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입 까다로운 에르메스, 새것보다 되레 25% 비싸…공급 부족한 롤렉스도 20% 높은 가격대 형성
코로나19 팬데믹(대유행) 당시 일부 명품 브랜드의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던 일을 기억하는가. 매장마다 쇼핑을 하기 위해 줄을 서있는 진풍경이 펼쳐졌는가 하면, 때로는 특정 제품을 사기 위해 오픈런을 하는 모습도 심심치 않게 벌어졌다. 이런 열풍은 비단 ‘소유욕’ 때문만은 아니었다. 특정 제품의 경우 어렵게 구입한 만큼 재판매(리셀) 시장에서 두 배 혹은 그 이상의 가격에 되팔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재테크 수단으로도 각광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달라진 듯하다. 한때 불었던 ‘투기 광풍’은 사그라졌고, 이제는 몇몇 브랜드를 제외하고는 중고 제품에 웃돈을 얹어 판매해 수익을 남기기란 거의 불가능해졌다. 최근 ‘월스트리트저널’은 급변하고 있는 리셀 시장에 대해 보도하면서 명품을 투자 수단으로 삼을 경우 어떤 브랜드가 좀 더 이득이 될지에 대해 진단했다.
지난 4년간 전세계 소비자들은 핸드백, 의류, 시계, 보석 등 명품을 구입하는 데 자그마치 1조 3000억 달러(약 1740조 원)를 쏟아부었다. 사실 과거에는 이렇게 구입한 명품들이 얼마 안 가 옷장 속에서 뽀얗게 먼지가 쌓인 채 방치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미국의 경우 ‘리얼리얼’이나 ‘베스티에르 콜렉티브’ 같은 중고 명품 온라인 플랫폼이 등장하면서 누구나 명품을 쉽게 되팔 수 있게 됐다. 요컨대 온라인 리셀러들 덕분에 비교적 쉽게 중고 명품에 접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결과 팬데믹 초기부터 호황을 누리기 시작한 리셀 시장의 규모는 4년 만에 약 두 배 성장했다. '베인앤컴퍼니'의 추산에 따르면, 2023년 전 세계적으로 거래된 중고 명품은 493억 달러(약 66조 원)에 달했다.
그러나 사실 리셀 시장의 성장을 바라보는 명품 브랜드들은 마냥 기분이 좋기만 한 건 아니다. 아니, 오히려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경우도 많다. 중고 시장에서 거래되는 상품의 경우, 엄격한 인증 작업을 거치지 않기 때문에 가품이 팔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또 다른 문제는 모델마다 중고 가격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소비자들이 어떤 모델이 시간이 지나도 가치가 유지되거나 혹은 더 오르는지, 또 어떤 모델이 갈수록 가치가 떨어지는지 쉽게 알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이런 경우 소비자들은 자연히 리셀 가치가 떨어지는 상품들을 무시하고 외면하게 된다.
리셀 시장에서 가장 몸값이 높은 명품 브랜드는 단연 에르메스다. 심지어 새 제품보다 중고 제품의 가격이 더 높은 경우도 많다. 현재 리셀 시장에서 판매되는 중고 에르메스 백은 새 것보다 평균 25% 더 높은 가격에 팔리고 있다. 한정판이거나 희귀한 디자인에는 더 높은 프리미엄이 얹어진다.
가령 기본 스타일인 버킨25 새 제품은 소매가로 약 1만 달러(약 1340만 원)지만, ‘프리베 포터’와 같은 주요 리셀 시장에서는 더 비싼 가격인 최소 2만 4000달러(약 3200만 원)에 되팔 수 있다. 또한 지난 10년 동안 경매에서 단 25개만 팔리며 희귀템으로 입증된 오스트리치 버킨백의 중고 가격은 평균 3만 5000달러(약 4700만 원)를 웃돌고 있다.
