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드류 클린턴 트럼프 게이츠 촘스키 브린…엡스타인의 고객? 범죄행위 연관 단정짓긴 어려워
미국의 유명 펀드매니저이자 금융 부호였던 제프리 엡스타인의 고객 명단이 최근 뉴욕 맨해튼연방법원의 명령에 따라 일반에 공개됐다. 더 정확히 말하면 미성년자와 부적절한 성관계를 맺어온 엡스타인과 어떤 식으로든 친분이 있던 인물들의 명단이다. 지금까지 번호로만 기록되어 있던 150여 명의 인물들 가운데는 정·재계 유명인사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어 충격을 던져줬다. 이미 실명이 언급되어온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 영국의 앤드류 왕자를 포함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리처드슨 뉴멕시코 전 주지사, 세르게이 브린 구글 창업자 등이 여기에 포함됐다.
이름이 언급됐다고 해서 반드시 직접적인 범죄 행위와 관련이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가령 엡스타인을 통해 재정 자문을 구하거나, 저택을 방문하거나, 단순히 전용기에 함께 동승한 경우에도 이름이 거론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 만났건 미성년자를 상대로 한 성범죄자와 연루됐다는 점은 평판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게 될 전망이다.
미국 사교계에서 마당발로 통했던 엡스타인은 2019년 미성년자 성착취, 성매매 등을 저지른 혐의로 체포됐다. 뉴욕, 플로리다 등에서 미성년자 20여 명을 정·재계 고위인사들에게 연결해주는 식으로 성매매를 했으며, 몰래 설치한 카메라로 영상을 촬영해 성상납을 받은 인물들을 협박한 것으로도 알려졌다.
하지만 그는 죗값을 치르지 않았다. 재판을 받던 중 교도소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기 때문이다. 당시 나이는 66세였으며, 만일 유죄가 인정될 경우 최대 45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을 예정이었다. 반면 그의 조력자이자 언론재벌 로버트 맥스웰의 딸인 길레인 맥스웰은 성매매 조직에 가담한 혐의로 현재 징역 2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맥스웰은 2021년 말 재판에서 성관계를 목적으로 엡스타인에게 어린 소녀들을 제공하고, 그들 가운데 일부를 스스로 성적으로 학대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번에 공개된 법정 문서는 엡스타인에게 10대 시절 성착취를 당했다고 주장한 버지니아 주프레(41)가 길레인 맥스웰을 상대로 제기한 명예훼손 소송과 관련된 것이었다. 이 문서에는 범죄에 연루된 인물을 비롯해 피해자, 증인 등 150명의 이름이 익명으로 기재되어 있었다. 가령 ‘존 도(John Doe) 36’은 클린턴 전 대통령, ‘존 도 183’은 패션업계 거물인 레스 웩스너였다.
주프레는 법정 증언에서 정치인과 금융인 등 여러 유명 인사들과 성관계를 가졌다고 주장했다. 이 가운데는 ‘이름을 모르는 왕자’ ‘대형 호텔 체인의 소유주’ 등이 있었으며, 이 밖에 리처드슨 뉴멕시코 전 주지사, 앤드류 영국 왕자, 앨런 더쇼비츠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 유명 프랑스 모델 에이전트 장-뤽 브루넬, 미국 투자자 글렌 더빈 등도 있었다.
주프레가 처음 맥스웰을 만난 건 트럼프의 마라라고 리조트 스파에서 근무하고 있던 때였다. 맥스웰은 17세의 소녀였던 주프레에게 접근해 경력 여부는 상관없으니 엡스타인의 개인 마사지사로 일하는 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점차 주프레를 심리적으로 지배한 엡스타인은 상습적으로 미성년자인 주프레와 성관계를 맺기 시작했고, 더 나아가 자신의 비즈니스 파트너들에게도 마사지 서비스와 성관계를 제공했다.
공개된 문서에는 20세 때 마사지사로 고용됐던 요한나 쇼베리의 증언 내용도 담겨 있었다. 대학 캠퍼스에서 엡스타인과 맥스웰에게 스카우트된 쇼베리는 그 후 마사지와 함께 성행위를 하도록 강요당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엡스타인이 자신에게 클린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클린턴은 어린 여자를 좋아한다.”
