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 포기 후 맘고생, 불출마 고심 중 전략공천…법사위원장 기회 주어진다면 피하지 않고 최선 다할 것”
―권익위원장 시절 윤희숙 국민의힘 후보 부친이 농지법과 주민등록법을 위반했다고 발표했다. 이후 윤 후보는 국회의원직을 사퇴했다. 악연이 있는 상대를 만났다.
“개인적으로는 특별한 의미를 두지는 않았다. 그런 인연이 있는 후보 정도로 생각했다. 문제는 상대 후보보다 누가 국민의 마음을 얻느냐였다. 상대 후보보다는 주민들을 바라보고 선거에 집중했다.”
―국민의힘 윤희숙 후보는 임종석 전 청와대 비서실장 출마를 염두에 두고 운동권 심판 프레임을 내세웠다.
“(비운동권 후보자 공천으로) 국민의힘의 운동권 심판 프레임이 완전히 무력화됐던 것 같다. 국민의힘 선거 전략이 무너진 것이다.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이 정치 초보라 전략을 잘못 짠 게 아닌가 싶다.”
―종로 출마를 준비했었다. 갑작스럽게 선거구를 옮기게 됐는데.
“출마는 개인의 선택이지만, 당의 공천을 받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그런데 제가 종로에 출마하고 난 뒤 당이 꾸준히 다른 지역에 저를 넣고 여론조사를 돌렸다. 서울 격전지에 제 이름이 오르내렸다. 당이 다른 곳으로 전략공천 하려는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지역구를 옮길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건가.
“그런 셈이다. 선당후사의 마음으로 당의 입장을 존중해서 종로 출마를 포기했다. 정작 선당후사를 결정한 다음 당에서 어디로 가라는 연락이 없었다. 한 열흘 마음고생을 했다. 이번에는 출마하지 말고 백의종군하라는 뜻인가 보다. 그렇게 생각했다. 불출마까지 생각했는데 마지막 순간에 당이 (중·성동갑으로) 전략공천을 발표했다.”
―중·성동갑에는 같은 당 임종석 전 실장이 출마를 준비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임 전 실장이) 당의 전략공천에 반발하고, 선거운동을 계속하는 순간이 있었다. 그래서 공천을 받았지만, 후보로 나설 수 없는 환경이었다. 저를 도와줄 당원이나 조직을 확보해야 하는데, 이미 (임 전 실장하고) 함께해왔던 분들이라 쉽게 마음을 못 열었다. 당원도, 조직도 전혀 없는 상황에서 또 마음고생 많이 했다.”
―위기를 어떻게 풀었나.
“저도 종로를 그만두고 나오면서 힘들었다. (임 전 실장이) 굉장히 마음고생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분이 마음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드려야 했다. 그분을 따르는 조직과 지지자들이 마음을 추스를 시간을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에 일주일 정도 기다렸다. 선거를 약 한 달 앞둔 시기였다. 게다가 낯선 지역이었다. 1분 1초가 아까웠다. 아무것도 안 하고 기다린다는 것은 힘든 순간이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그렇게 하기를 잘한 것 같다. 나중에 당원들과 원 팀으로 선거를 치를 수 있었다. 그때 (당원들이) 이구동성으로 ‘바로 선거운동을 했으면 반감을 얻었을 거다. 그랬으면 도와주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기다려준 것에 대해 좋은 인상을 받았고, 캠프에 합류했다’고 말씀하더라.”
―중·성동갑은 민주당 우위 지역으로 꼽힌다.
“(중·성동갑은) 민주당 텃밭은 아니다. 지난 대선과 지방선거 둘 다 국민의힘이 압도적으로 이겼다. 일부 지역은 강남보다 비싼 아파트 단지들도 있다. 보수세가 최근 들어 뚜렷해졌다. 여론조사를 보면 당 지지율은 여야가 비슷하다. ‘우리는 당 보고 안 찍어, 인물 보고 찍어’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았다. 그리고 처음에는 시간은 부족하고, 당의 지지율은 높지 않았고, 조직도 없었다. 악조건에서 출발한 셈이다.”
