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살을 고슴도치처럼 맞고 전사” 기록 재현…사극에서 생략됐던 ‘목가리개’도 세심히 고증
KBS 2TV 사극 ‘고려 거란 전쟁’이 방송된 후 이 같은 반응이 쏟아졌다. 배우 지승현이 연기한 양규 장군을 향한 찬사다. 이순신 장군이 누구인가. 단순한 명장이나 영웅을 넘어 민족의 성웅(聖雄)으로 불리는 인물이다. 게다가 최근 ‘이순신 3부작’의 마지막편인 영화 ‘노량:죽음의 바다’가 상영 중임을 고려할 때 이런 수식어는 더할 나위 없는 상찬이다.
양규 장군에 대한 사료는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역사서에서 이름을 찾아보기 어렵고, 확인할 수 있는 업적이 많지 않으니 드라마나 영화 등을 통해 재조명받기도 어렵다. ‘고려 거란 전쟁’에서도 극을 이끌어가는 주된 인물은 현종과 강감찬이다. 하지만 16회까지 통틀어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은 인물은 단연 양규 장군이다. 양규 장군의 업적과 죽음이 극적 재미를 위해 부풀려지거나 극화되진 않았을까.
16회를 보자. 양규 장군은 수십만의 거란군이 쏘는 화살을 맞고 숨졌다. 비 오듯 쏟아지는 화살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한 보 한 보 전진했다. 그래야 거란군의 수장을 향해 활을 쏠 수 있는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거란군의 화살은 그런 양규 장군의 갑옷을 뚫고 피부를 파고들었고, 결국 양규 장군은 선 채로 숨을 거둔다.
더 없이 극적인 장면이다. 하지만 이는 사료에 남은 역사적 사실이다. “양규와 김숙흥은 화살을 고슴도치처럼 온몸에 맞고 함께 전사하였다.”(고려사 권94, 양규 열전)
엄밀히 말해 ‘고려 거란 전쟁’의 주인공을 현종과 강감찬이라 단정 지을 수 없다. 만약 두 사람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 사극의 제목은 ‘현종’ 혹은 ‘강감찬’이 됐을 것이다. 이에 대해 연출을 맡은 전우성 PD는 제작발표회에서 “강감찬과 귀주대첩이라는 고유명사에 대해서는 알지만, 역사적 맥락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며 “현종은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강감찬과 현종’을 해야 하나 싶기도 했다. 제일 직관적으로 우리가 할 이야기를 들려주는, 힘이 있는 제목”이라고 설명했다. 즉 그 시대를 살았던, 그 전쟁에 참여해 고려를 지킨 모두가 주역이란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양규는 ‘고려 거란 전쟁’의 조연이 아닌 또 하나의 주연이다. 20여 년에 걸쳐 진행된 고려 거란 전쟁은 크게 3차로 나뉜다. 서희가 외교 담판으로 강동6주를 회복한 1차를 비롯해 흥화진 전투 등으로 기억되는 2차 전쟁의 영웅은 양규 장군이다. 그리고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은 3차 전쟁에서 빛난다. 즉, ‘고려 거란 전쟁’의 16부까지는 양규 장군이 책임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란의 침략 명분은 그들이 승인한 고려의 왕인 목종을 폐하고 현종을 세운 ‘강조의 정변’이다. 결국 거란군에 붙잡히고 투항하지 않던 강조는 죽임을 당한다. 이후 거란군은 흥화진을 지키고 있는 양규 장군에게 강조의 거짓 서신을 보내 항복을 권유했으나 양규 장군은 굴하지 않고 맞설 뜻을 밝힌다.
당시 양규 장군은 흥화진 전투에서 3000명으로 거란의 40만 대군을 막아냈다. 흥화진 점령에 실패한 거란군은 곽주성으로 발길을 돌렸고 얼마 못 가 곽주성은 함락된다. 그리고 거란군은 곽주에 병사 6000명을 주둔시키고 다음 전투를 위해 전진한다. 이때 양규 장군의 업적이 또 한 번 빛난다. 1700명의 병사를 이끌고 곽주성을 탈환한 후, 붙잡혀 있던 포로 7000명을 구했다. 흥화진을 점령하지 못한 거란군이 양규 장군에 의해 곽주성까지 빼앗기자 크게 사기가 떨어진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이 위대한 업적은 ‘고려 거란 전쟁’에 와서야 비로소 후대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이다. 이 작품에서 양규 장군을 연기한 배우 지승현은 “이 작품을 접하기 전 양규 장군님을 몰랐다는 것이 부끄러웠다”고 말했다. 하지만 여전히 양규 장군의 얼굴을 제대로 알 순 없다. 초상화가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지승현은 “어떻게 생기셨을지, 초상화라도 한번 보고 싶다. 북에는 자료가 남아 있을 수도 있다고 한다”고 아쉬운 마음을 전했다.
‘고려 거란 전쟁’의 제작비는 약 270억 원이다. 회당 제작비를 따지자면 역대 국내 사극 최대 규모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특히 전쟁 장면에 공을 들였다. 전우성·김한솔 PD 공동 연출인데, 김 PD가 전쟁 장면 촬영은 전담하며 전문성을 높였다. 대형 야외 크로마키 세트장을 세워 실사와 컴퓨터그래픽(CG), 시작특수효과(VFX)가 접목된 장엄한 전투 장면이 완성됐다.
고증에도 신경썼다. 목가리개가 대표적이다. 실제 당시 전쟁을 치르는 장수들은 목가리개를 썼다고 한다. 왜일까. 단단한 갑옷을 검으로 단박에 베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취약한 목을 노린다. 백병전이 벌어지면 단검을 들고 갑옷의 사이사이를 찌르는 식이다. 그동안 촬영의 편의를 위해 목가리개를 표현한 사극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고려 거란 전쟁’은 이런 디테일까지 꼼꼼히 체크하며 오랜만에 ‘공영방송의 역할을 하는 KBS 사극’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소리 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