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겨누는 여당 의원들, 8표만 이탈하면 ‘거부권’ 무력화…정치권 ‘협치’ 주문 속 영수회담 여부 주목
제22대 국회의원선거 개표 결과 더불어민주당이 지역구 161석 더불어민주연합 비례대표 14석, 총 175석으로 단독 과반 의석을 확보했다. 야당이 단독으로 과반 의석을 차지한 것은 한국 정치사 최초다. 조국혁신당은 비례대표로만 12석을 가져갔고, 개혁신당이 지역구 1석·비례대표 2석 총 3석을 차지했다. 새로운미래와 진보당은 지역구에서 각각 1석을 얻었다. 이로써 192석에 달하는 ‘거야’가 탄생하게 됐다.
집권여당인 국민의힘은 지역구 90석에 국민의미래 비례대표 18석으로 도합 108석에 그쳤다. 국민의힘 입장에서는 이른바 ‘탄핵·개헌저지선(100석)’을 지켜내며 최악의 결과는 피했지만, 지난 4년에 이어 앞으로의 4년도 국회 주도권을 범야권에 고스란히 내주게 됐다.
국정을 운영해야 하는 윤석열 대통령의 앞날은 험난해졌다. 윤석열 정부 3년 차 중간평가에서 국민들이 투표를 통해 심판을 내린 것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민주 정부가 들어선 이후 ‘여소야대’ 구도가 대통령 임기 5년 내내 지속되는 것은 윤석열 정부가 처음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충격적인 선거 참패에 변화하려는 모습을 취하는 듯 보인다. 윤 대통령이 이번 총선 결과에 대해 “국민의 뜻을 겸허히 받들어 국정을 쇄신하고 경제와 민생 안정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고 이관섭 대통령 비서실장이 전했다.
한덕수 국무총리를 비롯해 대통령실 고위 참모진도 총선 다음날 일괄 사의를 표명했다. 이관섭 비서실장, 성태윤 정책실장, 한오섭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 박춘섭 경제수석, 장상윤 사회수석, 박상욱 과학기술수석 등이다. 장호진 국가안보실장은 자진 퇴진 대상에서 제외된 것으로 전해진다.
국무총리를 교체하기 위해서는 국회를 넘어야 한다. 총리의 경우 인사청문회를 거쳐 국회 본회의 표결을 통해 ‘재적 과반 출석에 과반 찬성’으로 임명동의안이 통과돼야 대통령이 임명할 수 있다.
윤석열 정부 지난 2년 동안 한덕수 총리 교체 카드를 몇 차례 만지작거렸지만, 민주당 동의를 얻어낼 만한 후보자를 찾지 못해 결국 포기했다는 전언이 있었다. 이번 22대 국회에서도 거대 야당이 윤 대통령이 지명한 차기 총리 후보자에 임명 합의를 해줄지 미지수다. 거야가 실력 행사를 벼르고 있다는 말도 곳곳에서 들린다.
정치권에선 윤 대통령이 민주당과의 협치에 나서는 등 국정기조를 바꿔야 한다는 지적이 주를 이룬다. 윤 대통령은 대통령 취임 이후 이재명 대표와 한 차례도 회담을 갖지 않았다. 이 대표가 수차례 영수회담을 제안했지만, 대통령실은 거부 의사를 밝혔다. 대통령실과 여당은 ‘대통령이 수사와 재판을 받고 있는 범죄 피의자와 만날 순 없다’는 입장이었다.
야권 한 관계자는 “윤 대통령이 국정쇄신 일환으로 총리를 교체하고 민생 개혁입법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야당의 협조가 필수적이다. 야당 지도부를 만나야 한다. 그런데 정치는 주고받는 것이다. 민주당이 총리 임명동의의 조건으로 채 상병 특검·김건희 특검 수용을 내걸면 윤 대통령이 받을 수 있겠느냐. 국정기조가 바뀔지 미지수”라고 평가했다.
범야권에서는 윤 대통령을 향한 압박의 강도를 높이고 있다. 이재명 대표는 4월 12일 당선인 등과 함께 국립현충원을 찾아 참배한 뒤 ‘윤 대통령과의 영수회담 가능성’에 대해 “당연히 만나고 대화해야 하는데, 지금까지 못한 것이 아쉬울 뿐”이라고 밝혔다. 이어 “이 나라 국정을 책임지는 윤 대통령도 야당 협력이 필요하다”며 “야당을 때려잡는 게 목표라면 대화할 필요도 존중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국회가 국정을 이끌어가는 또 하나의 축이고, 삼권분립이 이 나라 헌정질서의 기본이다. 따라서 존중하고 대화하고 이견이 있는 부분은 서로 타협해야 하는 것이 맞다”고 강조했다.
