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움 상대로 9점 내주며 최다 실점 신기록…두산 상대로 복귀 후 첫 승 거우며 통산 99승 달성
#류현진과 키움의 재회
류현진은 지난 4월 5일 서울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린 키움 히어로즈와 원정 3연전 첫 경기에 선발 투수로 나섰다. 당초 4일 대전 롯데 자이언츠전에 선발 등판할 예정이었지만, 그 전날(3일) 경기가 비로 취소되면서 류현진의 등판도 하루 밀렸다. 최원호 한화 감독은 "류현진 본인의 의사를 물어보니 '하루 더 쉬고 싶다'고 하더라. 굳이 순서를 바꾸지 않고 선발 로테이션을 그대로 하루씩 순연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류현진의 고척돔 등판은 두 가지 의미를 지녔다. 류현진은 2012시즌을 끝으로 메이저리그(MLB)에 진출했고, 고척돔은 2015년 말 완공돼 2016년부터 키움이 홈구장으로 썼다. 류현진이 한국에서 돔구장 경기에 등판하는 건 이날이 처음이었다. 때마침 고척돔은 지난달 열린 LA 다저스와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MLB 서울시리즈를 위해 잔디·조명 등 그라운드 시설을 빅리그 수준으로 업그레이드했다. 홈팀보다 열악했던 원정팀 라커룸도 전면 리모델링을 마쳐 환경이 훨씬 쾌적해졌다. '투수'로서 고척돔을 처음 찾는 류현진에게는 반가운 변화였다.
상대 팀인 키움과 인연도 남달랐다. 키움은 류현진이 MLB 진출 전 마지막으로 상대했던 팀이다. 그는 2012년 10월 4일 대전 넥센(현 키움)전에서 10이닝 동안 공 129개를 던지며 역투했지만, 승리 투수가 되지 못했다. 7회 1사 후 당시 넥센 소속이던 동기생 강정호에게 솔로 홈런을 맞은 게 화근이었다. 결국 1-1로 맞선 연장 10회까지 온 힘을 쏟고도 빈 손으로 돌아서야 했다. 류현진의 7시즌 연속 10승과 통산 99번째 승리도 동시에 날아갔다.
그 후 12년이 지나 한화로 복귀한 류현진은 간판만 바꾼 키움을 상대로 다시 자신의 등번호와 같은 99승째에 도전했다. 류현진의 첫 승을 직접 보고 싶은 한화 팬들의 기대감도 불타올랐다. 금요일 야간경기로 치러진 이 게임의 입장권 1만 6000장이 경기 시작 41분 만인 오후 7시 11분에 다 팔려 키움 구단의 올 시즌 첫 매진으로 이어졌다. 홈 대전에서 열린 주말 3연전(3월 29~31일 KT 위즈전)과 주중 2경기(4월 2·4일 롯데 자이언츠전)를 모두 매진시키고 고척으로 온 한화 덕에 키움도 기분 좋은 특수를 누린 것이다. 키움 관계자는 "이 경기는 4월 2일까지 이미 9996장이 예매돼 평소보다 인기가 높았는데, 류현진 선수의 등판이 결정된 지 하루 만에 인터넷 예매분 대부분이 팔려나갔다"고 귀띔했다.
#9실점으로 끝난 악몽
한화 팬들은 이날 류현진의 승리를 보지 못했다. 류현진은 4와 3분의 1이닝 동안 9피안타 2볼넷 2탈삼진 9실점 하고 마운드를 내려왔다. 류현진이 한 경기에서 9점을 내준 건 KBO리그 데뷔 후 처음. 종전 기록은 2012년 7월 18일 삼성 라이온즈전에서 기록한 8실점이었다. 시즌 평균자책점은 3.72에서 8.36으로 치솟았다.
4회까지는 완벽에 가까웠기에 더 어리둥절한 결과였다. 류현진은 1회 선두 타자 이주형에게 중전 안타, 2회 두 번째 타자 이형종에게 볼넷을 내줬을 뿐 2루 한 번 내주지 않고 키움 타선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4-0 리드를 안고 마운드에 오른 5회, 갑작스레 제구가 흔들리면서 난타당하기 시작했다. 선두타자 김휘집에게 좌중간 안타, 이형종에게 스트레이트 볼넷을 내줘 무사 1·2루. 송성문을 우익수 플라이로 잡고 한숨 돌리는 듯했지만, 곧 공이 가운데로 몰리기 시작했다. 류현진은 결국 김재현에게 큼직한 좌월 적시 2루타를 내줘 첫 실점을 했다.