또한 쇼베리는 “마이클 잭슨을 만난 적도 있다”고 말하면서 “팜비치에 있는 엡스타인의 집에서였다”라고 덧붙였다. 그런가 하면 2001년에는 엡스타인의 맨해튼 아파트에서 만난 앤드류 왕자가 소파에 앉아서 자신의 가슴을 만졌다고도 주장했다. 당시에 대해 쇼베리는 “아파트에 도착하니 앤드류 왕자와 주프레를 포함한 내 또래의 여자 몇 명이 있었다. 앤드류 왕자는 매우 매력적이었다”라고 증언했다. 그리고 이어서 “맥스웰이 왕자에게 줄 라텍스 인형을 선물로 가지고 왔다. 그때 누군가 다 같이 사진을 찍자고 제안해 모두 소파에 앉았다. 나는 왕자의 무릎 위에 걸터앉았고, 이때 왕자가 내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라고 회상했다.
쇼베리는 또한 트럼프 전 대통령을 만났던 경험에 대해서도 증언했다. 엡스타인과 함께 전용기를 타고 뉴저지주 애틀랜틱시티에 착륙한 그는 당시 엡스타인이 “좋다, 트럼프를 불러서 카지노로 가자”라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다만 트럼프를 만나서 마사지를 해준 적은 없었다고 덧붙였다.
법정 문서에서 ‘제인 도 005’라고 확인된 피해자는 캐롤린 안드리아노라는 여성이었다. 안드리아노는 재판에서 자신이 14세 때부터 어떻게 성관계를 위해 착취당했는지 자세하게 증언했다. 가령 맥스웰이 어떻게 자신을 엡스타인에게 비밀리에 제공했는지 자세하게 설명하면서 “나는 엡스타인과 100차례 이상 성관계를 가졌다”라고 진술했다. 그러면서 “내가 18세가 되자 그는 ‘너는 이제 너무 나이가 많다’라고 말했다”라고 주장했다. 안타깝게도 다섯 자녀의 어머니인 안드리아노는 약물 과다 복용으로 36세의 이른 나이에 사망했다.
이번에 공개된 문서에서 총 73차례 언급된 클린턴 전 대통령이 직접적으로 성범죄에 가담했는지 여부는 불투명한 상태다. 퇴임 후 엡스타인 전용기를 총 네 차례 이용하거나, 엡스타인과 맥스웰과 함께 사진을 찍거나, 혹은 2002년 성착취를 당한 젊은 여성에게 어깨 마사지를 받는 사진이 공개됐을 뿐이다. 숀태 데이비스라는 이 여성은 당시 클린턴에 대해 “그는 완벽한 신사였다”라고 회상한 바 있다. 데이비스의 대변인은 ‘데일리메일’ 인터뷰에서 “비록 사진이 이상해 보이지만 클린턴은 당시 완벽한 신사였고 어떤 범죄행위와도 연루되어 있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에 클린턴 측의 대변인은 “불법 행위는 없었다”라면서 “엡스타인의 끔찍한 범죄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엡스타인과 마지막으로 접촉한 지는 거의 20년이 됐다. 관계는 이미 오래 전에 정리했다”라고 주장했다. 엡스타인과 친분이 있었던 이유에 대해 클린턴은 “그는 뛰어난 금융가이자 성실한 자선가다. 국제시장에 대한 예리한 감각을 지니고 있으며, 21세기 과학에 대한 깊은 지식을 보유하고 있다”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주프레의 기억은 조금 달랐다. 주프레는 ‘억만장자의 플레이보이 클럽’이라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클린턴을 엡스타인의 개인 섬에서 봤던 때를 묘사했다. “엡스타인은 저녁 마사지를 받기를 원했다”라고 말한 주프레는 “저녁 식사 후 두 명의 아름다운 소녀를 양 팔에 끼고 어둠 속으로 걸어간 클린턴은 꽤 만족스런 표정이었다”라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저녁 식사 때 양쪽에 앉아있던 소녀들을 장난스럽게 쿡쿡 찌르면서 음담패설을 하기도 했다. 그들 사이에는 정숙함 같은 건 없었다. 힐러리가 그 자리에 없었던 덕분에 그의 볼썽사나운 면이 쉽게 드러났다”라고 비꼬았다.
