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내고 더 받자’ 56% 지지, 여야 간 이견…정부 재정 투입 등 책임 강화 목소리 비등
그런데 국민의 뜻과는 거리가 있다. 여론은 ‘더 받기 위해 더 낼 테니 정부도 좀 거들라’에 힘을 싣고 있다. 정치권은 국민을 위한다며 대립각을 세우고 있지만 정작 국민들은 여야의 대결보다 화합과 타협을 주문을 하고 있는 셈이다. 국민연금법 개정권과 법안 거부권을 가진 정치권과 정부 모두 민심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번 개혁안도 근본적인 문제해결에는 접근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세대갈등은 더 심화되고 연금재정 고민도 해결하지 못할 것이란 전망이다.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연금특위)의 공론화위원회(공론위)는 지난 4월 22일 연금개혁 공론화에 참여한 시민대표단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3차례의 설문조사에 모두 참여한 492명 시민대표단의 투표결과는 ‘더 내고 더 받자’(보험료율 13%·소득대체율 50%)가 56%, ‘더 내기만 하자’(보험료율 12%·소득대체율 40%)가 42.6%다. 또 의무가입 상한 연령을 60세에서 64세로 높이고 수급개시연령은 만 65세로 유지하는 ‘더 오래 내자’에 80.4%가 찬성했다. 보험료를 더 많이 더 오래 내는 데에는 대다수가 동의하지만 지금보다는 더 받아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했던 셈이다.
여야 모두 원칙적으로 5월 말 문을 닫는 21대 국회에서 국민연금개혁안을 처리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민주당이 의석 과반을 가지고 있지만 윤석열 대통령이 재의요구권을 감안하면 국민의힘 동의가 필요하다. 개혁안 처리를 22대 국회로 넘겨도 마찬가지다. 벌써부터 여권과 정부에서는 이번 공론위 시민투표에 문제가 있었다는 반발이 나오고 있다.
과연 국민의 뜻이 재정악화에도 불구하고 ‘더 내고 더 받자’에 있는 것일까. 이번에 시민투표에 붙여진 의제 가운데에는 ‘공적연금 세대 간 형평성 제고 방안’도 포함됐다. 내용은 ①국민연금 기금을 청년주택, 공공어린이집 및 노인시설에 투자한다 ②국가의 국민연금 지급에 대한 의무를 국민연금법에 명시한다 ③사전적 국고 투입을 통해 미래 세대의 과도한 부담을 완화한다 ④국민연금 기금운용 수익률 제고를 위해 거버넌스의 전문성과 독립성을 강화한다 등이다. ①번 의제의 찬성 비율은 57.5%로 아주 높지는 않았지만 ②~④번에 대해서는 92.1%, 80.5%, 91.6%라는 압도적 동의율을 나타냈다. 시민투표단이 여론을 반영한다고 전제하면 국민들은 노인빈곤과 재정안정이란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해결책을 원한다고 봐야 한다. 그럼에도 정치권은 소득보장과 재정안정, 이 둘을 대립각으로만 보고 있다.
여권에서는 야당이 지지하는 ‘더 내고 더 받자’가 채택되면 국민연금 누적적자가 2093년까지 2700조 원에 달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현재 국민연금법은 국가는 국민연금 지급 의무를 갖지 않는다. 적자가 나도 결국 가입자 부담이다. 부담과 수혜의 주체에 따라 세대 갈등도 불가피해 보이지만 의무를 갖지 않는 정부가 왈가왈부할 사안이 아니다.
정부 입장에서는 혹시라도 국민연금이 적자로 돌아섰을 때 떠안을 부담을 최대한 늦추는 것이 우선이다. 공무원은 국가가 사용자다. 공무원연금에는 퇴직금도 포함된다. 고용자인 국가가 지급 의무를 진다. 현재도 공무원연금의 적자는 국고로 메우고 있다. 앞으로 부담은 더 늘어나게 된다. 재정 건전성이 위협받으면 자칫 공무원연금에 대한 국고 보조 여력이 줄어들 수 있다. 국민연금과 공무원∙군인∙사학연금 간 격차를 해소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지금도 높다.