키움 타선은 이 안타를 신호탄 삼아 류현진의 초구 혹은 2구째를 빠르게 공략하며 혼을 빼놨다. 박수종-이주형-로니 도슨-김혜성이 연속 적시타를 때려내 주자를 끊임없이 홈으로 불러들였다. 류현진은 결국 최주환과 김휘집에게도 연속 안타를 허용한 뒤 4-7로 뒤진 1사 1·3루에서 불펜 김서현으로 교체됐다. 김서현도 제구 난조로 류현진이 남겨 놓은 주자 두 명의 득점을 모두 허용해 류현진의 실점은 9점으로 늘었다. 기둥 같던 에이스가 난타당하자 한화 더그아웃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한화는 결국 7-11로 졌다.
최원호 한화 감독은 다음날 "배트에 공이 닿기만 해도 안타가 되더라. 주자가 한두 명 정도 쌓이면 벤치에서 불펜에 몸을 풀라는 신호를 보낸다. 하지만 워낙 빠르게 안타가 계속 나왔기 때문에 벤치도 교체 타이밍을 놓쳤다"며 "4점을 앞서고 있던 터라 동점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런데 계속 안타가 나왔고, 빨리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는 이미 늦어버린 뒤였다"고 털어놨다. 그러나 류현진의 부진이 장기화하지는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최 감독은 "체력 문제보다는 투구 수 적응이 아직 덜 된 것 같다. 아무래도 미국은 시범경기를 빨리 시작하니까 (류현진이) 기존에 준비하던 방식보다 시간이 부족했을 것"이라며 "구위가 현저히 떨어져서 안타를 맞았다면 체력 문제일 수 있지만, 구위는 나쁘지 않았다"며 "공이 몰리면서 안타를 맞은 건 충분히 개선의 여지가 있다"고 했다.
#류현진이 마음을 다잡았다
류현진은 그 후 절치부심했다. 다음 등판이 예정된 4월 11일 잠실 두산 베어스전을 준비하면서 평소 하지 않던 불펜 투구 훈련까지 했다. 선발 투수들은 보통 5일 혹은 6일 간격으로 등판해 100구 전후의 공을 던지는데, 대부분 등판 이틀 전 불펜에서 공을 던지며 어깨를 예열한다. 그런데 류현진은 데뷔 초부터 "등판 간격 사이에 공을 던지면 오히려 컨디션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불펜 피칭을 하지 않았다. 메이저리그 진출 초반엔 이런 이유로 현지 언론의 조명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엔 등판 이틀 전인 4월 9일 잠실구장 불펜에서 약 20개의 공을 던지면서 직구, 컷패스트볼, 체인지업 등 다양한 구종을 테스트했다. 전력으로 던지는 불펜 피칭은 아니었지만, 류현진의 평소 루틴과 다른 과정을 하나 추가했다.
박승민 한화 투수 코치는 "류현진이 한 훈련은 '쇼트 사이드'라는 훈련으로 일반적인 불펜 투구와 달랐다"며 "선수들은 컨디션과 상황에 따라 쇼트 사이드 훈련을 자발적으로 한다"고 했다. 또 "류현진은 50% 정도의 힘으로 공을 던졌다. 투구 감각을 이어가기 위한 목적이 가장 크다"고 설명했다.
류현진이 한 차례 크게 휘청했지만 '절대 에이스'에 대한 한화의 믿음엔 변함이 없었다. 최원호 감독은 두산전을 앞두고 "류현진이 타자를 상대하는 패턴에 변화를 주려고 하고 있다. 더 지켜봐야 한다"며 "컨디션이 좋다고 하니까 믿어봐야 한다"고 웃어 보였다. 또 "70~100구 구간에서 계속 안타를 맞은 부분에 대해선 류현진뿐 아니라 지금 리그의 모든 선발 투수가 적응하는 단계다. 우려할 때는 아니다"라며 "5월 정도 됐는데도 계속 그러면 심각하게 생각해봐야겠지만, 아직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강조했다.
#깨어난 '괴물', 마침내 첫 승리
팀과 팬의 믿음을 등에 업고 마운드에 오른 류현진은 마침내 자신의 진가를 보여줬다. 두산을 상대로 6이닝 동안 안타 1개와 볼넷 2개만 내주고 무실점으로 역투해 한화의 3-0 승리를 이끌었다. 류현진의 KBO리그 승리는 2012년 9월 25일 잠실 두산전(7이닝 1실점) 이후 4216일 만이었다. 한화는 에이스의 역투를 앞세워 5연패를 끊었다.
