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치동 마약음료 사건’ 성인이 당했다면 공동투약 피의자…관련법 지지부진 “타인투약 가중처벌 명문화 필요”
이른바 ‘대치동 마약음료’ 사건으로 기소된 길 아무개 씨(26)가 2월 27일 서울고법 형사5부(부장판사 권순형) 심리로 열린 마약류관리에관한법률위반(향정) 혐의 항소심에서 1심 판결이 부당하다고 항소했다. 형이 너무 무겁다는 것이다. 길 씨는 2023년 4월 서울 강남 대치동 학원가 일대에서 시음 행사를 여는 것처럼 속여 학생들에게 마약이 든 우유를 건네고 학부모들에게 협박 전화를 걸어 금전을 요구했다가 경찰에 붙잡혔다.
1심 재판부는 길 씨에게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이 사건 범행은 영리 목적으로 미성년자를 이용한 범죄, 보이스피싱 범죄, 마약 범죄가 결합된 신종 유형으로서 건전한 상식으로는 도저히 예상할 수 없는 범죄에 해당한다”며 “다시는 이러한 유형의 범죄가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 그 중대한 죄책에 상응하는 엄중한 처벌을 내릴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언뜻 보면 중형이 선고된 것 같지만 이는 피해자가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문제는 우리 법이 마약의 자기투약과 타인투약을 구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현행법에 따르면 미성년자에게 마약을 수수·조제·투약·제공한 자에게 무기징역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할 수 있도록 하지만, 미성년자가 아닌 타인에게 몰래 마약을 타거나 투약하게 하는 경우에 대한 처벌은 규정돼 있지 않다.
실제로 대치동 사건도 피해자 몰래 음료에 마약을 넣었다는 점보다는 범죄 대상이 미성년자였다는 점에서 중형이 나왔다. 사건 발생 당시 경찰 역시 “마약을 몰래 투약하게 한 것보다는 미성년자에게 제공했다는 점에 방점이 있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길 씨 등 피의자들에게 적용된 마약 관련 혐의는 필로폰 음료 제조죄·미성년자 필로폰 음료 제공·필로폰 수수·특수상해 및 특수상해 미수 등이었다.
퐁당마약 범죄의 피해자는 대부분 여성으로 발생 건수는 나날이 증가하는 추세다. 2022년 국립건강정신센터에서 발간한 ‘2021 마약류 사용자 실태조사’에 따르면 여성 투약자의 비율은 2009년 6.9%에서 2022년 22.6%로 증가했다. 2018년 검찰의 교육 이수 조건부 기소유예 프로그램에 참여한 여성 136명 가운데 약물을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타의로 시작하게 된 경우는 전체의 12.5%에 달했다.
일요신문이 2023년 한 해 동안 마약류관리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피의자들의 판결문을 분석한 결과, 매달 최소 한 건에서 최대 네 건의 퐁당마약 범죄가 재판대에 올랐다. 피해자는 여성 혹은 미성년자로 이들은 누군가 몰래 넣어 놓은 마약으로 자기도 모르게 성범죄를 당하거나 서서히 중독돼 끝내 마약 투약자가 되는 위험에 빠졌다.
가해자는 교제 중인 남성이거나 동료이거나 심지어 전 연인의 친구이기도 했다. A 씨는 자신이 운영하는 주점 종업원의 전 여자친구에게 필로폰이 든 생수를 먹게 한 뒤 피해자가 수차례 거절의사를 표시함에도 강제로 추행했다. 약에 취해 이성적인 판단이 어려웠던 피해자는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할 수 없었다. 법원은 A 씨에게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2023년 2월에는 프로골퍼 조 아무개 씨가 함께 술을 마시던 동료 여성 골퍼에게 엑스터시 한 알을 숙취해소제로 속여 먹게 했다. 법원은 조 씨에게 징역 2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두 사건 모두 마약을 구매 또는 소지한 혐의, 혹은 성폭행 혐의만 각각 적용됐을 뿐, 타인을 속여 마약을 투약하게 한 행위로는 처벌되지 않았다. 현행법상 이를 처벌할 수 있는 법이 부재한 탓이다.
이런 이유로 전문가들은 (마약) 타인투약에 대한 가중처벌을 명문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 형사 전문 변호사는 “퐁당마약 범죄 피해자 변호를 맡게 되면 가장 애쓰는 부분이 피해자가 자의로 투약하지 않았다는 점을 입증하는 것이다. 관련 법이 없으니 일단 경찰에서는 피해자가 아닌 공동 투약 피의자로 두고 수사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고의로 투약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한다고 해도 중독 등의 2차 피해가 남아있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투약자가 되었지만 피해구제를 받을 수 있는 길도 마땅치 않다. 이에 대해 앞서의 변호사는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약물에 중독되어 고통을 호소하는 분들이 적지 않다. 자신도 모르게 당한 피해를 입고도 마약 범죄 피해자로 분류되지 못 하고, 마땅한 구제책도 없으니 여러모로 억울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대치동 마약음료 사건 이후 관련 법이 우후죽순 쏟아져 나왔지만 논의는 지지부진하다. 2월 28일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21대 국회에서 마약 타인투약 처벌 강화를 위해 발의된 개정안은 총 6개다. 전봉민 국민의힘 의원은 타인의 의사에 반하여 마약을 투약 또는 제공하는 행위를 한 자를 가중 처벌할 수 있는 조항을 신설하고 3년 이상의 유기징역을 처하는 내용의 개정안을 발의했다.
이 밖에도 서영교 더불어민주당 의원 역시 3년 이상의 유기징역을, 민형배 의원은 3년 이상의 유기징역과 피해자의 치료보호를 명시하는 법안을, 서일준 국민의힘 의원의 경우 2년 이상의 유기징역을, 서영석 민주당 의원과 유경준 국민의힘 의원은 해당 행위에 가중처벌을 규정하는 내용의 개정안을 발의했다. 그러나 해당 법안들은 보건복지위원회에서 논의조차 거의 이뤄지지 않은 채 잠들어있다.
최희주 기자 hjo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