―선거 전략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다.
“늘 선거는 왕도가 없다고 생각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진정성을 가지고 주민들 한 분 한 분 만나는 것이다. 이번에도 그런 방법이 통했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는 권익위원장으로 있을 때 정권의 탄압을 받았던 부분, 끝까지 임기를 지키고 마지막까지 이겨냈던 부분들이 주민들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 주민들이 그런 것을 보면서 인상 깊었다고 하더라. 그리고 이번 선거가 정권 심판론과 맞물려 있었다. 그런 점이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한 것 같다. 또 권익위에 있을 때 지역을 다니면서 민원을 해결하고, 성과를 냈던 경험이 있었다. 이 점을 강조했다.”
―진정성을 보여준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말인가.
“선거 때 주민들과 접촉할 기회가 많다. 이때 주민들에게 ‘전현희 참 괜찮고, 진실한 사람이구나’하는 인상을 찰나의 순간에 줘야 한다. 악수할 때 절절한 마음을 듬뿍 담고, 눈빛을 교환하고, 대화할 때 건성으로 하지 않았다. 그렇게 진심을 전달했다.”
―험지인 강남을에서 이긴 적이 있다. 그때와 어떤 차이가 있었나.
“크게 차이는 없는 것 같다. 지성이면 감천이다. 사람의 마음은 하늘을 움직이는 것보다는 조금 더 쉽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강남과 중·성동갑에서 이 생각을 실천에 옮겼다.”
―민주당이 압승을 거뒀다. 그 의미는 무엇이라고 보는지.
“국민들이 윤석열 대통령에 대해 사실상의 탄핵에 가까운 결정을 한 거로 생각한다. 탄핵하려면 200석이 필요하다. (국민들이) 거기에 약간 못 미친 의석을 주셨다. 윤석열 정권에 대한 심판의 의사를 나타냄과 동시에 윤 대통령에게 마지막 기회를 준 것이다. 전반적인 정책 기조를 바꾸고 새롭게 출발하라고 명령한 거다.”
―4월 16일 윤 대통령 국무회의 모두발언과 비공개 사과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나.
“국무회의에서 한 발언은 ‘나는 잘못한 거 없는데 국민들이 오해했다. 국무위원들이 잘못했다. 방향은 맞다’는 말을 한 것 같다. 다 남 탓이다. 윤 대통령이 국민들이 주신 마지막 기회를 놓치고 있는 것 같아서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민주당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
“국민들이 표를 준 것은 민주당이 잘해서 그런 것은 아니라고 본다. 민주당 역시 오판해서는 안 된다. 이재명 대표가 현충원 참배 직후 방명록에 쓴 가장 중요한 말은 민생이다. 정권 심판도 중요하다. 그러나 지금 국민들의 삶이 힘들다. 선거 때 상점이나 시장에 가면 상인들이 이구동성으로 ‘손님이 너무 없다. 가게 유지하기 힘들다’라고 말한다. 이런 것들을 정부 여당이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 제1야당인 민주당이 나서야 한다. 또 윤 정권이 정책 기조를 바꾸지 않을 때는 국민의 뜻에 부응하는 심판자 역할도 민주당이 할 필요가 있다.”
―권익위원장 시절 감사원이 사퇴를 압박하기 위해 표적 감사를 벌였다는 의혹이 있었다.
“공수처에서 수사 중이다. 감사원장 등 간부 16명이 형사 피해자로 수사받고 있다. 그런데 대통령께서 공수처장 임명을 안 하고 있다. 권익위원장 시절 대통령, 집권 여당의 핵심 실세들, 권력기관 등에 의한 압력은 공포스러웠다.”
―왜 사퇴하지 않았나.
“책임감과 사명감 때문이다. 권익위는 법률에 독립성과 중립성이 법에 명시된 기관이다. 대통령이 그만두라고 할 수 없다. 개인적으로 모멸감을 느끼고, 사퇴 압박에 공포를 느껴도 그 기관의 장으로서 독립성을 수호할 책임이 있었다.”
