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사업 다각화 승부수, 각각 증권업·비철강 확장…세계경영 앞장선 대우전자는 존재감 흐릿
#비판 견디며 인수한 국제증권
1992년 9월 삼성그룹은 국제증권을 인수했다. 인수 소식은 재계의 주목을 받았다. 당시 삼성그룹은 현대·대우·럭키금성(현 LG그룹)·쌍용·선경(현 SK그룹) 등 국내 굴지의 다른 재벌 그룹들과는 달리 증권사를 계열사로 거느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1991년 말부터 국제증권이 삼성그룹이나 롯데그룹에 안길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국제증권은 결국 삼성그룹에 안겼다.
삼성그룹은 증권업 진출의 숙원을 이루게 됐다. 삼성그룹은 창업자인 이병철 전 회장이 경영할 때부터 증권업 진출에 관심을 가져온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생명보험, 삼성신용카드(현 삼성카드), 안국화재해상보험(현 삼성화재) 등을 운영하고 있던 삼성그룹은 증권사까지 품에 안으면서 금융 사업 외형 확장 계기를 마련했다.
하지만 재벌그룹의 문어발식 계열 확장이 가속화될 수 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당시 정부는 재벌그룹에 대한 업종 전문화 정책을 폈다. 재벌그룹이 선택한 주력 업종 기업에 대해서만 여신관리대상에서 제외해주는 등 혜택을 줬다. 반면 비주력 업종 투자는 억제하고자 했다. 재벌그룹의 경제력 집중을 막고 주력 사업의 국제 경쟁력을 높이려는 취지였다.
삼성그룹 품에 안길 때만 해도 업계 최하위권이던 국제증권은 현재 규모와 이익 면에서 상위권을 이름을 올리는 증권사가 됐다. 삼성증권은 지난해 별도 기준 자기자본이 6조 3377억 원으로 4위 자리에 올랐다. 지난해 연결 기준 영업이익은 7411억 원으로 2위다. 지난해 삼성금융네트웍스에 속한 삼성생명·삼성화재·삼성카드·삼성증권·삼성자산운용의 합산 순이익은 5조 원에 육박했다. 금융지주 1위 KB금융지주(4조 5634억 원)보다 높았다.
2000년대 초부터 자산관리 중심의 영업에 주력한 삼성증권은 자산관리(WM)와 브로커리지(위탁매매) 등 리테일(개인금융) 부문에서 경쟁력이 갖췄다는 평가를 받는다. 다만 전통 IB(기업금융) 부문 강화가 과제로 꼽힌다. 지난해 인수합병(M&A) 자문 관련 수익은 2022년 대비 약 50% 감소한 104억 원을 기록했다.
#비철강과 철강 매출 비중 비슷해져
1992년은 포스코그룹의 전신인 포항제철에 의미가 있는 해였다. 광양제철소 4기 설비를 종합 준공하면서 1968년 창립 이래 추진해온 제철소 건설의 대역사가 마무리됐다. 포항제철은 연간 약 2100만 톤(t)의 생산 능력을 갖추게 됐다. 전 세계 3위 규모였다. 우리나라도 6대 철강대국으로 부상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우리나라 국민 1인당 철강소비량은 1975년 84kg에서 1991년에 600kg을 넘어섰다.
포항제철은 비철강 부문으로의 다각화를 추진했다. 철강산업의 사양화가 불가피하다는 전망이 꾸준히 나왔기 때문이다. 정명식 전 포항제철 회장은 1992년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세계적인 경기침체에 따른 철강 수요의 위축, 선진국의 한국산 철강제품에 대한 덤핑 판정, 외국으로부터 들어오는 수입 철강재의 범람으로 국내 철강업계는 고충을 겪고 있다”며 “경영 다각화를 통해 복합기업으로의 변신을 서두르고 있다”고 밝혔다.
부침도 있었다. 포항제철은 완성차나 자동차부품 생산업 진출을 추진했다. 하지만 공기업이 사적인 이익을 꾀한다는 비판이 일었다. 대신 포항제철은 민간 기업이 감당하기 어려운 정보통신 사업이나 신소재와 같은 첨단산업에 진출하기로 했다. 일례로 포항제철은 1992년 자회사 포스데이타를 통해 제2이동통신사업 사업자 허가를 신청했다. 1994년 포항제철은 제2이동통신 주도사업자로 선정돼 신세기통신(현 SK텔레콤) 경영권을 행사하게 됐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를 겪고 2000년 포항제철이 민영화돼 포스코로 출범하면서 그룹의 비철강 사업 확장 방향성도 뚜렷해졌다. 포스코는 이동통신이나 반도체 사업은 포기하는 대신 건설, 에너지·소재, 친환경 원료 부문을 신성장 동력으로 삼았다. 1994년 포스코개발(현 포스코이앤씨), 2005년 포스코파워(현 포스코인터내셔널) 등을 출범시켰다. 지난해 포스코홀딩스에서 비철강 부문이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절반가량이다.
한 증권사 연구원은 “양극재를 개발하는 포스코퓨처엠 실적이 다소 나아지고 있어서 비철강 부문 매출이 올해 조금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며 “다만 철강이든 비철강이든 전반적인 업황에 대한 우려가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손바뀜 잦았던 대우전자, 현재도 매각 진행 중
1992년 대우전자도 사업 확장 의지를 드러냈다. 대우전자는 1983년 대한전선 가전 사업부문을 인수하며 가전 사업에 진출한 기업이다. 1992년 대우전자는 10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전자전람회에 참가했다. 브랜드 알리기에 본격적으로 나선 셈이다. 대우전자는 미국·프랑스·스페인에 이어 1992년에 독일에도 판매법인을 설립했다. 또 같은 해 우즈베키스탄에 합작공장을 세우기로 하는 등 자체상표부착 상품의 해외 시장 개척에 박차를 가했다.
1993년 대우그룹은 ‘세계경영’을 가치로 내걸었다. 대우전자는 ‘탱크주의’를 기업 슬로건으로 제시했다. 튼튼하고 오래 쓰는 제품으로 승부를 보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1996년 대우전자는 컬러TV·냉장고·세탁기·전자레인지·VCR 등 5대 가전제품 부문에서 수출 1위를 기록하는 성과도 이뤘다.
하지만 영광은 오래가지 않았다. 대우그룹은 1997년 외환위기로 부도를 맞았다. 대우전자는 2002년 대우모터공업으로 떨어져 나왔고 대우일렉트로닉스로 사명을 바꿨다. 2013년에는 동부그룹(현 DB그룹)으로 매각돼 동부대우전자로 이름을 바꿨다. 동부그룹은 2015년 워크아웃 절차를 밟았고 동부대우전자는 다시 시장에 매물로 나왔다. 2018년 대유그룹은 동부대우전자를 인수했다. 그렇게 현재의 위니아전자가 됐다.
하지만 위니아전자는 코로나19 팬데믹(대유행)을 겪으며 영업손실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위니아전자의 연결 기준 영업이익은 2020년 26억 원에서 2021년 마이너스(-) 175억 원으로 적자 전환했다. 위니아전자는 또 다시 시장에 매물로 나온 상태다. 1990년대 삼성전자, 금성사(현 LG전자)와 함께 가전업체 3대장에 올랐던 대우전자의 존재감은 흐릿해졌다.
김명선 기자 se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