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밸류업 프로그램’ 발표 뒤 바이오·이차전지·AI·로봇 등 투심 위축…“정부의 시장 개입 바람직하지 않아”
금융위원회는 지난 1월 24일 기업의 주주가치 제고 노력을 독려·지원하기 위해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을 도입·운용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주요국 대비 현저히 낮은 PBR 등 우리 증시의 저평가 해소가 목적이다. 큰 틀에서는 스스로 기업가치(PBR·ROE 등)가 저평가된 이유를 분석하여 대응 전략을 수립하고, 이를 투자자들에게 적극 설명·소통하는 기업에 정부가 인센티브를 지급하는 방향이 유력하다. 세부 내용은 2월 중 발표 예정이다.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 도입 소식이 전해지면서 ‘저PBR’ 기업으로 수급이 쏠리고 있다. 현대차 주가는 지난 1월 24일 18만 5000원이었으나 6일 종가 기준 23만 5500원까지 올랐다. 3년 전 최고가인 25만 1000원 돌파를 목전에 두고 있다. PBR이 0.94배인 코스피 시장은 같은 기간 97.59포인트(3.94%) 상승했다.
반면 바이오·이차전지·AI(인공지능)·로봇 등 성장 기업에 대한 투자는 소홀해지고 있다. 이들의 PBR이 저PBR로 분류되는 기업들보다 상대적으로 높아 저PBR 기업의 반대 기업으로 평가되고 있어서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PBR이 1.79배인 코스닥 시장은 1월 24일부터 2월 6일까지 33.08포인트(3.94%) 떨어졌다. 코스닥은 유망한 중소·벤처기업들의 자금 조달이 주요 목적 중 하나인 시장이다. 의료 AI 기업 루닛이 1월 24일 종가 기준 7만 2500원에서 6일 종가 기준 5만 6500원까지 떨어지는 경험을 했다. 루닛의 PBR은 30.87배다.
이 같은 현상은 성장 기업에 적신호다. 성장 기업은 실적보다 투자금으로 사업을 키워 나가야 한다. 기업들은 IPO(기업공개)나 유상증자 등을 통해서도 투자금을 확보하기도 한다. IPO 종목 중 리츠와 스펙을 제외한 코스닥 시장 기업은 2022년 66곳에서 2023년 77곳으로 늘었다. 협동 로봇 제조업체 두산로보틱스는 2015년 설립 후 상장 전까지 약 15차례 유상증자와 기업공개(IPO)를 통해 사업 자금을 조달해 증권시장을 가장 잘 활용하는 업체로 꼽히기도 한다.
저PBR 부양 정책으로 성장 기업의 주가 침체가 장기화하면 이들을 향한 투자심리는 위축된다. 투자심리 위축은 IPO나 유상증자 등 성장 기업이 증권시장에서 원하는 자금을 조달하는 데 방해 요소가 될 수 있다.
문제는 성장 기업들이 투자금을 조달한 다른 활로가 마땅치 않다는 점이다. 고금리 기조로 대출·채권 금리는 여전히 높고, 경기 침체 장기화로 지난해 국내 벤처캐피털(VC)의 신규 투자 금액(5조 3977억 원)은 전년(6조 7640억 원) 대비 약 20% 감소했다. 이마저도 안정적으로 매출을 확보하는 기업에만 자금이 쏠리고 있다.
설상가상 정부가 국가 R&D(연구·개발) 비용도 줄여 올해는 성장 기업의 침체기로 분류된다.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지난해 국가 R&D 예산은 약 31조 1000억 원 수준이었지만, 올해는 약 26조 5000억 원 수준으로 낮아졌다. 국가 R&D 예산 삭감은 1991년 이후 33년 만에 처음이다. 이 때문에 예산 삭감 전 정부 R&D 사업 수주로 외형 확대에 나선 기업들은 올해 예산 삭감으로 지난해 투자에 대한 부담을 고스란히 떠안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저PBR 주가 부양 정책까지 나온다면 성장 기업에 미치는 타격은 더 클 것으로 보인다.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국내 총선과 미국 대선 등 불확실성이 존재하기에 성장 기업을 향한 투자 심리 위축 기조는 올해 상반기에도 이어지고 있다. 다행히 IPO 시장이 다시 살아나고 있어 대어급 IPO에서 성공만 이뤄진다면 성장 기업 투자 심리에 전환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저PBR 부양 정책으로 안정적인 회사로 분류되는 저PBR 기업으로 증권시장의 수급이 몰리고 있어, 성장 기업에 대한 투자 심리가 다시 위축되는 방향으로 회귀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빈기범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성장 기업에 대한 자본 공급이 원활하게 이뤄져야 하는 것에 대해 현 정부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며 “정부가 자신들의 의도대로 될 것이라는 희망으로 시장에 개입하는데 이는 당연히 바람직하지 않다. 정부의 개입이 쌓여갈수록 언젠간 이 비용들을 정부가 부담하는 일이 초래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박찬웅 기자 roone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