주프레는 클린턴이 퇴임 후 한동안 주기적으로 엡스타인을 방문했다고 말하면서 “한번은 엡스타인에게 클린턴이 이 섬에서 무엇을 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엡스타인은 웃으면서 '그는 나에게 빚을 지고 있지'라고 말했다”라고 주장했다. 주프레는 “그는 내게 그게 어떤 빚인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나는 그게 뭔지 전혀 몰랐다”라고 덧붙였다.
트럼프 전 대통령 역시 엡스타인과 맥스웰과 한동안 친분이 있었다. 공개된 문서에서 네 차례 이름이 언급된 그는 1990년대 엡스타인의 개인 비행기로 네 차례 여행을 다닌 바 있으며, 2000년 마라라고에서 엡스타인, 맥스웰과 함께 촬영한 사진이 공개되기도 했다. 2002년 트럼프는 ‘뉴욕매거진’ 인터뷰에서 “나는 엡스타인과 15년 동안 알고 지냈다. 그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라고 칭찬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와 함께 있으면 매우 즐겁다. 심지어 그는 나만큼 아름다운 여자들을 좋아하고, 그들 중 대다수가 어린 편이다. 확실히 말하건대 그는 그의 사교 생활을 즐기면서 살고 있다”라고 흥에 겨워했다.
하지만 트럼프는 엡스타인이 체포되자 즉시 태도를 바꿨다. 2019년 인터뷰에서 그는 “이미 오래 전에 충돌이 생겨서 사이가 틀어졌다. 15년 동안 연락을 하지 않았다”면서 “분명히 말하건대 나는 그를 아주 좋아하지는 않았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팜비치의 모든 사람이 그러는 것처럼 그저 그를 알고 지냈을 뿐”이라고 변명했다.
피해자 가운데 한 명인 익명의 여성이 트럼프를 만난 경험담도 법정에서 공개됐다. 1994년 14세 때 엡스타인의 소개로 트럼프를 만났다고 주장한 이 여성은 “엡스타인은 익살스럽게 트럼프의 팔꿈치를 툭툭 치면서 ‘예쁘지?’라고 말했다. 그러자 트럼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모두 박장대소했다”라고 증언했다. 또한 이 여성은 “당시 불편함을 느꼈지만 너무 어려서 왜 그런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라고 덧붙였다.
이와 관련, 엡스타인의 친동생이자 부동산 개발업자인 마크 엡스타인은 2016년 대선 당시 형이 트럼프와 클린턴에 대한 은밀한 정보를 많이 갖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뉴욕포스트’ 인터뷰에서 “형은 나에게 ‘만약 내가 두 후보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폭로한다면 둘은 당장 선거를 중단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이번에 공개된 문서에서 총 67차례 언급된 앤드류 왕자의 범죄 행위는 비교적 구체적으로 알려져 있는 상태다. 엡스타인과 함께 17세였던 주프레를 성폭행한 혐의로 한 차례 기소된 그는 합의금을 내고 사건을 종결지었다.
하지만 모델 리사 필립스는 A&E 다큐멘터리 ‘앤드류 왕자의 비밀’에서 앤드류 왕자의 또 다른 피해자인 친구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의 친구는 2000년, 엡스타인의 개인 섬인 리틀세인트 섬에서 앤드류 왕자를 처음 보았고, 당시 엡스타인은 친구에게 “왕자와 성관계를 가지라”고 명령했다. 필립스는 다큐멘터리에서 “친구에게는 충격적인 일이었고, 그 후 친구는 변했다. 친구의 삶은 완전히 통제불능의 상태가 됐다”라고 증언했다.
왕실 전기 작가인 앤드류 로니는 해당 다큐멘터리에서 엡스타인과 앤드류 왕자야말로 “진짜 가장 친한 친구들”이라고 말하면서 “엡스타인과 맥스웰은 밸모럴과 샌드링엄과 같은 왕실 별장을 드나들었고, 윈저성에서 열린 앤드류 왕자의 사적인 생일 파티에도 초대됐다”라고 전했다.