말 그대로 '손 댈 수 없는' 투구였다. 류현진은 2회와 4회 2사 후 볼넷을 하나씩 허용했을 뿐 4회까지 안타 하나 맞지 않고 일사천리로 아웃카운트를 늘려나갔다. 5회 2사 후 김기연에게 첫 안타를 내줬지만, 흔들리지 않고 무사히 이닝을 마쳤다. 유일한 고비였던 6회도 마찬가지였다. 우익수 요나단 페라자의 포구 실책과 이어진 폭투로 맞은 1사 2루 위기를 무사히 넘겼다. 야수 실책 후 연속 안타를 허용했던 3월 23일 개막전과는 사뭇 달랐다. 최 감독은 "류현진이 완벽한 피칭으로 상대 타선을 막아줬다. 복귀 첫 승과 함께 팀의 연패를 끊어줬다. 정말 노련한 피칭이었다"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류현진은 경기 후 "진작 첫 승을 했어야 했는데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그래도 기쁘다. 그동안 한 이닝에 집중적으로 실점이 이어지면서 매 경기 어려움을 겪었는데 다행히 잘 끝났다"며 "나로 인해 5연패가 시작됐는데 내 손으로 꼭 끊겠다고 다짐했다.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어 다행"이라고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쉬운 플라이 타구를 떨어트려 갑작스러운 위기를 안긴 페라자에 관해서는 "솔직히 그 순간 표정관리가 잘 안 됐다. 페자라만 빼고 다른 야수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웃으며 농담하는 여유를 보이기도 했다.
주무기인 체인지업의 위력이 살아난 점이 특히 고무적이다. 이날 공 94개를 던진 류현진은 직구(32개)와 비슷한 개수의 체인지업(31개)을 적재적소에 활용하면서 타자들의 헛스윙과 범타를 끌어냈다. 2회 강승호와 박준영, 4회 허경민과 강승호가 류현진의 체인지업에 헛스윙해 삼진으로 돌아섰다. 이날 류현진의 탈삼진 수는 8개였다.
류현진은 "한국에 온 뒤 (지난 3경기 동안) 체인지업이 말썽이어서 변화를 줬다. 다시 제구를 잘 잡은 것 같아 만족한다"며 "그립은 똑같이 잡되 팔 스로잉을 빠르게 했다. 스피드도 이전 경기들보다 더 잘 나왔고, 각도 직구와 비슷하게 가서 잘 통한 것 같다"고 뿌듯해했다.
류현진은 9점을 내주며 무너졌던 직전 등판 얘기가 나오자 "경기 당일에는 나도 좀 충격을 받았다"고 털어놨다. 그는 LG 트윈스와 개막전(3과 3분의 2이닝 5실점 2자책점)에 이어 70구 이후 제구가 흔들리며 집중타를 맞은 탓에 체력과 구위에 관한 이런저런 걱정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걱정은 오래 가지 않았다. 각성한 류현진은 바로 다음 등판에서 '괴물 모드'를 재가동했다. 70구를 넘어 80구, 90구를 넘는 동안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모두가 알고 늘 익숙했던, 그 '류현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는 이날 총 94개의 공을 던졌는데, 한 경기에서 90구 이상을 기록한 건 2021년 9월 29일 뉴욕 양키스전(93구) 이후 무려 2년 7개월 만이다.
류현진은 "딱 하루만 충격을 받고, 경기 다음 날부터는 '시즌 초반이니 괜찮다'고 생각하며 빨리 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다시 좋은 경기를 할 수 있었다"며 "몸 상태는 개막전부터 지금까지 문제가 없었다. 70구 이후 구위가 떨어졌다기보다 자꾸 맞아나가서 그런 걱정이 나온 것 같은데, 이번엔 안 맞았으니까 또 나오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고 웃어 넘겼다.
류현진은 이날 승리로 KBO리그 통산 99승을 기록했다. 앞으로 한 번만 더 이기면 역대 최고령 통산 100승 고지를 밟는다. 다음 등판은 4월 17일 창원 NC파크에서 열리는 NC 다이노스와의 원정경기로 예정돼 있다. NC파크는 2019년 개장했다. 역시 류현진이 처음으로 서 보는 마운드다. 류현진은 "매 경기 같은 마음으로 준비하려고 한다. 이 경기처럼 내가 선발투수 역할을 해내면 100승은 저절로 따라올 거라고 생각한다"며 "1회부터 (마운드를) 내려올 때까지 항상 똑같이 잘해내고 싶다"고 각오를 다졌다.
류현진을 향한 한화 팬들의 응원은 상상 그 이상이다. 이날 잠실구장 관중 수는 평일 야간인데도 만원(2만 3000명)에 가까운 2만 2157명이었다. 류현진 그리고 한화가 가는 곳에는 홈과 원정을 가리지 않고 구름 관중이 몰리고 있다. 잠실구장 3루쪽 관중석을 가득 메운 한화 팬들은 경기 후 류현진이 방송 인터뷰를 다 마칠 때까지 그의 이름을 목놓아 외쳤다. 류현진은 "진작 그런 환호를 들었어야 했는데, 너무 늦었다. 경기 후 받은 팬들의 환호가 참 좋았다"며 "요즘 우리 한화 팬들께서 어디든 매 경기 많이 찾아와 응원해주셔서 감사드린다. 선수들도 그만큼 집중해서 또 좋은 경기 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거듭 다짐했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