―책임감과 사명감을 중요하게 생각하게 된 계기가 있나.
“어릴 때부터 공적인 삶에 관심이 많았다. 가족들 분위기가 그랬다.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책을 많이 읽었다. 특히 위인전을 보면서 그런 위인들의 발자취를 따르겠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했었다.”
―다른 인터뷰에서 ‘데미안’을 인생 책으로 꼽았다.
“인생 책이라고는 할 수 없다. 제가 어릴 때 책을 많이 읽었다. 하루에 한 권씩 읽을 정도였다. 그러면서 무작정 (데미안의) 뜻을 모르고 읽다가 (머리에 전구가 켜지는 듯한) 깨달음을 얻었던 것 같다. 알을 깨고 바깥세상으로 나오게 된 계기였다. 그때가 고등학교 1학년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도 취미 생활이 독서인가.
“지금은 눈이 좀 많이 안 좋아져서(웃음). 책 읽는 게 옛날보다는 어렵다. 그래서 TV나 인터넷을 통해서 정보를 접한다. 그래도 독서는 저를 풍요롭게 하는 방법이다.”
―치과의사, 변호사, 국회의원, 국민권익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어떤 일을 할 때 가장 보람 있었나.
“권익위원장이다. 변호사, 치과의사, 국회의원 등의 경험을 다 융합해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역할이 권익위원장 자리라고 생각한다. 권익위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민원 해결 기관이다. 복합적인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해결하는 곳이다. 제가 국회의원 시절 그런 (중재) 역할을 많이 했다. 그리고 기본적인 법률 지식도 필요하다. 변호사 시절 얻은 지식이 뒷받침해 줬다. 그리고 마음이 아픈 사회적 약자들을 치료해 주는 주치의 같은 자세가 필요하다. 아픈 사람을 치료해주는 치과의사와 같다. (지금까지 삶의) 정수 같은 직업이 권익위원장이었던 것 같다.”
―정치를 하겠다고 마음먹은 이유가 있나.
“원래 정치에 뜻이 없었다. 어릴 때 꿈이 변호사였다. 그런데 부모님이 의사가 되라고 하셔서 치과의사가 됐다. 그러다 뒤늦게 사법시험에 도전해서 변호사가 됐다. 보람 있었다. 우연히 에이즈에 걸린 혈우병 환자 아이들의 집단소송을 맡았다. 사회 부조리에 눈을 뜨게 됐다. 변호하다 보니 사회적인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정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정치에 입문하게 됐다.”
―이번에 출마를 결심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사실 제 인생이 좀 힘들다. 공적인 일이 먼저고 제 삶은 좀 뒷전이다. 개인적인 행복을 추구할 여력이 없었다. 권익위원장을 마지막으로 저와 가족들과 주변 사람들을 위해서 사는 평범한 삶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정말 그렇게 하려고 했다. 은퇴 후 고향에 가서 농사지을 거라고 이야기할 정도로 구체적으로 (은퇴 후의 삶을) 고민했다. 그런데 탄압을 받았다. 전쟁터로 가자 결심을 했다. 윤석열 정부가 저를 정치로 불러냈다.”
―22대 국회가 시작되면 반드시 만들고 싶은 법이 있나.
“두 가지다. 하나는 민생, 다른 하나는 권력기관 개혁. 민생에 대해서는 저출생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는 법을 만들고 싶고, 권력기관 개혁에 관해서는 검찰, 감사원, 공수처 등의 정치적 중립성과 독립성을 보장할 수 있는 법을 고민하고 있다.”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 물망에 올랐다.
“법을 만들려면 법사위가 잘 맞는 상임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민주당이 법사위를 확보하기 위해서 협상이 필요하고, 당의 결정도 있어야 한다. 희망한다고 되는 자리는 아니다. 그러나 만약 기회가 주어진다면 피하지 않고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원내대표에 도전할 생각이 있나.
“구체적인 고민은 해보지 못했다. 몇몇 분이 권유를 하긴 했지만, 결정은 내리지 않았다.”
이강원 기자 2000w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