국민연금법에는 정부가 관리운영비의 전부 또는 일부를 부담한다는 조항(87조)이 있다. 연간 5500억 원에 달하는 국민연금공단 관리운영비 가운데서도 재정은 13년째 매년 고작 100억 원만 지원하고 있다. 그럼에도 정부는 국민연금 이사장을 비롯한 공단 인사권을 행사한다. 기금운용 통제권도 사실상 정부가 가진다. 국민연금 기금은 국내 주요 기업들의 대주주다. 정부가 은행을 비롯해 주요 대기업에 영향을 미치는 통로가 국민연금인 점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기금운용 수익률 제고를 위해 지배구조의 전문성과 독립성을 제대로 강화한다면 정부 영향력은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시민투표단 10명 중 8명꼴로 기금의 건전성을 높일 방법으로 선제적 재정 투입을 지지한 점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보험료율이 13%면 소득대체율이 40%이든 50%이든 30년 내에 이뤄질 적립기금 감소를 피하기 어렵다. 급여 지급액보다 보험료 수입이 작아져 쌓아둔 돈을 헐어 쓰기 시작해야 한다는 뜻이다. 적립기금은 2040년대에 최대 1750조 원 이상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 중 절반가량은 국내 관련 자산이다. 기금이 보유한 주식과 채권 부동산 등 자산을 팔면 경제는 어떻게 될까. 자산가격 폭락은 경제시스템에 치명적이다. 경제위기의 다른 말이 자산가격 폭락인 이유다. 기금 고갈을 막는다면 경제위기를 피할 수도 있고 연금 재정의 건전성을 유지하기도 쉽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국민이 의무가입하는 연금에 정부가 책임을 지지 않는 유일한 나라다. 선진국은 대부분 적립기금이 소진되거나 크게 감소해 그 해에 걷은 보험료에 정부 보조금을 합해 당해 급여 재원을 마련하는 ‘부과방식’을 택하고 있다. 이 때문에 공적연금 보험료율은 독일(18.6%), 스웨덴(17.2%), 일본(18.4%) 등이 더 높다. 이들 국가는 우리보다 보험료율이 높지만 정부가 재정으로 연금을 지원한다. 국민연금의 모델이 된 일본 후생연금도 가입자 보험료율은 상한을 제한하고 부족한 재원은 정부가 부담한다. 미국은 사회보장세로 사회보장보험을 운영한다. 당연히 법률에 의해 국가가 책임질 의무를 갖는다.
우리나라 정부 부채비율은 국내총생산(GDP)의 약 55%다. 선진국 평균은 111%다. GDP 대비 정부 수입과 지출(2023년)은 23.9%, 24.9%다. 선진국 평균은 35.5%, 41.1%다. 덜 걷고 덜 썼다는 뜻이다. 세입과 세출은 국가 자원의 효율적 재분배인데 우리 정부는 그 역할을 크게 하지 않은 셈이다. 선진국 대비 사회안전망 구축이 소홀했던 것이 정부 부채비율이 낮은 진짜 이유다. 사회안전망의 가장 중요한 3축이 교육, 건강, 노후다.
2023년 국민연금공단의 연금보험료 수입은 58조 원, 운용수익은 1조 2671억 원, 급여지급은 39조 원이다. 현재 추세면 2040년대 초 급여지급액이 보험료 수입과 운용수익을 넘어서며 기금이 고갈 국면으로 향하게 된다. 하지만 정부가 급지급액의 3분의 1가량을 지원하면 기금 감소 국면은 대폭 늦춰진다. 적립 기금 증가세는 더 오래 유지돼 운용 수익의 급여 기여도는 더 높아질 수 있다.
국회 연금특위 자문위원인 김우창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는 “국민연금 개혁이 늦어져 늘어난 부담은 국민이 잘못해서 생긴 것이 아니다”며 “정부가 일반 재정에서 GDP의 1% 정도인 22조 원가량을 투입하면 보험료율을 3%포인트(p)만 올리고, 기금 운용수익률을 1.5%p 상향 조정만 해도 재정 안정화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재정계산위 위원이었던 남찬섭 동아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도 “조세 부담을 연령대별로 구분해 보면 40대 이상이 총근로소득세 납세액의 78.9%를 부담하고 소득분위별로도 상위 10%(10분위)가 총근로소득세의 73.1%를 납부하고 있다”며 “국고를 투입하면 세대별, 소득계층별 차등부담 갈등도 풀 수 있다”고 분석했다.
정부는 국민연금의 수익자부담 원칙(급여에 필요한 비용을 수익자에게 징수)이 훼손된다며 재정 투입에 반대하고 있다.
최열희 언론인