그런가 하면 2021년 제작된 느와르 오스트리치 버킨25는 이듬해인 2022년 4만 420달러(약 5400만 원)에 재판매되면서 화제가 된 바 있다. 2020년 경매에서 무려 38만 2295달러(약 5억 원)에 팔린 히말라야 버킨은 중고 핸드백 사상 최고가에 팔리면서 세계 기록을 세웠다. 이처럼 하나의 재테크 수단으로 자리매김한 버킨백은 단순한 패션 아이템일뿐만 아니라 부와 지위, 그리고 명성을 나타내는 지표가 됐다.
에르메스백이 이렇게 귀한 대접을 받는 이유는 수요는 많은데 비해 판매량은 극히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중고품이 이렇게 높은 가격에 팔리는 이유는 새 제품을 사는 과정 자체가 번거롭고 까다롭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가방을 구입하기 위해서는 먼저 판매 담당자와 친분을 쌓아야 하는 데다 거액을 선결제로 지불한 후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야 한다. 그렇게 기다리는 시간은 1년 또는 그 이상이 걸린다. 이런 모든 번거로운 절차를 피하고 싶은 사람들은 차라리 중고 시장에서 거액을 지불한 후 손쉽게(?) 제품을 구입하는 방법을 선호한다.
명품 브랜드의 시계 역시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높은 가격에 되팔리곤 한다. 롤렉스와 파텍 필립은 각각 평균 20%와 39%의 프리미엄이 붙어 되팔린다. 가령 롤렉스 126500 데이토나의 경우 새 제품의 가격은 1만 5100달러(약 2030만 원)지만 공급이 부족한 탓에 현재 중고 제품의 가격은 3만 7000달러(약 5000만 원) 선에 형성되어 있다.
모든 명품 브랜드가 이렇게 리셀 시장에서 귀한 대접을 받는 건 아니다. 대부분은 원래 판매 가격보다 낮은 가격에 거래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리얼리얼’의 자료에 따르면, 루이비통의 핸드백은 재판매시 평균 40%의 가치가 깎인다. 크리스찬 디올의 경우에는 절반으로 뚝 떨어진다. 2022년 말, 부진한 매출을 회복하기 위해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다니엘 리를 고용한 버버리의 사정도 비슷하긴 마찬가지다. 리셀 시장에서 버버리의 가치는 평균 17% 하락했다.
그런가 하면 파리 증권거래소에 상장되어 있는 케링그룹의 상위 3개 브랜드인 구찌, 발렌시아가, 보테가 베네타의 중고 가치는 지난 1년 동안 각각 10%, 14%, 23%씩 하락했다. 또한 팬데믹 기간 동안 가장 인기 있는 미디엄 사이즈 클래식 플랩백의 가격을 70%나 인상했던 샤넬 역시 아직은 중고 가격이 새 제품 가격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리셀 시장의 전문가이자 이에 정통한 투자자인 펜실베이니아의 베스 실버버그(55)는 “명품 핸드백은 부동산, 예술품, 심지어 주식만큼 수익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16세 때부터 명품백을 수집하기 시작한 그는 지금까지 샤넬, 에르메스, 루이비통 등의 가방을 사고팔아 10만 달러(약 1억 3000만 원) 이상의 수익을 거뒀다.
그는 “내 첫 명품백은 150달러(약 20만 원)에 구입했던 루이비통 스피디 30이었다. 식당 종업원으로 일하면서 받은 팁으로 샀다”고 말하면서 “몇 년 전에 이 가방을 600달러(약 80만 원)에 되팔았는데 지금은 1500달러(약 200만 원)까지 가격이 올라갔다”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그는 “나는 늘 주식과 채권에 투자해 왔다. 하지만 명품백들은 전통적인 방식으로 벌어들인 모든 수익을 훨씬 능가했다”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크레디트스위스’ 은행 역시 명품백 투자 시장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2023년 최고의 ‘수집할 가치가 있는’ 투자 대상으로 명품백을 꼽은 관련 보고서에서 이 은행은 “리셀 가치 측면에서 보석과 예술품을 뛰어넘는 최고의 투자 대상 가운데 하나”라고 평가했다.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