경기 화성을에서 당선된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는 4월 11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인터뷰에서 “윤 대통령은 집권 2년이 자나가는 대통령인데 아직도 통치나 정치의 기본에 해당하는 것들을 안 하고 계신다”며 “총선 뒤에도 바뀔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고 꼬집었다. 이어 SBS라디오 ‘김태현의 뉴스쇼’에서는 ‘3년 후 대선 도전’ 질문에 “다음 대선이 몇 년 남았나. (3년) 확실한가”라고 반문했다. ‘조기 퇴진’을 암시하는 발언으로 해석됐다.
조국혁신당은 윤 대통령 아킬레스건 중 하나인 김건희 여사에 공세를 펼쳤다. 조국 대표는 총선 결과가 확정된 11일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앞에서 비례대표 당선인들과 기자회견을 열고 “검찰에 대한 국민의 명령이자 마지막 경고”라며 “검찰은 김건희 여사를 즉각 소환해 조사하라”고 촉구했다. 이어 “검찰이 국민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22대 국회 개원 즉시 ‘김건희 특검법’을 민주당과 협의해 추진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야당뿐 아니라 여당에서도 윤석열 대통령을 향해 반기를 드는 이들이 나올 수 있다는 관측이다. 또 다른 야권 관계자의 말이다.
“21대 국회에서는 의원들이 공천을 받기 위해 윤 대통령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국회 입성하는 의원들은 윤 대통령보다 남은 임기가 길다. 차기 공천에 윤 대통령이 영향을 줄 수 없다는 뜻이다. 또한 차기 대권을 노리는 의원들은 인기 없는 현직 대통령과 각을 세워야 존재감을 부각시킬 수 있다. 22대 국회에서는 ‘비윤’으로 돌아서는 의원들이 많을 것이다.”
21대 국회에서는 범야권이 대통령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에 따른 재의결에 필요한 ‘3분의 2 의석(200석 이상)’을 확보하지 못해 폐기된 법안이 노란봉투법·간호법·김건희 특검법 등 8개에 달했다. 하지만 22대 국회는 앞서 언급했듯 범야권 의석이 192석이다. 국민의힘이 이른바 ‘개헌 저지선’은 구축했지만 내부에서 8표만 이탈하면 산술적으로 대통령 거부권은 무력화될 수 있다.
실제 국민의힘 내부에선 벌써부터 다른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국민의힘 공동선대위원장을 맡았던 안철수 경기 성남분당갑 당선인은 4월 12일 MBC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 인터뷰에서 야당이 추진하는 ‘채 상병 특검법’ 표결에 대해 “개인적으로는 찬성”이라며 찬성표 투표 여부에 “나는 그렇다”고 강조했다. 이어 윤 대통령을 향해 “총선 결과를 바탕으로 국민 질책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국정기조를 전면적으로 혁신하고 대전환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서울 도봉갑에서 승리한 김재섭 당선인 역시 김 여사를 언급했다. 4월 12일 KBS라디오 ‘전종철의 전격시사’ 인터뷰에서 “김건희 여사에 대한 여러 가지 문제가 국정운영을 하는 데 있어 발목을 잡았고, 여전히 국민들이 의문을 갖고 해소해야 한다 요청하는 상황”이라며 “김건희 특검법에 대해 우리가 전향적인 태도를 보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정부여당 관계에 대해서도 “여당이 정부와 대통령실에 종속적인 모습을 보여줬다고 생각한다”며 “22대 국회에서는 정부와의 건전한 긴장 관계를 통해 정부와 협력하면서 야당과도 협력할 수 있는 독립성과 자주성을 가진 여당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윤 대통령의 남은 선택지는 사정 드라이브일 것이란 전망도 고개를 든다. 검찰 출신인 윤 대통령의 주특기를 활용해 출구전략을 마련한다는 것이다. 민주당 한 관계자는 “총선 전부터 정치권 안팎에서는 윤 대통령 측이 사정기관을 동원해 반기를 드는 의원들은 여야를 막론하고 선거법 등 각종 혐의를 적용해 수사하고 압박을 가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 이를 통해 의석을 유리하게 뺏어올 수 있다고 계산한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야당 당선인들이 수사선상에 오른 사건으로는 민주당 전당대회 돈봉투 수수 의혹, 문재인 청와대의 울산시장 선거개입 의혹, 대장동 사건 관련 윤 대통령 명예훼손 의혹 등이다. 이외에도 이번 총선 과정에서 선거법 위반 수사가 진행될 수 있다. 검찰과 경찰에 입건된 선거사범이 2000명이 넘는데, 이 가운데 당선인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법조인 출신 한 민주당 당선인은 “이번 총선 참패로 윤석열 대통령은 사실상 ‘식물 대통령’ 상태가 될 수 있다. 검찰이 그런 기류를 누구보다 잘 안다. 예전처럼 검찰이 윤 대통령의 수족처럼 움직일지는 미지수”라고 꼬집었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