS는 투자금으로 채권을 매수한 후 채권에서 확보된 이자로 기초자산 관련 옵션을 사는 구조다. 옵션에서 수익이나 손실이 나지 않아도 원금은 지킬 수 있는 이유다. 기초자산 가격 하락으로 옵션에서 큰 손실을 입게 되면 만기 때 투자채권의 원금으로 이를 메울 수밖에 없다. ELS 만기와 채권만기가 일치한다면 유동성 확보에 큰 어려움이 없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시장에서 채권을 팔아 현금을 구해야 한다. 자칫 채권가격이 급락(금리 급등)할 수 있다. 회사채 투자의 큰 손이었던 ELS 발행이 위축되면 향후 시장 유동성도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ELS 투자자들이 옵션으로 큰 손해를 봤다면 거래 상대방은 이익을 봤다는 뜻이다. 옵션 거래의 상대방은 대부분 글로벌 투자자들이다. 즉 그들에게 수익금을 주려면 달러가 필요하다. ELS 대규모 손실로 단기에 막대한 달러 수요가 발생하게 되면 외환시장에는 부담이다. 실제 코로나19 팬데믹(대유행)으로 글로벌 증시가 급등했을 때 ELS 관련 마진콜(추가 증거금 납입 요청)로 증권사들의 외화조달에 비상이 걸린 전례도 있다. 다만 2조~3조 원 규모의 채권과, 1조~2조 원 규모의 달러가 갑자기 움직여도 금융시스템 전반을 흔들기는 어렵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최열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