빌 게이츠의 경우에는 엡스타인이 2008년 아동 성매매 사건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뒤에도 계속해서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또한 ‘월스트리트저널’은 게이츠가 2010년대 초 밀라 안토노바라는 브리지 플레이어와 바람을 피웠고, 이 사실을 알고 있던 엡스타인이 이를 빌미로 게이츠를 휘두르려고 했다고 보도했다. 게이츠와 안토노바의 관계는 무려 7년 동안 계속됐다.
엡스타인과의 친분에 대해 게이츠는 훗날 후회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호주 방송 ‘ABC7’에서는 “그와 저녁식사를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말했는가 하면, 2021년 CNN에 출연해서는 “그와 시간을 보낸 건 큰 실수였다”고 말하기도 했다. 다만 둘의 만남은 단지 비즈니스 차원이었으며, 전 세계적인 보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에게서 후원을 요청하고 있었다고 선을 그었다.
게이츠는 “나는 그가 세계 보건을 위해 수십억 달러를 기부할 것을 기대해 여러 차례 저녁식사 자리를 가졌다”고 말하면서 “하지만 진짜가 아닌 것처럼 보이자 관계를 정리했다”고 주장했다.
‘엡스타인 리스트’에 오른 또 다른 인물들로는 윌리엄 번스 중앙정보국(CIA) 국장과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명예교수이자 세계적인 언어학자인 노엄 촘스키도 있다. 문서에 따르면 엡스타인은 2014년 당시 오바마 행정부의 국무부 장관이었던 번스와 세 차례에 걸쳐 만남을 가졌다. 하지만 태미 쿠퍼먼 소프 CIA 대변인은 성명을 내고 번스는 엡스타인과 어떤 관계도 가진 적이 없다며 사실을 부인했다.
그런가 하면 엡스타인은 촘스키가 MIT에서 강의하던 2015년과 2016년, 수십만 달러를 기부하면서 여러 차례 만남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엡스타인의 개인 비행기를 타고 함께 뉴욕으로 날아가 영화감독 우디 앨런 부부와 저녁을 먹거나, 학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이 이 만남의 성격에 대해 묻자 촘스키는 이메일 답변을 통해 “첫째, 그건 당신들이 상관할 일이 아니다. 또는 그 누구도 아니다. 둘째, 나는 엡스타인을 알고 있었고, 가끔 만났다”라고 짧게 인정하는 답장을 보냈다.
미국의 마술사인 데이비드 코퍼필드는 문서에서 여섯 차례 언급됐다. 코퍼필드는 엡스타인이 초대한 저녁 식사 자리에 참석했으며, 당시 그 자리에는 몇몇 어린 소녀도 있었다. 엡스타인의 피해자 중 한 사람인 요한나 쇼베리는 “나는 어려 보이는 한 소녀에게 어느 학교에 다니는지 물었다. 분명히 대학은 아니었다. 아마도 고등학생일 가능성이 높았다”고 회상했다.
세르게이 브린 구글 공동창업자의 경우에는 2004년부터 2007년까지 자녀들을 위한 절세 신탁인 ‘교부자 유지 연금 신탁(GRAT)’ 설립과 관련해 브린에게 조언을 구하면서 만남을 가졌다. 브린은 엡스타인의 추천을 받아 JP모건체이스의 고객이 되었으며, 그때부터 이곳에 40억 달러(약 5조 원) 이상의 자산을 맡겨놓고 있다.
‘페이팔’과 ‘오픈AI’ 공동 창업자인 피터 티엘도 엡스타인과 여러 차례 만남을 가졌다. 일대일 면담을 하거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점심 또는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였다. 티엘은 엡스타인이 뉴욕 저택에 머무는 동안 만나야 할 10여 명의 유명 인사들 중에도 늘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이 관계에 대해 티엘은 2016년 인터뷰에서 “순진했다”면서 “엡스타인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충분히 생각하지 못했다”라며 후회하는 모습을 보였다.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