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금 쓰는 유학 대신 적십자사 취업 “역시 아이코” 호평…부계 혈통 남성만 왕위 계승 ‘왕실전범’ 개정 더뎌
#아이코 공주가 사랑받는 까닭
올해 초 아이코 공주가 가쿠슈인대학을 졸업한 후 일본 적십자사에 근무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놀라움이 일었다. 애초 다른 왕족과 마찬가지로 해외 유학길에 오를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기 때문이다. 왕족으로서의 무거운 짐을 잠시 내려놓고 자유로워질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이코 공주는 유학 대신 직장 생활을 택했다. 그는 일본 궁내청을 통해 “사회인으로서 일을 시작하게 됐다”며 “조금이라도 사람들과 사회에 도움이 됐으면 한다”고 밝혔다.
궁내청 관계자에 의하면 “아이코 공주의 적십자 취업은 본인의 의지였다”고 한다. 노토반도 지진 발생과 물가 상승 등으로 많은 국민들이 고통받고 있는 상황에서 혈세가 들어가는 유학길을 단념했다는 후문이다. 일본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는 “역시 아이코 공주답다”라는 칭찬이 쏟아졌다.
아이코 공주의 검소함은 2021년 성인식 때도 주목받은 바 있다. 성년을 맞는 일본 여성 왕족은 티아라를 맞추는 것이 관례다. 일례로 아이코의 사촌 마코 공주는 2011년 2856만 엔(약 2억 5500만 원), 가코 공주는 2014년 2793만 엔(약 2억 4900만 원)짜리 티아라를 장만했다. 반면 아이코 공주는 고모가 썼던 티아라를 빌려서 썼다. “코로나19로 국민들이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운데, 세금을 낭비할 순 없다”라는 이유에서다. 이러한 모습이 보도될 때마다 “왕위 승계를 바꿔야 한다”는 여론이 높다. “현 일왕의 직계 자손인 아이코 공주가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마땅하다”라는 의견이다.
#떠오르는 ‘아이코 여왕’ 대망론
일본 왕실은 부계 혈통의 남성만을 왕위 계승자로 인정한다. 요컨대 아이코 공주는 나루히토 일왕의 외동딸임에도 왕위를 물려받을 수 없는 것. 현재 왕위 계승 1순위는 일왕 동생인 후미히토 왕세제(58)이고, 2순위는 후미히토의 외아들인 히사히토 왕자(17)다. 사실상 히사히토 왕자가 유일한 계승자라 “자칫 왕실의 대가 끊길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일본 왕실 연구가 다카모리 아키노리는 “남계(男系) 계승의 원칙을 바꾸지 않으면 조만간 일본 왕실은 소멸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반드시 남자아이가 태어난다고 장담할 수 없는 데다, 왕실 또한 저출산 고령화가 심각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일본 여성 왕족은 일반 남성과 결혼할 경우 왕실을 떠나야 하므로 왕가 인원 자체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다카모리 연구가에 의하면 “현존하는 왕실 중에서 여성 왕위 계승을 인정하지 않는 나라는 일본과 리히텐슈타인뿐”이라고 한다. 다만, 리히텐슈타인은 인구가 4만 명이 채 되지 않는 초미니 국가다. 영국도 여왕의 시대가 오래 지속됐고, 네덜란드 왕실도 지금의 국왕에 앞서 3대에 걸쳐 여왕이 이끌었다.
과거 역사를 보면 일본도 여왕이 존재했다. 고대부터 중세 에도 시대까지 8명의 여왕을 배출한 바 있다. 그러나 메이지유신을 계기로 1889년 ‘왕실전범’이 법정화되면서 왕위 계승권은 남성으로만 한정됐다. 여성의 권리 면에서는 시대를 거꾸로 간 셈이다. 다카모리 연구가는 “많은 일본인이 착각하고 있지만, 남계 왕위 계승은 일본의 전통적인 제도라 할 수 없다”면서 “지금이라도 여성이 왕위를 계승하도록 왕실전범을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이코 공주의 높은 인기의 힘입어 일본 내에서는 여왕의 탄생을 바라는 새로운 움직임도 일고 있다. 만화책 ‘아이코 일왕론’이 출간되는가 하면, ‘아이코 공주를 왕위 계승자로 만들자’라는 운동을 전개하는 팬카페도 생겨났다. 지난해 7월 관련 행사가 열려 전국에서 1000명에 가까운 참가자들이 모였다고 한다. 이들은 “여성 왕위 계승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현대의 보편적 가치관에 어긋난다”며 “남성 왕위 계승 규칙을 철폐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갈 길 먼 여왕으로의 길
각종 여론조사 결과 “여성 일왕에 찬성한다”라는 의견은 80%, 때로는 90%에 가까운 숫자도 나온다. 그러나 왕위 계승을 규정한 ‘왕실전범’ 개정 논의가 일본 국회에서 시작되지 않아 여왕으로의 길은 아직 멀다. 대다수 일본인이 여왕을 찬성하는데, 왜 일본 국회는 왕실전범 개정 논의에 소극적일까.
거슬러 올라가면 2005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에서는 “여성·여계 일왕도 인정하고 왕위 계승은 성별과 관계없이 장자 우선으로 하자”라는 내용이 검토됐다. 이를 토대로 왕실전범 개정안 논의를 추진했으나 2006년 히사히토 왕자가 태어나면서 동력이 꺾였다.
아베 신조 내각이 들어서고 나서는 오히려 ‘남계 혈통에 의한 왕위 계승’이 확고해졌다. 자민당의 보수파는 여성·여계 일왕에 신중한 입장이다. 특히 아베 신조 전 총리의 경우 부정적인 입장을 고수했다. 나루히토 일왕가보다는 후미히토 왕세제 일가 쪽의 손을 더 들어줬던 것. 그러나 최근 아이코 공주에 대한 관심이 뜨겁고, 또다시 왕위 승계를 바꿔야 한다는 여론이 부상하자 자민당 일각에서도 아이코 공주가 일왕이 되는 것을 용인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다만 “아이코 공주가 여왕이 될 순 있어도 모계 혈통의 일왕은 지지하지 않는다”라는 입장이다.
자민당의 한 의원은 “여왕은 일본 역사상 존재한 적이 있어도 모계 혈통의 일왕은 없었다”면서 “모계 일왕을 인정하면 ‘이질적 왕조’가 탄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아이코 공주가 여왕이 되고 장래에 낳은 아이가 일왕으로 인정될 경우 남편의 선택을 둘러싸고 ‘일왕의 아버지로서 적합한지’ 큰 소란이 일게 될 것이라는 염려다.
이를 두고 여성 일왕을 찬성하는 쪽은 “성차별적이며 시대변화와 동떨어진 발상”이라고 비판한다. 왕실 연구가 다카모리 아키노리는 “현행 왕실규범이 유지된다면 아이코 공주는 머지않아 결혼으로 왕실을 나와 일반 국민이 된다”면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국민도 국회도 알아야 한다. 개정을 서둘러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강윤화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